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화
자신에게는 군사와 관련해서는 재능이 하나도 없었다. 이에 수년간 군을 이끈 실력자 앞에서 그는 가만히 ‘침묵은 금’이란 진리를 실천으로 옮겼다.
“범한 대인은 상삼호를 만나 보았는가?”
1 황자의 얼굴에 잠시 동경하는 기색 떠올랐다. 그러고는 살짝 존경심이 담긴 흠모하는 표정을 지었다.
범한에게는 살짝 놀라웠다.
“상경성 황궁에 갔을 때 멀찍이서 한 번 뵈었습니다. 하지만 별다른 인상이 남진 않았습니다.”
1 황자가 다리를 한 대 툭 치고는 범한을 못마땅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경이 사람을 몰라보았군, 사람을 몰라보았어. 친해질 수 있는 좋은 기회였건만 그리 날려 버리다니.”
“네?”
범한이 눈썹을 들었다 내리며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1 황자마마께서는 상삼호를 왜 그리 중히 여기시는 겁니까?”
“시대의 영웅 아닌가.”
1 황자가 시원시원하게 일갈했다. 그런 후 두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차갑게 말했다.
“북제 북면에 3천 리에 이르는 방어선을 혼자 힘으로 구축하신 분이네. 그로써 오랑캐들이 남하하는 걸 십여 년 동안 막았지. 또한 눈 덮인 땅에서 차례대로 기습 공격을 펼쳐 천 리를 나아가 북쪽 오랑캐의 수급 수천을 벴고. 범 대인은 몰랐나 보군. 호인과 만인이라 부르는 오랑캐는 모두 흉악하기로 유명해. 하지만 서쪽의 호인은 북쪽 만인에 비하면 아주 약한 이들이네. 본왕이 몇 년 동안 서역에서 호인이라 불리는 오랑캐들과 교전을 펼치는 동안 절실히 깨달았다네. 북제 조정이 저리도 불안정한데도 상삼호가 그리 오랫동안 버텨 준 건 실로······ 실로 무서울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란 걸 말이네.”
“안타깝군요. 상삼호는 이미 상경성으로 불려갔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1 황자마마와 사막에서 맞붙을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범한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1 황자의 얼굴에서 자신감이 넘치는 빛이 반짝이더니 느긋하게 말을 해나갔다.
“그런 뛰어난 장군을 조정으로 불러들이다니 전혀 쓸모가 없을 터인데······. 하나 훗날 정말로 국경선 부근에서 마주치게 된다면 본왕이 아무리 그의 병법이며 영웅다운 기개를 흠모한다 할지라도, 내 배운 걸 총동원해 제대로 상대해 줄 생각이네.”
호방하다는 게 이런 거였구나. 온몸에서 호방함을 발산하고 있는 1 황자를 보며 범한은 망연자실했다. 자신의 경우는 어려서부터 방향을 잘못 잡기도 했고 또 전생의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해서 이번 생에서는 군과 전장에서 연마한 이런 호방한 기질을 가질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나름의 자신감이 있어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비록 상삼호의 병법은 배우지 못했지만 그가 빗속에서 심중을 죽인 걸 보면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그 결단력 하나만으로도 과연 고수는 고수였습니다.”
1 황자가 웃는 듯 아닌 듯한 표정으로 조금 이상하게 범한을 바라보았다.
“북제 진무사 지휘사 심중 말인가? 그 일에 범한 제사도 관련되어 있지 않나?”
심중의 죽음은 범한과 해당타타가 함께 모의한 계획의 첫 단계였다. 사실 경국이 어느 정도 개입했을 거라 의심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막상 1 황자가 그 점을 콕 집어 말하니 범한은 속으로 움찔했다. 하지만 어수룩한 미소를 지었다.
“마마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우리 감찰원 사람은 은밀한 일만 처리합니다. 황자마마나 상삼호 장군처럼 무공이 뛰어나지 않아도 언제든 조정을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그러자 1 황자가 한동안 범한의 두 눈을 응시하고 있다가 갑자기 말하기 시작했다.
“이래서 본왕이 자네를 얕봤다 말한 걸세. 상삼호 같은 안하무인이 범한 제사의 묘수에 걸려들어 꼭두각시 역할이나 하다니, 범한 대인의 일 처리는······ 과연······ 예측 불허일 정도로 심후하군.”
상삼호가 비 오는 거리에서 심중을 살해했다. 그리고 구체적인 사항은 북제 황제와 해당타타가 정교하게 계획한 일이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범한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오해했다. 이는 범한이 더 무서운 인상을 갖게 되고 주변인으로부터 더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이에 범한은 뻔뻔하게도 자랑스럽게 웃으며 바로 그렇다고 맞받아쳤다.
