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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298화 (298/1,108)

298화

마차는 경도 남문 쪽으로 오더니 곧장 외곽으로 나갔다. 인적이 드문 곳이다 보니 그동안 음지에서 범한을 호위하던 계년조 밀정들과 사남 백작가 호위 무사들은 어쩔 수 없이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뻘쭘하게 서로를 바라보다가 마차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대장이 불편한 기색이기는 해도 뒤를 따르자 이들도 곧장 그 뒤를 따라갔다. 마차는 경도 외곽의 어느 조용하고 자그마한 산을 향해 가고 있었다.

산이 가까워지고 있는데도 산길은 전혀 좁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 여전히 경국의 1급 공식 도로가 깔려 있었다. 길옆으로 펼쳐진 깊고 그윽한 숲과 함께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노랗게 변한 풀들 사이로 여기저기 아직도 들꽃이 남아 있었다. 초지 위에 서 있는 흰 나무껍질이 인상적인 나무에는 여전히 파릇파릇한 나뭇잎이 듬성듬성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나무들 뒤로는 무수한 층을 이룬 색상들이 풍부한 색채감을 뽐내고 있었다. 화공이 그려 놓은 듯 산림 사이사이에 자연스럽게 흩어져 있어 참으로 아름다웠다.

임완아와 범약약에게서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이렇게나 풍경이 멋진 곳이 있었다니. 그런데 왜 이제까지 아무도 말해 주지 않은 거지? 과거 교외로 소풍을 나온 적은 있었지만 이곳에는 처음이었다. 이치대로라면 이렇게나 풍광이 멋진 곳에는 일찌감치 황궁이나 고위 관료의 별장이 들어서 있어야 했다. 그런데 왜 이곳의 땅 주인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는 거지? 하지만 산길의 폭만 봐도 어느 정도 정보는 얻을 수 있었다. 잠시 후면 누군가의 별장으로 가게 될 거란 걸. 그것도 분명 대단한 인물이 사는 별장에 말이다.

그런데도 범한이 여전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것 같자 두 여인은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이에 입을 닫아걸고 범한에게 한마디 걸지 않은 채 주변 경관을 감상했다.

산길이 끝나 갈 무렵, 마차가 말 머리를 돌려 숲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무척 넓은 장원이 펼쳐졌다. 도술이라도 부린 것처럼 갑자기 운무가 사라지며 신선이 사는 곳이 범인들의 앞에 나타난 것만 같았다. 장원 건물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하지만 배치가 좋았고 정원에 있는 관목, 푸른 바닥 석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었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처마 끝에 달린 빗장까지 섬세하게 신경 써 수려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황궁과 비교해 어떤가요?”

범한이 웃으며 물었다.

임완아가 놀라 떡 벌어졌던 입을 다물며 조소하듯 말했다.

“······이 역시 괜찮군요. 한데 우리 집안 장원도 아닌데 뭘 그리 득의양양해하는 것입니까?”

범한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곳 주인이 나중에 이곳을 내게 물려준다 하였습니다. 한데 나는 여기가 평범해서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여기에서 살고 싶지는 않아요.”

그러자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범약약이 깜짝 놀라 물었다.

“여기가 마음에 안 드신다고요?”

“여인들이 너무 많거든.”

범한이 정색하며 말을 이어 갔다.

“이 장원에 절세미인이 셀 수도 없이 많이 있거든.”

* * *

두 여인이 놀란 건 아랑곳하지 않고 마차가 범한의 지시에 멈추어 섰다. 범한은 여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차에서 내렸다. 그런 후 갑자기 허리에서 제사 패를 꺼내 들어 옆에 있는 풀 더미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무슨 변장술이라도 부린 것처럼 풀더미 속에서 사람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그 사람은 산골에서 흔히 보는 나무꾼 같은 복장을 입고 있었다. 나무꾼이 제사 패를 자세히 살펴보고는 다시 범한을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무척 미안한 기색을 내보였다.

“대인, 반드시 걸쳐야 하는 절차였습니다. 그러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괜찮네.”

범한이 미소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마차 안에 내 처와 누이도 있네.”

