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진항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너무 놀라 심장이 덜컹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범한이 감찰원에서 잘나가는 건 황제 폐하께서 총애하시고 끌어 주셔서라고 대신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모두가 두려워하는 진평평 원장 대인과 대화를 나누는 범한을 보면 놀랍게도 ‘어쩜 이리도 위아래도 없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그런데도 진평평 원장 대인은 자연스럽게 받아 주어 진항으로서는 기분이 이상했다. 이제 보니 원장 대인과 범한 제사의 관계는······ 역시나 예사 관계가 아니었다.
황제 폐하의 총애가 중요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감찰원을 장악하려면······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진평평 원장의 태도였다. 그렇기에 바로 이 순간, 진항은 범한이란 젊은이가 언젠가는 감찰원을 거머쥐게 될 거란 걸 제대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군 측은······ 이자와 더 빨리 친해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중서(@성) 회의에서 범한 대인을 거들기 위해 좋은 말을 하는 정도에서 그칠 게 아니라 타인을 통해서라도 재차 사남 백작가에 호의를 보여야 했다.
불과 몇 마디 대화였지만 서로 간에 쓸모 있는 정보들이 제법 많이 오갔다. 범한도 지금 이 대화로 진평평 원장 대인의 태도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는 군 측에게 자신의 가장 진실한 태도를 보여 주고 주변 여건들을 더 강화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계절과 관련한 이야기를 몇 마디 더 나누었다. 그러다 범한은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 그제야 1 황자를 향해 예를 갖추어 인사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도리를 따진다면 범한은 정말 무례한 행동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대청에 있는 사람들은 그가 1 황자와 처음 만났을 때 소란을 피운 걸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진항은 1 황자와 친한 사이여서 범한의 행동을 신경 쓰지 않았다. 한편 진평평 원장은 황궁 내 예절 따위는 개나 줘버릴 것으로 여겼으므로 지금 이 상황은 아예 신경도 안 썼다.
범한은 1 황자가 자신에게 화를 내리라 생각하며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하마터면 화를 내는 건 자신이 될 뻔했다. 부인 임완아가 눈웃음을 활짝 지은 채 사근사근한 태도로 1 황자 곁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어서였다.
이런, 부인! 임완아는 어려서부터 영 재인의 궁에서 지냈고 1 황자는 그녀가 자라는 걸 보아 왔으니, 범한도 알다시피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은 남매와 같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범한은 불쑥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더욱 불쾌했던 건 아랫자리에 앉은 누이 약약마저도 1 황자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다는 점이었다.
범한이 귀를 쫑긋 세우고 두어 마디 엿들었다. 1 황자가 서역 정벌을 나섰을 때 오랑캐들과 싸웠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경국 사람들은 무를 숭상했다. 1 황자는 여러 해 동안 서쪽에서 전투를 치러 왔으므로 민간에서 그는 영웅이자 우상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임완아와 범약약의 생각도 일반 백성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범한은 지금 이 상황이 마뜩지가 않아 입이 써서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이 몸께서는······ 이 몸께서는······ 이 몸께서는 평화주의자란 말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나도 당장 누구랑 몇 판 붙어 두 사람에게 내 진짜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 줬을 거라고!’
범한은 씁쓸했지만 그런 기분을 겉으로는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웃으며 자연스럽게 1 황자에게 예를 차려 인사를 올렸다.
“하관 범한, 1 황자마마를······ 이런, 화친왕을 뵈옵니다.”
1 황자가 범한을 바라보았다. 마음이 좀 답답했는데 범한의 말투 때문에 결국에는 몇 마디 늘어놓고 말았다.
“이보게, 범한. 본왕이 대체 자네에게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건가? 이렇게 만났는데 본왕에게 몇 마디 쏘아붙이지 못해 기분이 나쁜 건 아닌가 모르겠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임완아에게 말했다.
“신아야, 네 상공은······ 진짜 별로구나.”
