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이날 하루만도 수십 명의 간관(간언을 하는 관원, 어사를 이름)들이 나섰다. 지난번 범한을 탄핵했던 것보다 훨씬 큰 공격진이 펼쳐졌다. 황궁 문 앞에서 수십 명의 간관이 무릎을 바닥에 댄 채 몸을 꼿꼿이 세우고 버텼다.
이날은 비가 내리지 않았다. 황궁 앞 진한 잿빛의 광장에 수십 개의 적갈색 관복이 가을바람에 펄럭였고, 이는 지나가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황궁 문 앞을 지나던 조정의 늙은 대신들은 더 이상 봐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젓고는 도망치듯 측문으로 들어가 그들 일에 상관하지 않았다.
경국 법률에 따르면 탄핵을 당한 관원은 반드시 자기 변론서를 올려야 했다. 그리고 지난번 탄핵 때처럼 범씨 부자는 직접 입궁해 황제 폐하께 죄를 청하고, 그런 후 조회에서 명확히 해명해야 했다. 한데 조회에 참석한 2 황자 파는 여전히 위세가 굉장했다. 그러니 범씨 부자가 황제 폐하 앞에서 변론하는 일은 험난할 수밖에 없었다.
도찰원의 어사들은 자신감에 가득 차 범건과 범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국의 최대 ‘탐관’들을 제대로 무너뜨려 버리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지난번과 달랐다. 2 황자의 도움으로 제대로 된 증거도 확보했으니 이번에는 사남 백작가와 국공인 유씨 가문, 포월루라고 하는 더러운 기루까지 몽땅 한꺼번에 엮어 버릴 절호의 기회였다.
그들은 땅바닥에 무릎을 대고 살짝 들뜬 기분으로 범한을 기다렸다.
‘사남 백작가에서 범사철을 도망시키고, 포월루에서도 손을 떼고, 법을 어기고도 황제 폐하의 총애를 받고 있을지라도 이번에는 증거가 명확하니, 너희 범씨 가문 놈들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
그들은 이런 생각을 하며 시건방진 감찰원 제사가 자신들 강직한 어사들 앞에서 잘못을 시인하고, 죄를 청하고, 고개를 숙일 때만을 기다렸다.
도찰원 어사들뿐만 아니라 사실 많은 이들이 이번 일에서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남 백작가와 감찰원이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이때, 거세게 밀려든 탄핵에 어찌 대응할지 궁금했다. 관리에게는 모름지기 체면을 지키는 게 중요한 법. 그러므로 감찰원이 이렇게 물려 죽으면 너무나도 창피한 일일 터. 그리고 모두 알다시피 범한은 명성이 대단히 높은 사람이 아니던가. 이에 심지어는 서무 대학사까지 포함한 모든 관원은 흥미진진해하며 악취미, 복수심 내지는 비웃는 마음으로 범한이 낭패를 당하는 꼴을 보기만을 기대했다.
* * *
그런데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황제 폐하께서 불렀는데도 범한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그만 안 온 게 아니라 범건 상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부자가 서로 짜기라도 한 듯 염치없게 똑같은 수를 썼다. 바로 병환이란 핑계를 대고 말이다.
이 소식을 들은 2 황자는 처음에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얼어 버렸다. 이익과 관련된 일이라면 굶주린 이리처럼 달려들어 정신없이 물어뜯는 게 사남 백작가인데, 체면과 관련된 문제가 생기니 뜻밖에도 이렇게 냉정하게 나오다니. 자신에게 체면을 되찾을 기회도 안 주고 바로 손절이라니. 그것도 두 사람 다 말이다.
나이를 생각해 줄곧 쪽문 밖 회의실에서 차나 마시며 숨어 있던 서무 대학사는 소식을 듣자마자 입에 물고 있던 차를 뿜어 버렸다. 그는 태학에서 범함과 장기 두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녀석은 대답은 꼬박꼬박 잘했었다. 그래 놓고 결국에는 안면몰수하고 경도에 평지풍파를 일으킨 것이었다.
그때 범한은 대학사의 장기짝을 잡아먹을 수 없다며 공손하게 굴었다. 한데 서무 대학사는 구정물로 가득 찬 범한의 가식적인 모습이 역겨워서 화가 머리끝까지 났었다. 그래서 오늘 조회 석상에서 범한이 굴복하는 모습을 보게 되길 내심 기대했다. 한데 이놈이 와병을 핑계로 안 왔다니. 대학사는 범한의 연극에 화가 나고 기분이 몹시 찜찜했다.
