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경도부에서 잠시 휴정을 했다. 범한이 봤을 때 겉으로 드러나야 하는 건 대충 다 나온 상태였고 지금부터 범사철은 도망자 신세였다. 그러니 이제 자신이 할 일은 대권을 장악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동생의 죄를 벗겨 줄 방법을 찾아내는 것뿐이었다. 그러면 사남 백작가는 그 죄목에서 가볍게 몸을 빼고 자유를 되찾게 될 것이었다.
지금 포월루의 명의상 주인은 사천립이었다. 그런데 그는 사건 발생 후 포월루를 인수했으므로 경도부에서는 막무가내로 그를 불러다가 죄를 물을 수 없었다.
범한은 어느새 웃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구경꾼과 함께 이번 안건을 대해 몇 마디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러는 사이 피해자들의 가족이 아속들의 인도를 받아 관아 뒤쪽으로 가자 범한의 시선도 그들에게 향했다. 범한은 입꼬리를 쓱 올리더니 이야기를 나누던 이와 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떴다. 그리고 거리 한쪽 구석, 빗방울이 떨어지는 처마 밑에 있는 서생처럼 보이는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죽은 기생들의 가족은 슬프고 괴로운 표정으로 거리 한편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들이 구경꾼들의 시선에서 벗어나려 할 때쯤, 누군가가 갑자기 품에서 흉기를 빼 들고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복면을 하고 나타난 네다섯의 사내들은 단도를 휘둘러 대기 시작했다. 그들은 인정사정없이 칼춤을 추며 피해자들 가족을 베어 나갔다.
거리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러자 구경꾼들도 놀라 소리를 지르며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범한은 홰나무 아래에 서서 실눈을 뜨고 이 모든 장면을 지켜보았다. 걱정 같은 건 하지 않았다. 2 황자의 실력은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같은 수를 쓰다니 졸렬하기 짝이 없었다. 지난번에 재상에게 성공적으로 죄를 뒤집어씌울 수 있었던 건 우연히 황제 폐하의 뜻과 일치해서였다. 그렇다 할지라도 황제 폐하께서는 살육은 원치 않으셨다. 그런데도 오늘도 거리에서 급습해 살인하는 똑같은 수단을 쓰다니, 황제 폐하께서 비웃으실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나 보다.
한데 범한은 피해자들 가족의 목숨은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그의 짐작대로 길목에서,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또 한 무리의 행인들이 불쑥 나타나 자객들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그들은 신속하게 피해자 가족들에게 다가가 자신들의 몸으로 그들을 보호하며 자객에게 맞섰다.
그런데 또 행인이라니. 이들은 범한이 매우 좋아하는 그 행인들이었다.
행인들은 칼이 아닌 감찰원에서 특별히 준비한 꼬챙이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두세 번 막아 내는 것으로 자객들이 휘두르는 칼 공격을 무력화했다. 자객들에게 바짝 붙어 꼬챙이로 압박해 나가는 동작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고, 간결하면서도 힘이 넘쳤다. 그래서 어떨 때는 오죽 대인의 몸놀림을 보는 것만 같았다.
범한이 눈썹을 씰룩였다. 6처의 진짜 책임자인 그림자가 오죽의 추종자란 게 너무나도 확연해서였다.
2 황자가 보낸 자객들도 실력은 좋았다. 그런데도 굳이 비교하자면 6처에서 온 이들의 실력이 조금 더 뛰어났다. 그래서 잠시 싸웠을 뿐인데도 금세 궤멸 직전까지 갈 수 있었다. 자객들은 무의식적으로 도주하려 했지만 느닷없이 나타난 행인들이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계속 공격하는 통에 도무지 도망갈 수 없었다.
날카로운 소리가 몇 차례 울렸다.
그러다 느닷없이 시작된 공격과 반격이 순간 멈추었다. 복면을 쓰고 있던 자객들은 몸에 끔찍한 자상을 입어 피를 흘리며 처참한 몰골로 길바닥에 고꾸라져 있었다.
범한이 몰래 그쪽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언 공자의 계획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그리고 자객 중 생존자가 있든 없든 범한으로서는 알 바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빤히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저들이 도주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자객들 몸에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만한 감찰원의 비밀스러운 표식이 남아 있어서였다.
이번 자객들과의 일전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범한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황자들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우는 무인들이 자객으로 나선 거였지만, 그래도 6처 전문가들이 직접 나섰으니 처참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거리 한 귀퉁이에 있는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던 서생이 갑자기 날아와 이 상황에 개입했다. 그가 검을 한차례 휘두르자 빛이 번쩍하더니 포악하게 정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거리를 적시고 있던 빗물이 일순간 공중으로 튀어 오르고, 이내 화살이 되어 그 자리에 있던 어느 피해자 가족의 몸으로 직행했다.