임완아는 1 황자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터라 자신의 남편이 그의 눈에 찰 리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탁자 위에 있던 과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겨우 한 번 만나 보시고는 어찌 매제에 대해 다 안다 하십니까?”
범한은 매제란 단어가 너무 마음에 들어 웃었다. 그런 후 범약약보다 아랫자리로 가서 앉았다. 진원의 종들은 이미 뜨거운 손수건이며 차 등을 범한에게 가져다준 상태였다.
1 황자와 진항이 늙은 절름발이를 찾아온 건 중요한 일이 있어서일 터. 물론 범한도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에 철판을 깔고 바로 대청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저들에게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임완아도 사절단과 1 황자의 군인들이 경도성 밖에서 길을 두고 다툰 일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범한이 왜 그랬는지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보기에 그 일은 사실 범한의 잘못이었다. 그리고 지금 범한은 2 황자의 목표물이 된 상태이니 1 황자에게까지 밉보여서는 안 되었다. 더군다나 임완아는 자신과 가장 친한 1 황자가 상공과 충돌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이에 무의식적으로 사이에 끼어들어 둘의 관계를 부드럽게 유지하려 애썼다.
임완아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다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본래 배알이 뒤틀리는 때가 있기 마련이다. 이에 1 황자는 시선을 돌린 채 범한을 상대하지 않았다. 한편 범한은 배시시 웃는 얼굴로 진항하고만 대화를 나누었다. 연로한 진 장군께서 몸은 좀 어떠신지 묻기도 하고 언제 시간 내서 뵈러 가야겠다는 등의 말을 건네며 말이다.
진평평은 바퀴 의자에 반쯤 몸을 기대앉아 어찌 보면 잠든 사람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이렇게 호화로운 곳에 살면서 푹신하고 긴 의자에 편히 있는 게 아니라 계속 바퀴 달린 의자에만 앉아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임완아도 어쩔 수 없었는지 그냥 한숨만 내쉬었다.
옆에 있던 범약약이 웃기 시작했다. 전장에서 활약한 1 황자 그리고 조정에서 가장 잘나가는 젊은 대신이 어린 사내아이들처럼 투정을 부리는 모습이 그녀에게는 익살스럽게 와닿았다.
드디어 진항도 범한과 더 이상 말할 거리가 없어질 무렵, 1 황자가 갑자기 싸늘하게 말했다.
“듣기로는 범한 제사가 최근 와병 중이라 조회에도 못 나온다던데. 도찰원이 탄핵을 했는데도 자기 변론을 하지 않았다지? 한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 예까지 놀러 온 건지······.”
그러자 범한이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내일 조회에 나갈 것입니다. 내일, 바로 내일 말입니다!”
진항이 깜짝 놀라 생각했다.
‘설마 이제 아픈 척은 그만하려는 건가? 그렇다면 내일 조회에서 한바탕 시끄러운 일이 일어나겠군. 그런데······ 1 황자마마께 예까지 끌려와 말하려던 건, 범한 자네의 체면을 봐서라도 말하기 쉽지 않군.’
그는 원래 하고자 하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하지만 1 황자는 광명정대한 사람인지라 회피하지 않고 진평평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숙부, 둘째 일은 숙부께서 말 좀 해주세요.”
그가 고개를 갸우뚱한 채 범한을 잠시 쓱 바라보고는 말을 이어 갔다.
“조정에서의 일은 나도 이해가 잘 안 됩니다. 하지만 경도에서 떠도는 소문들이 너무 황당하네요. 게다가 둘째 밑에 있는 관원 중 몇몇은 정말 재능이 출중한 자들이에요. 그러니 이렇게 두었다가는 조정 입장에서는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항은 속으로 ‘황자마마께서는 악당이셨군요! 범한 제사를 앞에 두고 대놓고 그의 체면을 깎으시다니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바로 안면몰수하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원장 대인, 황제 폐하께서도 줄곧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다. 그러니 대인께서 나서지 않으셔서 일이 더 커지면 조정의 체면이 서지 않을 것입니다.”