범씨 부자가 병이 났다는 소식은 대전까지 전해졌다. 이제 막 각 지역에서 올라온 상소문을 읽고 있던 황제도 황당하기는 피차일반이었다. 하지만 이맛살만 찌푸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황궁 내 마마님들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범가네 녀석이 사고뭉치이네, 황제 폐하의 심기를 덜어 드리는 방법을 모르네, 어쩌다 의신이가 그런 상공을 만났을꼬, 시를 잘 지어 속에 지혜가 가득한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불평투성이에다 무뢰한이네, 하며 범한에 대한 실망감을 드러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실망한 이들은 황궁 밖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도찰원 어사들이었다. 대결 상대가 병환을 핑계로 나타나지 않았으니 아무리 살기등등한 진을 치고 있더라도 그들로서는 구심점을 잃고 헛심을 쓴 것이었다. 이에 허망하고 괴로워하며 의기소침해져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자리를 떠났다. 몸에 무기력하게 착 붙어 버린 적갈색 관복도 가을바람이 집적거리는데도 귀찮아서 상대도 하지 않았다.
사람은 모두 곡식을 먹고 자랐으니 금강석처럼 단단하지 않아 언젠가는 부서지기 마련이고 언제고 병이 나게 되어 있다. 하지만 범씨 부자처럼 이리 공교로운 시기에 동시에 갑자기 병이 드는 건, 그것도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겠다고 말할 정도가 되는 건······ 어찌 되었든 이상한 일이었다. 특히나 범한은 감찰원 비개가 직접 가르친 제자가 아니던가. 그러니 정식 의원은 아니어도 황궁 어의들도 범한의 실력은 다들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몸져누웠단 말인지······.
조정 백관들만 믿지 않는 게 아니라 백성들도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 사실 황궁의 마마님들도, 용상에 앉아 계신 황제 폐하까지도 모두 믿지 않았다. 이에 조회가 끝난 후 어의가 황궁 호위병의 엄호를 받으며, 그리고 거의 출궁하지 않는 홍 태감까지 길잡이로 삼아 위풍당당한 기세로 사남 백작가로 향했다. 황제 폐하의 위로도 전할 겸 범씨 부자가 대체 어떤 병을 얻은 건지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2 황자의 눈이 되어 줄 사람 여럿도 이들 대열에 끼어 있었다. 모두 범씨 부자가 꾀병을 부리고 있으며, 두 사람이 조정에 나오지 않는 추태를 부림으로써 황제 폐하께 죄를 지었다고 생각했다. 겨우 군주 기만죄에 불과했지만 정말로 어리석고 오만방자한 짓임은 틀림없었다.
2 황자도 이번 일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황자의 몸으로 어려서부터 황궁에서 자라 홍 태감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꾀병이라면 그 비실비실한 늙은 내관을 절대 속이 수 없을 터.
* * *
범한은 정말로 병이 나 있었다.
이 정보는 홍 태감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후속 처벌을 내리지 않으셨다는 소문까지 경도 곳곳으로 퍼져 나가자 그 누구도 범한이 꾀병을 부렸다고 의심하지 않았다. 범건 대인은 우연히 감기에 걸린 것이었고, 작은 범 대인은 정말로 쇠약해진 몸으로 병상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감찰원에서 2 황자와 싸우고 있는 이 중요한 시점에 정말 공교롭게도 범한은 병이 나버린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사람들을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게 했다. 범한의 병환 때문에 경도 국면에 어떤 변화가 이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역사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북위 황제가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전씨 가문을 제거하려던 계획이 아슬아슬하게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당시 명장인 전청풍 총독이 갑자기 사흘 동안 설사를 한 덕분이었다. 황당해 보이지만 상당히 진실한 역사적 사실이었다.
* * *
“걱정하지 말아요.”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침대 앞에 불안한 기색으로 있는 목철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모든 건 언빙운 공자의 말을 따르면 됩니다.”
경도부에서 돌아온 후 범한은 몸져누웠다. 심한 건 아니었지만 사필안과의 일전 후 체내의 정기를 통제할 수 없어서였다. 정기가 그의 몸 곳곳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바람에 범한은 평소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 명상을 하고 마음을 안정시켜야 했다. 하지만 그 탓에 얼굴이 창백해지고 맥박이 괴이해져서 오히려 심오한 실력자인 홍 태감을 성공적으로 속일 수 있었다.
