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철저히 감시하고 그 누구도 만나게 하지 말거라. 절대 저들에게 진술을 번복할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된다!”
2 황자부에서 여덟 장군 중 여덟째인 범무구가 경도부에서 범인 압송을 위해 온 아속(관아 하인)들을 향해 한껏 음침한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이번 압송 과정에서 문제라도 생겼다가는 네놈들 목숨부터 바쳐야 할 것이다!”
경도부 아속들이 긴장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압송 임무 때문이 아니라 2 황자의 수하인 여덟째 장군 때문에 긴장한 것이었다. 어산도는 경도부로부터 겨우 3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러니 의심을 받을 일이 없다면 범무구는 이들이 경도부 대감옥에 도착할 때까지 동행할 것이었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을비가 음산하게 내리는 가운데 범무구는 멀리 사라져 가는 마차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차는 빗속을 뚫고 가고 있었고 거리에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행인이 거의 없었다. 어쩌다 등장한 행인도 우산을 받쳐 들고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길을 가던 행인들이 갑자기 우산을 접더니 우산대에서 검정색 날카로운 쇠꼬챙이를 꺼내 들고 냉정하게 마차를 향해 돌진했다.
깜짝 놀란 범무구는 마차를 향해 내달렸다. 마차와 살수들 사이의 거리 그리고 그들의 행동 속도를 계산해 봤을 때 무슨 수를 써도 자신이 저들을 구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행인들이 들고 있던 예리한 쇠꼬챙이가 두부 찌르듯 순식간에 마차를 뚫고 들어가 안에 있는 세 사람을 단번에 죽여 버렸다.
쇠꼬챙이를 빼 들고 찌를 때까지 행인들의 표정이나 동작에서는 군더더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일을 마친 후에는 곧바로 우산을 받쳐 들고 대로변 옆으로 난 골목으로 들어가 비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 * *
마차에 선혈이 흘러내리는 가운데 범무구는 서둘러 다가가 마차 가림막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얼어붙어 있던 그의 얼굴이 순간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상처의 흔적만 봐도 전문가의 짓이었다. 가볍게 찌르고 간 것 같은데 살릴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말이다.
범무구는 저도 모르게 숨을 한차례 들이켜고는 2 황자부터 걱정하기 시작했다. 마차에 타고 있는 세 사람을 이렇게 깔끔하게 죽이는 것만 해도 난이도가 대단히 높은 일인데 증인들의 호송 시기와 지점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니. 이는 곧 감찰원에서 2 황자 주변에 수많은 첩자를 심어 두었다는 뜻이다.
이번 암살은 정말 완벽한 계획하에 이루어졌다. 그렇기에 자연스러우면서도 간단하게 마무리되었다. 만약 이 장면을 일반인이 봤다면 순간 뭐가 지나갔나 보다, 하고 무시하고 넘어갈 정도로 전혀 긴장감이 없었다.
하지만 고수인 범무구에게는 달랐다. 담담하게 이루어진 살인이었지만 그에게는 아찔함 그 자체였다.
그는 살수들의 정체를 알았다. 그러니 범인이 누구인지를 놓고 골몰할 필요도 없었다. 감찰원 6처 소속의 어둠 속에 숨어 지내는 자객들. 그들이 아니라면 이 정도의 인내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들은 없었다. 범무구의 얼굴이 갈수록 하얗게 질렸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가 생각났다.
‘조금 전 행인들이 죽이려던 게 나였다면 나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2 황자 쪽 사람들은 그동안 범한의 힘을 얕보고 있었던 걸까? 그도 그럴 것이 경국에서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파벌이었으니 이들은 감찰원이 어떤 식으로 무서운 기관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긴장한 범무구가 소매 속에 숨겨 둔 비수를 찾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2 황자 곁을 떠나 자기부터 살고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 *
“장기를 못 둡니다. 실력이 형편없어서 대체 장기짝을 어디에 놔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범한이 난처한 기색으로 말했다.