그러자 나무꾼 복장의 사람은 다른 말 없이 공손히 뒤로 물러나 눈에 띄지 않는 새로운 잠복 지점을 찾아 들어갔다.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산길을 따라 장원으로 들어가는 내내 정말 고요했다. 마차에 있는 여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곳이 황궁만큼 경계가 삼엄하고 걸음걸음마다 암기가 숨어 있음을 말이다. 이곳은 군대라 할지라도 작은 규모 정도는 쳐들어와도 무참히 패하고 돌아갈 정도로 방비가 잘되어 있었다.

물론 냉철한 지혜를 지닌 총명한 두 여인은 이 순간 산장 주인이 누구인지 유추해 낸 상태였다.

황궁 내 최고위급만큼 누릴 수 있는 자, 이런 멋진 장원에서 살 수 있는 자 그리고 이리 삼엄한 방비를 할 수 있는 자. 감찰원 주인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뒤쪽에서 마차를 호위하던 사람들은 이미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발을 멈춘 상태였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각자 편한 방식대로 휴식을 취했다. 이곳까지 온 이상 자신들이 호위 무사 노릇을 할 필요는 없어서였다.

오늘 계년조의 대장을 맡은 이는 소문무였다. 그가 사남 백작가의 호위 무사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호위 무사 대장이 어색하게 답례를 했다.

“분수를 지켜야겠죠!”

소문무가 길 맞은편 사람을 향해 말을 이어 갔다.

“우리 같은 사람이 원장 대인의 정원에 이렇게나 가까이 와보게 된 것도, 이게 다 범한 제사 대인을 따른 복 아니겠소이까.”

“그렇고말고요.”

시위대 대장이 부러운 눈길로 저 멀리 보이는 아름다운 장원을 잠시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런 후 풀숲 양쪽으로 늘어서서 앉아 풀을 씹거나, 멍하니 있거나, 무료하게 그냥 있거나, 하늘을 보거나, 하품을 하거나 했다.

* * *

이 아름다운 장원에 사는 이는 진평평이었다. 경국에서 황제 폐하를 빼고 최대 권력을 누리는 늙은 절름발이 말이다. 일반 문무백관들과 달리 진평평은 경국 조정에서 대단히 특수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병을 핑계로 조회에 참석하지도 않았다. 이에 꽤 여러 해 동안 성 밖에 있는 장원에서 생활하며 경도성 내에 있는 저택에서는 거의 생활하지 않았다.

오늘, 꾀병 중인 범한이 오랫동안 꾀병을 앓고 있는 진평평을 만나러 왔다. 그는 이전에 몇 차례 방문한 적 있어 헤매지 않고 곧장 정원 문 앞으로 거침없이 나아갔다. 정원 문 앞 편액에는 진평평의 정원이란 뜻으로 ‘진원(陳園)’이라는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 한데 이는 선대 황제의 친필이어서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것이었다.

문밖에 서 있는 마차가 눈에 들어오자 범한은 그만 이맛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오늘 이곳에 손님이 와 있을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때문이었다. 진평평의 고독을 즐기는 성정과 감찰원을 이끌며 생긴 극악무도한 명성을 고려하면, 일반 조정 대신이 이곳까지 와 차를 마실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오늘 이곳까지 찾아온 손님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임완아가 마차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다른 마차를 보는 순간 그곳에 있는 표식을 알아보고는 미소 지었다.

“황가에서 왔군요.”

범한이 놀라서 살짝 긴장했다.

진원 입구에 있던 나이 든 가솔이 서둘러 계단에서 내려와 범한 일행을 맞았다. 그는 여기 있는 이 젊은 대인이 일반 관원들과는 다른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진평평 원장 대인께서 가장 아기는 후배이자 그가 직접 지명한 후계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감히 거들먹거리지 못하고 아주 공손하게 작은 소리로 말을 건넸다.

“화친왕과 추밀원 소진 대인이 와 계십니다.”

범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목덜미를 긁적였다. 1 황자와 소진이라고? 그는 소진 대인이 지금 중서성에서 국정을 논의하고 있으며 이미 추밀원의 중요 대신이 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소진 위에 노진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노진은 나이 든 진씨란 뜻으로 바로 전 군사원 원장이자 현재 추밀원 정사인 진 장군을 뜻했다. 그는 현재 경국군 측의 가장 핵심 세력이었다. 1 황자는 서역에서 몇 년 동안 전투를 벌였으니 진씨 가문과는 깊이 관계를 맺고 있을 터.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진평평의 장원까지 대체 무슨 일로 찾아온 걸까?