“듣기로는······ 범한 대인이 9등급 강자라던데?”
말을 하며 1 황자가 범한을 쓱 쳐다보는데 그 눈빛에는 정말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범한이 살짝 고개를 갸웃하고는 슬며시 웃고는 대답했다.
“마마, 저는 마마와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누가 이기든 모두 조정에 손실을 입히는 것이니까요.”
이는 1 황자가 앞서 중재하기 위해 꺼낸 말을 가지고 범한이 질문에 대한 답을 회피하는 동시에 질문 당사자의 입을 막아 버린 행동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범한의 교활한 대응에 1 황자는 속이 답답해졌다. 그리고 무예를 좋아하는 성미 때문인지 몰라도 무력을 거의 쓰지 않는 범한과 한판 겨뤄 보고 싶었다.
“제게 훈계를 두려는 분은 많답니다.”
그러고는 이따가 변태 같은 그림자를 만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그냥 어지간하면 황자마마께서는 하품이나 한번 하시고 저를 놓아주시지요.”
1 황자는 이번에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는 원래 명랑하고 직선적인 성격으로 친구를 사귀는 걸 좋아했다. 그런데 황자 신분이고 또 수년 동안 군에서 지내며 호전적인 성격이 길러져서 그런지 자신에게 감히 자유롭게 대화를 걸어오는 신하는 몇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앞에 있는 범한은 성도성 밖에서 이미 만나 그런지 자신에게 공손히 행동하지 않았다. 오늘 진원에서 만나기는 했어도 범한이 이렇게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건 실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한데 한술 더 떠 기분에 따라 시시덕거리고 화까지 내고. 아무리 봐도 범한은 자신을 황자로 여기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1 황자가 심호흡을 했다. 세상이 그새 조금 바뀐 건지 그가 보기에 적어도 범한이란 젊은이의 주변은 이미 이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범한 대인은 말을 재미있게 하는군. 자네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니 좋군.”
1 황자가 드디어 돌아온 진항을 바라보며 미소 띤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자네가 내 체면을 생각해 주었으니 경도성 밖에서 길을 두고 다툰 일은 없던 일로 해주겠네. 다만 나중에 내가 자네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려 할 때, 병이 났다거나 소피가 마렵다는 핑계로 도망가지나 말게.”
범한이 웃으며 인사를 했다.
“어찌 그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1 황자마마께서 말씀하시니 다른 분들이 하시는 것보다 뜻깊게 다가옵니다.”
다른 분들이라 함은 당연히 황제 폐하가 낳은 다른 황자들을 이르는 것이었다.
* * *
1 황자는 진평평에게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았다. 성격이 괴팍한 원장 대인은 그와 같은 허례허식을 신경 쓰지 않아서였다. 그는 진항과 함께 진원을 떠났다.
진원을 떠나기 전, 진항은 범한을 진씨 가문 저택으로 초대할 날짜와 시각을 정하기 위해 잠시 범한과 속삭이며 대화를 나누었다.
두 사람이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가 경계가 삼엄한 진원 밖 산길을 지나고 또다시 풀숲에서 산적들처럼 웅크리고 있는 사남 백작가의 호위 무사와 감찰원 계년조 사람들을 지나자, 1 황자는 그제야 마차 차창의 푸른 가림막을 내려놓으며 싸늘하게 말했다.
“범한이라, 과연 비범하더군.”
진항이 웃으며 말했다.
“제 부친의 뜻에 따르면 범한이 강해질수록 좋은 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능력도 없는 이가 감찰원을 맡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되면 추밀원의 나이 든 분들이 화가 나 죽으려 하겠지요. 우리 군에 있는 형제들도 좋은 날은 다 지나간 게 되는 것이고요.”
가만히 고개만 끄덕이던 1 황자가 갑자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여러 해 만에 경도에 돌아오니 정말 적응이 안 되는군. 가볍게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고 말이야.”
그의 근위병들은 대부분 해산해 귀환한 상태였고 서정군(西征軍)에 편제되었던 이들도 이미 해산하고 없었다. 병부에서 다른 군인들을 모아 서쪽 변방으로 보냈지만 그는 지금 경도에 남아 있었다. 북제에 있는 그 용맹한 장수와 비슷한 처지였다. 그래도 어찌 되었든 황자였으니 상삼호 보다는 훨씬 좋은 대우를 받고 있기는 했다.
“범 제사와 이야기를 나누신 건 어떠셨습니까?”
“괜찮았네.”
1 황자가 말을 이어 갔다.