* * *
가을밤, 달이 기울고 아직 먼동이 터오기 전 오로지 시커먼 하늘만 남아 있을 때였다. 사남 백작가 뒤채에서 극심하게 쿨럭이는 기침 소리가 한동안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종들은 비몽사몽으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이내 후원에서는 우왕좌왕하며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범건 상서뿐만 아니라 종들 몇몇도 감기에 걸린 걸 보면 날씨가 문제였던 것 같다. 감기에 걸려 콧물을 흘리기 시작한 종들은 경도 밖에 있는 장원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백작가에 남은 종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기 위해 날마다 큰 도련님이 써준 약방에 따라 약을 달여 먹었다. 그 약방문은 참으로 효험이 좋아 이후로는 감기에 전염된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기침 때문에 사남 백작가 사람들이 혼란스럽게 움직인 건 모두 그 소리가 큰 도련님 방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큰 도련님은 이틀 동안 괴질 때문에 심하게 기침했다. 그런데도 황궁 어의들이 약 처방을 해준대도 한사코 거절하며 자신의 비법만 고수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기침 소리가 잦아들 기미가 없자 종들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랫것인 자신들에게도 잘해 주는 큰 도련님께 뜻밖의 변고가 일어나는 건 아닐까, 덜컥 겁을 먹기도 했다.
여종 사사가 이마에 붉은색 천을 두르더니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정리했다. 그러고는 조금 화가 난 사람처럼 주방에 서서 방 안에서 새어 나오는 진한 약 냄새를 맡으며 막일하는 여종들에게 조금 더 빨리 움직이라고 소리치며 닦달을 해댔다.
그녀는 담주에 계신 노마님이 경도로 보낸 사람이었으니 향후 신분은 이미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이에 사남 백작가 본가에서 그녀의 말이라면 종들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권위가 있었다. 잠이 덜 깬 어린 여종들은 큰 도련님의 병환이 차도가 없는 걸 알고 있던 터라 사사가 자신들에게 화를 내도 아랫입술을 꽉 깨물기만 할 뿐 감히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한참을 지켜보고 있던 사사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작은 걸상을 들고 왔다. 그러고는 약탕기를 올려놓은 화로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조심스레 부채질을 시작했다. 그녀는 눈 하나 깜빡 않고 화로만 지켜보았다. 화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때문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었는데도 조금도 한눈을 팔지 않았다. 약을 달일 때 가장 중요한 건 불 조절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끓고 있는 약은 큰 도련님께서 복용하실 것이었다. 그러니 그녀는 조금도 한눈을 팔 수 없었다.
침소에는 임완아가 있었다. 수 놓인 면으로 된 기다란 실내용 옷을 입은 임완아는 가슴 졸이며 범한의 가슴을 쓸어내리다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어의가 처방한 약을 좀 써보는 게 어떨까요?”
범한은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기침을 하던 중이었다. 그런 그가 손을 내젓더니 억지로 웃었다.
“그건 교만입니다. 다시 말해 내 몸 상태는 내가 알고 있어요. 안 죽습니다. 내가 지은 약을 먹으면 된다니까요.”
임완아도 상공의 의술 실력이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자신이 15년 동안 앓던 폐병을 치료해 주었을 정도니 말이다. 단지 요 며칠 그의 기침 소리가 너무 심해 걱정이 되어 그리 말한 것뿐이었다. 임완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홍 태감도 이 병이 뭔지 모르는데······ 상공은 안다고 말하니, 그러면······.”
임완아가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어 갔다.
“비 선생에게 서한이라도 써서 물어볼까요?”
범한이 다시 두 번 기침을 했다. 그런 후 처가 심히 걱정 중이란 걸 알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 스승님이 어떤 사람인지 당신은 잘 모르잖아요. 1년 중 절반은 세상 온갖 데를 쏘다니는 분입니다. 그러니 서둘러 와달라고 해도 대체 언제 나타날지 모를 일이에요.”
그러고는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어쩌면 서너 달은 걸릴 거예요. 그때 되면 나는 죽고 없을걸요. 그러면 당신은······.”
범한이 임완아의 곧게 뻗은 코끝을 톡 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경도에서 제일 아름다운 과부가 되겠지요.”
임완아는 땅바닥을 향해 침을 뱉는 모양새를 취하고는 화를 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헛소리가 나와요?”
범한이 잠시 웃었다. 그는 집안사람들처럼 자신의 현 상황을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사사가 달이고 있는 약은 그저 마음을 안정시키고, 머리를 맑게 해주고, 숨 쉬기 편하게 해주고, 경락을 살짝 안정시켜 주는 역할만 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병의 근원을 다스리는 일은 여전히 범한 자신의 몫이었다.
범한은 임완아를 안심시키기 위해 몇 마디 더 한 후 조심스럽게 오른손을 이불 속으로 집어넣었다.
가끔씩 떨리는 오른손이 또 갑자기 떨리기 시작했다. 경도부 밖에서 일전을 치른 후 지금까지 증상이 호전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