범인 세 사람이 살해당하는 순간, 범한은 태학에서 서무 대학사와 장기를 두고 있었다. 서무 대학사는 오늘따라 조회도 일찍 끝나고 남쪽 이재민 구제와 관련된 업무도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터라 때마침 여유가 생겨 범한과 장기나 두게 된 것이었다.
한데 이 나이 지긋한 선생께서는 겨우 두 판 만에 범한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고는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혜, 총명함, 민첩함이 남다른 범한이란 인재가 장기에서만큼은 그냥 풋내기라니. 이러면 이긴다고 해도 흥이 날 리 없을 터.
서무가 탄식했다.
“아이고, 이 사람아. 무얼 하든 딱 부러지게 잘하던데 어찌 장기만큼은 이리도 형편없는가?”
이어 두 사람은 요즘 조정에서의 일을 두고 몇 마디 나누었다. 범건 상서는 집에서는 정사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 편이었다. 범한도 자신이 조회에서 다투었던 일을 감찰원에게 조사하도록 할 수 없었던 터라 그에게는 서무 대학사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듣다 보니 그의 품계로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조정의 몇몇 대사에서 이상한 낌새를 발견해 내기도 했다. 대도독으로 임명되어 북방으로 간 연소을이 은전을 보내 달라며 계속해서 손을 내미는 중이었고, 남쪽에서도 소형 전투들이 계속해서 벌어지는 중이라 하니 경국은 현재 정말로 은전 부족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범한은 순간 마음이 놓였다. 황제 폐하께서 은전을 필요로 하시는 이상, 내년에 황실 금고는 확실히 자기 수중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장 공주는 교활하게 음모를 꾸미는 데 일가견이 있으니 사업을 벌여 돈을 버는 것과 관련해 범한은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되었다.
비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범한은 이 나이 많은 대신과 겸상할 자격이 되지 않아 공손히 배웅만 하고 곧장 몸을 돌려 책방으로 돌아갔다. 그런 후 장묵한 대가가 자신에게 증여해 준 장서들을 살펴보았다. 교수들이 돌아간 후에도 범한은 홀로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책 한 권을 들고 무언가에 골몰한 채.
오늘 경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는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 세 증인이야 원래 죽을 사람들이었으니 그냥 그러려니 했다. 문제는 죽은 기생의 가족들이었다. 그들은 경도부에 사남 백작가 가문을 범인으로 지목한 고발장을 제출한 상태였다.
그렇다고 해서 범한 입장에서는 또 살인으로 누군가의 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일단 포월루의 세 졸개는 2 황자가 지금껏 꼭꼭 숨겨 온 터였다. 그러니 그들을 죽여 제거한다 해도 2 황자는 그 사실을 황제께 고할 수 없었으므로 범한에게 문제가 될 건 없었다. 그러므로 본디 착한 사람도 아닌 범한이 피해자 가족들을 죽이지 않는 건 그만큼 잔악한 심성의 소유자는 아니라는 방증일 터.
사실 범한은 현재의 국면을 잘 알고 있었다. 신분을 따지지 않고 봤을 때 감찰원 제사로서 자신이 지닌 자원과 권력은 2 황자보다 훨씬 강력했다. 그러니 이번 투쟁에서는 만약 다른 일이 터지지만 않는다면 당연히 범한이 이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이 점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다만 유일하게 신경 쓰이는 건 황궁에 계신 황제 폐하의 태도뿐이었다. 만약 이 개자식들끼리 장난질 치는 걸 별것 아니라고 여기신다면 범한은 이 장난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
범한은 사실 황제의 마음을 정확히 예측했다. 그가 봤을 때 2 황자는…… 단순히 숫돌이었다. 무딘 태자를 예리하게 갈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장래 감찰원 원장이 될 작은 범 대인의 자질을 시험해 보는 수단이었다. 그런데 장래 원장인 범한의 수단과 지혜를 놓고 따져 봤을 때 2 황자는 꽤 잘 고른 대상이었다.