범한은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일단 돌계단 아래쪽에 서서 상대방의 이번 방문이 자신과 관련이 있을지부터 생각해 보았다. 군 측과 감찰원 관계가 줄곧 좋았다고는 해도 이번 방문은 조금 이상했다.

범한이 웃었다. 자신이 성 외곽으로 나온 일이, 게다가 아내와 누이까지 대동하고 진평평 원장 대인의 진원에 왔다는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는 건 신경 쓰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대신 1 황자가 어떤 마음으로 이곳까지 왔는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물이 흐르는 곳에 지어진 호화롭고 아름다운 정자를 지나 드디어 진평평 원장 대인의 손님맞이용 대청에 도착했다. 그리고 주인장에게 통보하는 절차도 거치지 않고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원래는 아무것도 말할 생각이 없었지만 한쪽 구석에서 한껏 불안한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상문 낭자를 보며 범한은 저도 모르게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이럴 줄 알았습니다. 경도에서 감히 상문을 데려와 노래 부르게 할 수 있는 곳이 여기 말고 또 있겠습니까!”

포월루에 없던 상문이 진원에 와 있었다.

상문은 포월루의 관리인이었고 감찰원에서 새로 들인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을 진평평이 불러다가 노래를 부르게 한 건 말 한마디만으로도 가능한 일이었다.

웃음소리가 대청 안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상석에 앉아 있던 진평평이 웃는지 아닌지 모를 표정으로 눈을 들어 갑자기 들이닥친 청춘 남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언제나 싸늘하기만 한 그의 눈동자에 따스함이 어리었다. 그가 늘 다리를 덮고 있던 회색 양털 담요에 비쩍 말라붙은 양손을 가볍게 비비며 웃는 얼굴로 꾸짖었다.

“여기에 여인이 많다고 싫어하지 않았더냐! 한데 오늘은 어찌 이렇게 온 것이냐! 그리고 오려면 그냥 올 것이지 어째서 마누라며 누이까지 줄줄이 달고 온 게야? 설마 내가 여자들이라도 불러다 널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손님 석에 앉아 있던 두 젊은이가 흠칫 놀라고는 고개를 돌려 대청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일순간 멍하니 있었다. 어느덧 상문도 노래를 멈추고 환하게 웃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범한과 두 여인에게 예절 바르게 인사를 올렸다.

잠시 후 평복 차림이지만 여전히 군인 특유의 기질이 남아 있는 젊은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우선 예의를 차려 범한 뒤쪽에 있는 임완아에게 인사를 하더니 이어 범약약에게도 온화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 후 얼굴에 미소를 활짝 머금었다.

“작은 범 대인 아니오. 만나게 되어 반갑소이다.”

범한은 진항과 만난 적 있었다. 잘나가는 가문 출신에 황제 폐하의 총애도 받고 있어 경국 조정에 신예로 떠오른, 꽤 전도유망한 사람이었다. 범한이 그에게 두 손을 모아 가슴까지 올리고 예절 바르게 인사를 했다.

“소진 대인께 인사 올립니다.”

현재 진항의 품계는 범한보다 위였지만 양측은 서로가 지닌 권세와 지위의 크기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었으므로 이런 형식적인 인사로 장난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진항이 따스하게 웃었다.

“오늘 원장 대인을 뵈러 왔는데 제사 대인까지 만나게 될 줄이야. 이 진 아무개 운이 참으로 좋군요.”

자신을 맞아 주는 진항의 미소가 가식적이지 않아 범한은 마음 편히 대답했다.

“나중에 서로 가식적으로 대하느니, 오늘 이렇게 만났으니 이참에 같이 제대로 몇 잔 하시지요.”

그러자 진항이 크게 웃었다.

“제사 대인은 과연 묘한 사람이군요. 남들은 생각도 못 한 행동을 다 하고 말입니다. 한데 즐겁게 술을 마시려면 재미 삼아 몇 마디 하는 것도 못 하겠네요그려.”

범한이 상석에 앉아 있는 진평평을 슬쩍 보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아랫사람인 우리 입장에서 술자리 분위기는 주인장께서 좋은 술을 내어 주시느냐 마느냐에 달렸겠지요.”

그러자 진평평이 범한을 꾸짖었다.

“네 녀석이 이 늙은이보다 부자이지 않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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