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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304화 (304/1,108)

304화

어찌나 소리가 쩌렁쩌렁한지 모임에 와 있던 사람들에게 다 들으란 듯이 말하는 것 같았다. 이에 범한이 씁쓸하게 웃었다.

“마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잔뜩 흥이 오른 진항이 범한의 어깨를 툭 쳤다.

“내가 정말로 잘하는 건데!”

진항이 주변을 쓱 둘러보며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국화 감상 모임은······ 원래 황제 폐하께서 마련해 주신 대귀족 자제들끼리 가까워질 기회입니다. 그런데 대인 주변은 왜 이렇게 한산한 걸까요?”

범한의 하늘을 찌르는 권세를 보면 저들이 아무리 신분상 열등감을 느낀다 해도 아첨 몇 마디 정도는 떨고 가야 맞는 건데. 이렇게나 한산한 게 이상했다.

그러자 범한은 평온한 얼굴로 대답을 해주었다.

“오늘에서야 안 사실인데 금선 국화는 멀리서 봐야지 가까이서 보면 안 되더라고요. 제 성미를 잘 아시겠지만 원래 참을성을 발휘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성미는 못 되어 놔서······ 가까워지기가 힘든 거겠죠.”

범한이 웃기 시작하며 말을 이어 갔다.

“정말 그런 쪽으로는 흥미가 전혀 없어서 그런가 봅니다.”

범한이 보기에 이 국화 감상 모임은 전생에 있었던 파티나 다과 모임처럼 교제를 위한 장이었다. 함께 어울림으로써 황실과 친분이 있음을 뽐내고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는 그런 것 말이다. 그런데 범한에게는 지엄한 황권에 기대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픈 마음이 전혀 없는 터라 지금 이 자리가 지루하고 재미없었다.

진항은 올해 서른으로 일찌감치 혼례를 올리고 첩도 두고 있었다. 진씨 가문에서는 3년에 한 번 꼬박꼬박 국화 감상 모임에 참석한 터라 진항 입장에서는 지겹도록 국화를 본 셈이었다. 이에 범한의 말을 듣고는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고 있었다.

2 황자와 정왕 세자는 일시적으로 가택 연금이 풀리지 않아 올해는 현공 사당에 올 수 없었다.

“스승님, 여기 경치가 정말 좋은데 시 한 수 지어 보세요!”

섭령아가 맑고 예쁜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보석처럼 빛나는 섭령아의 눈을 볼 때마다 범한은 눈이 부셨다. 이에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대답했다.

“이 스승이 다시는 시를 짓지 않겠노라 다짐하지 않았습니까.”

섭령아가 범한을 스승님으로 부르는 건 소녀의 장난기 같은 것이었지만 이 재밌는 사실은 이미 경도 바닥에 파다하게 소문이 나 있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범한이 대놓고 자신을 스승이라 칭하자 무언가 익살스러운 느낌이 있어 진항과 범약약은 그 자리에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진항이 야유하듯 말했다.

“범한 대인이 북제에서 짧은 시를 지었다죠. 그 시는 이미 천하에 다 퍼졌고요. 설마 그런데도 우리를 속일 셈입니까?”

범한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고개를 내저으며 상황에 맞게 대충 둘러댔다.

“다른 데 소문내지 마십시오. 요즘은 시를 쓰는 게 제일 싫습니다.”

그사이 범약약은 고개를 숙이고 ‘꽃 중 국화만 편애하는 건 아니나, 다른 꽃은 피지 못할 때 국화는 만개하니’라는 구절을 음미하는 중이었다. 한데 돌연 오라버니의 말이 들리자 이유가 궁금해 질문을 던졌다.

“왜입니까?”

“왜냐하면 누군가 다급하게 압박하며 시를 쓰라고 하는 건 내게는 세상에서 제일 괴로운 일이거든.”

범한은 여러 차례 쉬어 가며 말을 이어 가다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는 세 사람의 눈빛에 큰 소리로 웃었다. 그것도 대단히 흥겹게, 매우 시적이고 비밀스럽게,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웃어 버렸다.

현공 사당 앞에 모여 차를 음미하고 시를 읊으며 한담을 나누던 권문귀족들은 어디선가 크게 웃는 소리가 들려오자 경악한 눈빛으로 소리 나는 방향을 쏘아보았다. 절벽가에 네 명의 젊은 남녀가 모여 있었다. 네 사람의 신분은 그들의 마음을 살짝 요동치게 했다.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작은 범 대인이 2 황자를 거꾸러뜨린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진씨와 섭씨 가문의 젊은이들과 함께 있다니. 그들로서는 ‘이게 무언가를 의미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 수밖에 없었다.