문약해 보이는 서생의 손에서 강하고 사나운 검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자 행인으로 위장하고 있던 6처 검수들은 순간 그것을 막아 내지 못했다. 강한 기운이 칼날이 된 빗물과 함께 날아오자 검수들은 몸만 살짝 틀어 꼬챙이를 날렸다. 고수가 다시 검을 휘두르는 속도만이라도 늦추기 위해서였다.
척척, 하는 소리가 수도 없이 울리며 꼬챙이가 서생의 도포를 뚫고 나갔다. 한데 도포만 너덜너덜하게 찢겼을 뿐 검의 위력은 저지하지 못했다. 오히려 소리와 함께 평범하게 생긴 장검이 어느 피해자 가족의 몸을 꿰뚫었다.
* * *
사필안. 2 황자가 데리고 있는 여덟 가문의 장수 중 가장 오만한 자였다. 일찍이 일격으로 범한을 찍어 누를 수 있다고 말했던, 소위 ‘출검필안(出劒必安. 검을 꺼내면 이긴다)’이라 불리는 사필안이었다.
범한은 처마 밑 서생이 사필안이란 걸 첫눈에 알아봤다. 하지만 그 정도의 신분과 실력을 갖춘 자가 체면 불고하고 죽은 기생들의 가족에게까지 손을 쓰는 건 생각하지도 못한 전개였다. 사필안이 나선 이상 대세는 결정된 거였고, 그가 피해자들의 가족을 죽여 버린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범한은 사필안이 명령을 받아 현장을 살펴보러 온 줄로만 알았다. 저 오만한 성미를 지닌 자가 직접 나서리라고는 생각도 못 한 터라 범한도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사필안은 사실 검을 꺼내는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6처에서 검수들이 직접 나왔으니 범한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던 계획은 이미 수포로 돌아갔다고 말이다. 그리고 자신이 나서기는 했지만 항상 암흑을 달고 다니는 6처 검수들을 벌건 대낮에 경도 거리에서 몰살시킬 자신은 없다고 말이다.
그런데도 그는 검을 빼 들고 휘둘렀다. 자신의 마음이 현 상황을 용납하지 않아서였다. 수하들은 행인들에게 찔려 고꾸라져 나가고, 죽이려던 이들은 공포에 질려 있기는 해도 멀쩡히 살아 있고. 완전히 실패한 상황이 눈앞에서 펼쳐지자 분노가 일었다. 그러자 결국에는 이성을 잃고 미친 듯이 검을 빼 들었다.
피해자들 가족 중 하나만이라도 죽여야 했다. 그래야 범한과 싸우는 중인 2 황자마마의 체면을 조금이라도 지켜 줄 수 있었다. 그리고······ 죽은 기생들의 가족 중 하나만 죽어도 범한이 해명하기 위해 진땀을 빼야 할 테니.
검자루를 가볍게 쥐고 있던 사필안의 오른손에서 익숙한 떨림이 전해져 왔다. 검 끝이 어느 낯선 자의 몸에 꽂혀 무고한 영혼을 앗아 간 것이었다. 그는 살짝 만족스러운 듯한, 심지어는 거만해 보이기까지 하는 웃음을 날렸다. 그리고 검을 거두어들이며 죽은 자의 가슴팍에서 뿜어져 나오는 핏방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웃고 있던 그의 얼굴이 이내 경직되어 버렸다.
사필안은 검을 뽑은 이상 절대 실수하지 않는다고 자신하는 자였다. 검은 피해자들 가족 중 한 사람의 몸에 제대로 꽂혔다. 그런데 무언가가 이상했다. 검 끝이 파고든 지점이 자신이 의도했던 것보다 한 치가량 옆으로 쏠려 있었다. 겨우 새끼손가락 하나 정도의 오차로 그가 쥐고 있던 검이 상대방을 죽이지 못한 것이었다.
이에 두 번째 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그마저도 기회를 잃고 말았다. 앞에 있던 살해 대상이 초췌한 모습으로 옆으로 쓰러지는가 싶더니 무슨 연(鳶)이라도 된 듯 빠른 속도로 날아가 버렸다.
대체 어떤 힘인지 모르겠지만 물리 법칙에 반해 허공으로 사람을 끌어당긴 것만 같았다.
* * *
사필안은 무의식적으로 손목을 거두어들여 장검으로 가슴팍을 보호했다. 그리고 순간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날아드는 범한의 발길질을 막아 냈다.
“범한!”
뛰어난 고수인 그가 단박에 상대의 기운을 감지해 낸 것이었다. 이에 사필안은 순간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며 온몸의 힘을 검에 모았다. 그리고 범한이 저지할 수 없도록 검을 똑바로 겨누고 달려들었다.
그 순간, 행인으로 위장한 6처 소속 검수들도 범한 제사가 나타났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혼비백산한 피해자 가족들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갔다.