두 사람의 너무나도 광명정대한 행동에 범한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1 황자와 진항이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를 명확히 드러낸 것이었다. 2 황자 파가 감찰원에 의해 궁지에 몰려 직접 나서기 힘드니 자신의 큰형님에게 대신 나서 달라 부탁한 것이었다. 그리고 1 황자는 진평평에게 찾아올 때 추밀원을 맡고 있는 진씨 가문까지 끌어들인 것이었다. 그야말로 자기 결점은 감추면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었다. 진평평이 범한에게 멈추라고 지시한다면 범한도 따를 수밖에 없을 터이니.
그런데 범한으로서는 이미 취해야 할 이득은 모두 취한 상태였다. 경도 부윤을 제거했고, 6부에 있는 2 황자 파 관원들은 정도가 크든 작든 전부 손해를 입었다. 그리고 범한에게 그런 사실들은 이미 관심 밖이었다. 1 황자가 앞서 꺼냈던 호칭만 마음에 담아 두고 신경 쓰는 중이었다.
진평평의 실력이 아무리 헤아릴 수 없다 해도 또한 그가 아무리 황제 폐하와 친근한 사이라 해도 당당한 1 황자가 그를 숙부라 부르는 건 예법상 맞지 않았다. 그리고 만약 누군가가 이 단어를 듣게 된다면 놀라 까무러치며 물을 게 뻔했다. ‘황자님 숙부가 누구시라고요? 정왕이시지, 일개 대신이면 안 되죠!’라고 말이다.
범한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진평평이 생기 없는 두 눈을 뜨고 작게 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말했다.
“둘째 일은 이따가 다시 말하지요. 그러니 제 말은······.”
그가 임완아와 범약약을 가리키며 기침을 하며 말을 이어 갔다.
“콜록콜록, 두 사람은 내 장원에 처음 발을 들여 놓고 어찌하여 주인에게는 인사도 건네지 않는 건가요?”
사실 진평평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특히 떠도는 수많은 소문을 통해 진평평은 행실이 불량한 한밤의 마귀 같은 인물로 거듭나 있었다. 그러니 임완아와 범약약은 제아무리 신분이 높다고 해도 경국의 어둠을 이끄는 수장 앞에서는 두려움이 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대청에 들어서자마자 서둘러 1 황자 곁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그러다 지금 와서 노인네가 말을 꺼내자 임완아와 범약약은 난처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진평평 앞으로 나아가 후배로서의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진평평이 잠시 웃었다.
“뭐 무서울 게 있다고! 그대들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보다 더 나을 것도 없거늘.”
당연히 장 공주와 늙고 교활한 간신 범건 상서를 이르는 말이었다. 진평평 원장이 1 황자에게 말했다.
“황자께서 말씀하신 일은 당사자가 이 자리에 있으니 직접 말씀해 보시지요. 그가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군주 마마, 범 낭자, 이 노인을 대신해 의자 좀 밀어 주구려. 이 늙은이가 진원에 있는 진귀한 것들을 보여 주고 싶어 그러오.”
두 여인과 상문이 늙은 절름발이의 바퀴 의자를 밀며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대청에 남은 범한, 1 황자, 진항 세 사람은 서로를 데면데면하게 바라보며 속으로 진평평을 향한 원망을 늘어놓았다.
‘저 늙은이가 정말 너무하는군. 자기 집을 우리들의 전투장으로 내어 놓고는 자기만 예쁜 여자 셋이랑 정원 구경이나 하러 내빼고 말이야!’
진항은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아버지가 군 측에서 신망받는 높은 지위에 있다 하더라도 서른 정도의 나이에 중서성 회의에 참석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런 똑똑한 진항이 침착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1 황자와 범한을 향해 두 손을 가슴팍까지 올리고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급한 일이 있어 그러니 두 분 먼저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지요.”
그러고는 두 사람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전혀 이상할 것 없다는 듯 태연한 걸음걸이로 대청 한쪽 구석까지 바람처럼 이동했다. 그런 후 종들의 길 안내를 받아 곧장 측간으로 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