범한은 사람들의 이목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다 어디선가 불에 그을린 냄새가 나 코를 살짝 벌름거렸다. 그리고 ‘오늘 식사에 훈연한 고기가 나오나?’ 하고 생각하며 냄새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현공 사당 한쪽 구석에서 보일 듯 말 듯 하게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현장에서 감각이 가장 예민한 이는 범한이었다. 이에 다른 사람은 이 상황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사방에서 경호를 서고 있는 호위병인 대내 시위도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현공 사당 아래쪽에 몰려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절벽가에서 바람을 맞고 서 있는 네 명의 젊은이들만 주시하며 자기들의 처지를 개탄하고 부러워하고만 있었다.

* * *

가을바람이 불었다. 그러자 검은 연기가 출렁하더니 갑자기 크게 성을 내며 불꽃을 드러냈다. 범한은 어느새 바람 같은 속도로 현공 사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진항! 거기 두 사람을 부탁해요!”

말이 끝났을 무렵 범한은 이미 사당 앞에서 맹렬히 열을 토하는 불과 마주하고 있었다. 열기가 얼굴로 훅 치고 들어오는 가운데 칼을 빼 들고 자신을 공격하는 호위병들을 손바닥으로 쳐내며 화를 냈다.

“다들 눈이 멀었느냐?”

화염이 하늘로 솟구쳤다. 현공 사당은 목조 건조물이어서 불길이 정말 빠르게 번져 나갔다. 그러자 국화 감상 모임에 참석한 젊은 권문귀족들이 놀라 사방으로 흩어져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비록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건조한 날이기는 했어도 이번 화재는 너무 이상했다. 금군 대통령 궁전은 이 순간 최고층 위에 있을 테니 아래쪽에 있는 호위병 대내 시위들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범한이 호위병들과 내관들을 향해 소리쳤다.

“준비해 둔 모래와 자갈은 어디에 있는가?”

범한의 말에 사람들은 조금씩 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범한의 신분을 알기에 그의 지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 사당 1층에 있는 나이 많은 대신들을 아래로 내려오도록 했다. 그런 후 황제 폐하를 엄호하고 화재 소식을 전하기 위해 호위병을 올려 보내고, 십여 명의 고수들에게 사방에 조심스레 방어선을 구축하도록 했다.

모두 신속하고 군더더기 없이 움직였다. 권문귀족들이 불안해하며 허둥대는 사이 호위병들과 내관들은 용감하게 불을 끄는 데만 열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래쪽에 있는 불씨가 잡혔다. 범건 상서를 포함한 대신들은 이때를 틈타 1층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현공 사당은 계단이 너무 협소한 탓에 소식을 알리러 간 사람은 더 빨리 위로 올라가지도 못했고, 꼭대기 층에 있는 사람도 금방 내려올 수 없었다.

범한은 아버님이 무사한 걸 보고 일단은 안도했다. 하지만 앞서 자신의 불길한 상상이 막상 현실이 되자 가슴이 두근거리며 진정이 되지 않았다. 만약 이 불이 정말로 번져 나갔다면 꼭대기 층에 계신 황제 폐하는······ 정말 돌아가셨을 수도 있을 터다.

누군가가 불을 놓은 게 분명했다. 상대방이 대체 어떤 신분으로 위장했기에 이렇게나 경비가 삼엄한 사당 앞까지 온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방화에 쓰인 도구는 너무 허술해서 범한도 발견할 수 있을 정도였다.

간단히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엉망진창이 된 사당 앞에서 범한은 어떻게든 냉정을 유지하고 사건을 분석하려 애썼다. 하지만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완아가 아직 꼭대기 층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 평정심을 되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흐트러지고 불길한 생각만 떠올랐다. 하지만 누군가가 쳐놓은 덫에 걸려들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섣불리 위층으로는 올라가지는 못하고 있었다.

“범한, 위로 올라가서 황제 폐하를 엄호하거라!”

범건 상서가 곁으로 다가와 냉정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범한도 그러고 싶던 터였다. 이에 아버지의 눈에 담긴 애매모호한 기색에 대해서는 더는 생각하지 않고 곧장 호위병 중 고수 둘을 데리고 현공 사당 꼭대기로 향했다. 범한은 계단을 사용하지 않았다. 땅바닥에서 뛰어오르더니 좁디좁은 사당의 처마를 밟고는 귀신처럼 시커먼 잔상만 남기며 재빠르게 꼭대기로 기어 올라갔다.