“자네 부친은 마음을 놓아도 될 듯하네. 진평평 원장이 노진 장군에게 한 말대로 범한의 능력이면 감찰원은 지금처럼 효율적으로 운영될 것이고 군 측이 하는 일을 효과적으로 지원할 걸세.”
진항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 점은 저도 믿고 있습니다. 단지 제가 보기에 범한 대인은 어쩌면 너무 과한 면이 있는 것 같아······.”
“범한 대인이란 자는 용의주도한 사람입니다. 타국 사람과도 교류할 정도이고 무공 실력도 9등급이라는 초강자의 경지에 들어섰고요. 감찰원 업무도 확실히 장악하고 있고······ 아, 시선이란 신분도 있었군요. 장묵한 대가로부터 서책을 증여받아 문인의 우두머리가 되었지요. 그리고 장래에 감찰원 원장이 될 것이고······ 그리고 이게 다 한 사람을 이르는 말입니다.”
진항이 불가사의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이런 사람은 이제껏 없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는 진평평 원장보다 더 멀리 갈 것 같습니다.”
그러자 1 황자가 탄식했다.
“내년에 그가 황실의 금고를 쥐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나. 한데 이렇게까지 첨예하게 대립하면 천하 사람들의 주목과 공격을 한 몸에 받게 될 터인데. 대체 부황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황제 폐하가 언급되자 진항으로서는 불편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1 황자가 웃으며 그를 쓱 바라보더니 계속 말을 이어 갔다.
“하나 범한은 아직 젊지 않은가. 더군다나 원장 대인과 비교하면 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네. 어쩌면 그이도 잘 알고 있을지 모르지. 그래서 이번에 둘째 일을 가지고 위세를 부리며 세인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거라네. 자신의 약점을 누구보다 먼저 보호하기 위해서 말일세.”
“무슨 약점 말입니까?”
진항이 궁금해했다.
“그의 생각 방식은 무언가에 얽매여 있더군.”
1 황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엄숙하게 말을 이어 갔다.
“숙부님과는 달랐어. 숙부님은 자식이 없어. 부모님도 일찌감치 돌아가셨고 친척도 하나 없지. 진정한 친구라 할 만한 이도 없고. 진원에 아름다운 여인들이 많기는 해도 그중에서 진짜 마음을 준 여인도 없지. 그야말로 그냥 고독한 나무 그 자체랄까, 적들이 숙부님을 무너뜨릴 수 없는 이유는 숙부님의 약점을 찾으려야 찾을 수 없어서지. 하지만 범한은 달라. 아내도 있고, 누이도 있고, 가족과 친구도 있고······. 이 모든 게 그에게는약점인 거네.”
생각해 보니 정말 그러했다. 경국 사람 중에 진평평이 가장 신경 쓰는 사람이 누구인지······. 물론 황제 폐하 한 사람 빼고 다른 누가 있는지 그 점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혈육도, 친구도, 사랑하는 이도 없는 삶이라니······ 사는 게 분명 고역일 것입니다.”
진항은 인생을 아직 많이 산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런 상황은 생각만으로도 암담했다.
“원장은 참으로 대단해.”
1 황자가 얼굴에 존경심을 띠며 말을 이어 갔다.
“범한이 그러한 경지까지 가려면 아직 한참 멀었어.”
* * *
진원에서는 노랫소리와 악기 소리가 무기력한 구름처럼 나른하게 흘러나와 공중으로 흩어져 나가고 있었다. 십여 명의 화려하게 차려입은 미인들이 호수 위에 마련된 누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있었다. 바퀴 의자에 앉아 있던 진평평은 임완아와 범약약과 함께 만족한 얼굴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동안 상문은 금을 품에 안고 춤을 추는 여인들을 위해 곡을 연주했다.
이처럼 왕과 제후처럼 마음 편하게 자유롭게 사는 중인데 마차를 타고 떠나는 경국군 측의 두 젊은이는 진평평의 이런 삶을 동정하고 있다니.
범한이 걸어오자 진평평이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러자 가무가 멈추고 한 여인이 조심스레 임완아, 범약약, 상문을 데리고 뒤쪽으로 가려 했다. 범한이 진평평과 나눌 이야기가 있음을 아는 임완아는 일단 자리를 떠나기 전, 잠시 범한을 바라보며 1 황자 오라버니와 이야기를 나눈 건 어떠했는지 물으려 했다.
범한이 아내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런 후 진평평의 등 쪽으로 가 자연스럽게 두 손을 바퀴 의자 위에 놓고는 물었다.
“어디로 갈까요?”
진평평이 말라비틀어진 손을 들어 정원 동쪽에 있는 숲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