범한은 조금 전 발길질로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는 했어도 공격이 순식간에 들어오자 비수까지 꺼내 들 겨를은 없었다. 이에 자신에게 날아드는 살벌한 빛을 난폭하게 뿜어내는 기운을 고스란히 느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의 속눈썹이 잘려 나간 것만 같았다.
범한이 손을 들었다. 용수철이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연달아 세 번 울리더니 맹독인 견혈봉후(見血封喉. 유파스 나무) 나무의 독액이 발린 쇠뇌의 화살이 칼바람을 가르고 사필안의 얼굴로 향했다.
사필안의 검 끝과 범한의 암기용 쇠뇌의 화살은 모두 상대방의 얼굴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물론 두 사람에게는 얼굴 가죽 두께를 가지고 겨루는 취미 따위는 없었다. 이에 범한은 소리 없이, 심지어는 냉담해 보이는 표정으로 몸을 비틀었다. 자신의 강한 신체 통제 능력을 이용해 싸늘하게 파고드는 검이 자신의 뺨을 스치고 지나가도록 했다. 그런 후 사필안의 명치를 향해 매섭게 주먹을 날렸다.
패도의 정기를 가득 담은 주먹이 번개처럼 공중을 갈랐다. 제대로 맞았다면 분명 사필안의 오장육부는 파열되었을 것이다.
한편 사필안은 필사적으로 왼쪽 소맷자락을 펄럭였다. 그러자 도포 자락이 구름처럼 피어올라 가느다란 두 개의 쇠뇌의 화살을 막았다. 그 순간 사필안은 검을 휘둘러 범한의 목숨까지 빼앗아 버리려 했다. 그런데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도 범한은 가공할 만한 주먹을 사필안에게 날리고 있었다.
사필안이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 동시에 팔을 가로로 휘두르며 활짝 편 왼손바닥으로 범한의 주먹을 받아쳤다.
뻐걱! 하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사필안의 손목뼈가 부러져 버린 것이다.
“범한!”
분노에 찬 사필안이 미친 듯이 소리쳤다. 범한이 내뿜은 정기에 겁을 먹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두 사람의 주먹과 손이 서로 교차할 때 아주 연한 황색의 연기가 손 사이에서 피어올라서였다. 범한이 우세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생각지도 못한 독 연기를 피우는 수법까지 동원한 것이었다.
독 연기는 순간 사필안의 체내로 들어가 그의 검과 주먹을 무력화했다. 이상한 패도의 정기가 담긴 주먹을 성급하게 맞받아치려던 사필안은 결국 허점이 노출되어 쇠뇌의 화살 세 발 중 한 발을 어깨를 맞고 말았다.
그리고 독에 중독되기까지 했다.
* * *
“범한!”
사필안이 세 번째로 범한의 이름을 외쳤다. 분노에 미쳐 날뛰며 저주하는 듯했다. 그동안 상대의 실력을 얕잡아 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사필안은 체내 정기를 강제로 운기해 검을 들어 범한의 목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직진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민가 지붕 위로 착지하려 했다. 음험하기 짝이 없는 강한 고수에게서 일단 도망친 것이었다.
하지만 범한이 어디 그냥 도망가게 놔둘 사람이던가.
회색의 그림자가 휘릭, 지나가는가 싶더니 어느새 공중에 있는 사필안에게 바짝 다가간 범한이 오른손을 뻗어 상대방의 복사뼈 부위를 바로 내리찍어 버렸다. 이번 손날 공격은 대벽관을 그의 잔재주로 전환해 사용한 것이었다. 그리고 적이 가장 방심하고 있는 곳을 공격해 극심한 손상을 준 것이었다.
사필안이 신음했다. 복사뼈 부위가 으스러진 것 같았고, 참을 수 없는 통증이 하반신 전체로 퍼져 도망가는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사필안의 속도가 느려지자 범한은 말없이 그를 향해 손을 뻗어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수없이 많은 공격을 퍼부었다. 두 사람이 다시 빗물이 자작한 길 위로 내려왔을 때는 모호한 그림자만이 보일 뿐이었다. 하나는 회색, 다른 하나는 검은색으로 한데 뒤엉켜 있었다.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사필안이 범한으로부터 수없이 많은 발길질과 주먹질을 당하는 소리였다. 사필안은 범한의 공격이 너무 빨라 자신의 정기를 제대로 발산하지 못했다. 이에 수십 년 동안 쌓아 온 기본기만으로 버텼다. 검 끝이 바람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털끝도 건드리지 못하자 절망감이 찾아왔다.
몸놀림이 어떻게 이렇게 빠를 수 있지?!
사필안이 날카롭게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 재빨리 팔목을 털어 무수히 많은 빗방울처럼 검을 움직여 자신의 온몸을 방어했다. 그러자 결국 범한도 뒤로 몇 발짝 물러섰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사필안이 검으로 땅을 짚었다. 떨리는 손으로 물이 고인 곳에 칼끝을 꽂아 넣었기 때문인지 수면 위로 이상한 물결이 계속해서 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