범한의 손가락이 사당 처마 사이의 틈을 움켜쥐자 그의 몸이 가볍게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다시 발끝이 손가락 마디 정도 튀어나온 바깥쪽 나무 난간을 밟자 몸이 빠르게 위로 솟아올랐다. 잔재주와 결합된 절묘한 신체 움직임이 몇 번 반복되더니 범한은 눈 깜짝할 사이에 현공 사당의 최고층에 도달해 있었다.

아래쪽은 상황이 안정되는 중이었다. 불은 진화되었고 권문세족들은 숱하게 전쟁 속에서 지독한 역할을 맡아 온 이들이라 그런지 잠시 소란스러웠지만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몇몇 나이 든 대신들은 사당의 안전을 공고히 하기 위해 앞장서서 호위병들을 동원해 방어선을 한 겹 더 구축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나자 사람들이 초조하게 황제 폐하가 있는 위쪽을 바라보았다. 한데 때마침 범한이 전광석화처럼 움직이며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고 있어 처음 보는 뛰어난 실력에 사람들은 일제히 탄성을 내질렀다.

범한이 오른손으로 꼭대기 바로 아래층 처마를 움켜쥔 상태에서 왼쪽 다리를 살짝 구부렸다. 그러고는 왼쪽 신발 안에 숨겨 둔 검은 비수 위로 왼손을 가져다 댔다. 그사이 범한의 몸은 산바람을 맞아 살며시 흔들리고 있었다. 꼭대기 층은 조용했다. 하지만 범한으로서는 감히 무례하게 침입할 수 없어 일단 위를 향해 큰 소리로 아뢰었다.

“소신 범한입니다.”

꼭대기 층에서 누군가가 무어라 말하는 것 같기는 했다. 이에 범한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창문 틈을 통해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무수히 많은 싸늘한 빛이 점점 한곳으로 수렴되더니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안에서 누군가가 한마디 했다.

“들어오너라.”

삐거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무 창문이 열렸다.

범한은 말이 떨어진 즉시 복부의 근육을 오므렸다 팽팽하게 폈다. 그러자 그의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산바람의 도움을 받아 사뿐하게 사당 꼭대기 층으로 들어갔다. 범한은 황제 폐하께서 놀라실까 봐 조심스레 행동했다.

이에 양발이 지면에 닫자 먼저 곁눈질로 주변부터 살폈다. 그를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 자세를 취했던 호위병들이 서서히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만약 앞서 통보도 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들어왔다면 자신을 맞아 주는 건 무수히 많은 칼날이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범한은 일단 내부부터 쓱 훑어보았다. 한데 예상했던 검수의 활동 같은 건 보이지 않아 일단 한시름 놓았다. 그런 후 복도가 꺾어지는 곳을 보니 황태후마마의 그림자가 살짝 보였다 사라졌다. 가정 걱정되는 사람인 아내 임완아는 황태후를 모시고 있었다. 그리고 심후한 실력의 소유자인 홍 태감은 두 손을 소매에 넣고 구부정한 자세로 맨 뒤쪽에서 따라가고 있었다.

아래쪽에서 불이 나자 황태후와 황궁 여인들이 먼저 피신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왜 온 것이냐?”

위엄이 깃든 침착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범한은 놀라 멈칫했다가 얼른 몸을 돌려 왼쪽 난간에 있는 중년의 누군가에게 예를 올리고는 차분히 설명했다.

“아래쪽에서 불이 났습니다. 누군가 일부러 저지른 것으로 소신, 황제 폐하의 안위가 걱정되어 이리 왔습니다.”

경국의 황제 폐하는 오늘은 밝은 황색의, 평소보다 가벼운 복장을 입고 있었다. 그는 뒷짐을 진 채 난간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대가 높은 곳이다 보니 밖을 내다봤을 때 무수히 많은 산과 강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온 산에 핀 황색 국화가 주는 가을의 소슬한 느낌도 한껏 느낄 수 있었다. 황제는 자신의 안위는 전혀 걱정 않는 사람처럼 평온하게 강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꼬리를 살짝 올라간 모습에서는 사당 아래에서 삼엄히 경비하고 있는 관료들을 향한 조소가 옅게 드러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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