물론 황제 폐하는 범한이 너무 심하게 나온다 싶으면 황명만으로도 바로 멈추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범한은 이번 사건 때문에 황제 폐하가 자신에게 독하게 나올 거란 걱정은 하지 않았다. 대신 모두 개자식 같은 놈들이니 이런 녀석을 낳은 황제 입장에서 누군가를 더 감싸고 예뻐하기는 힘들 거라고 자조적으로 생각했다.
경도에 내리던 비가 그치자 범한은 아무도 모르게 태학에서 빠져나갔다. 그런 후 어느 옷가게에서 입고 있던 옷을 벗고 속에 입고 있던 ‘작업복’을 드러냈다. 그러자 비굴한 표정의 옷가게 주인이 평범해 보이는 옷을 범한에게 건넸다. 범한은 그 옷을 입은 후 비 모자를 눌러써서 얼굴을 가리고는 곧장 경도 거리로 사라져 버렸다.
* * *
더 이상 비는 내리지 않았다. 하늘에 묵직하게 떠 있던 먹구름도 햇빛에 녹아내리는 중인지 점점 얇고 평평한 모양으로 변하더니 이내 작은 덩어리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둥근 호를 그리며 날아가는 기러기 떼처럼 하늘을 위를 둥실둥실 떠다니기 시작했다.
어느덧 탁 트인 파란 하늘이 나타났다. 가을 하늘은 먹구름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쟁취한 후라 그런지 유난히 맑고 선명했다.
햇살이 경도부 관아 밖을 비추기 시작했다. 일부는 관아 안까지 파고들어 재판장 위에 걸린 편액 위의 ‘광명정대’라는 글자를 비추었다.
경도부 밖에는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있었다. 모두 최근 들어 가장 화제였던 포월루 사건을 부윤 대인이 재판하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번에 재판대에 오른 안건은 뒷배가 있는, 무수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기생이 등장하는, 유명한 장소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이었다. 경도 백성들의 기호를 만족시키는 소재이다 보니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있었다. 식후 또는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눌 때 그 사건에 대해 모르면 대화에 끼지도 못할 정도였다. 마차를 모는 마부도 이 사건에 대해 상세히 알지 못하면 손님을 태우지 못할 정도였다.
범한은 행인으로 위장해 군중 속으로 파고들어 관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경도부 같은 중요한 관아에서 최근 한두 해 동안 일어난 인사이동은 모두 자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이에 어쩌면 이번 일을 끝으로 이번 경도 부윤도 죄를 선고받아 관직에서 물러나게 될 거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예전 경도 부윤으로 있던 매집례는 백작가 유씨 부인 부친의 사람이라 항상 사남 백작가 편을 들어 주었다. 곽보곤 관련 검은 주먹 사건 때도 그는 많은 부분에서 범한을 도와주었다. 하지만 이후 외양간 거리에서 범한이 자객에게 공격을 받은 사건 때문에 매집례는 경도 부윤으로서 1년 감봉 처분과 함께 유임이라는 벌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다음 해 춘시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여러 차례 곤란을 겪다가 결국에는 경도 부윤 자리에서 내려와 외지로 쫓겨나야 했다.
나이가 많았던 매집례는 경도를 떠난 후에도 가끔씩 사남 백작가와 서신으로 왕래를 했다. 이에 범한은 그가 과거에 경도 부윤이었으며 온갖 악행이 이루어지는 경도부라는 관아에서 기꺼이 떠났음을 알게 되었다.
재판장 안에서는 가난해 보이는 사람 여럿이 재판대 앞 바닥에 꿇어앉아 목이 메도록 울고 있었다. 이들은 포월루에서 죽은 기생들의 가족으로 울고불고하며 범씨 가문을 비난하고, 말끝마다 “공명정대하신 어르신, 부디 이 억울함을 풀어주소서!”라고 읍소했다.
현임 경도 부윤 전정목은 짐짓 정의의 사자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또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고 입술이 살며시 떨리고 있어, 피해자 가족들의 울부짖음에 마음이 동요된 듯 보였다.
그런 그가 아속들에게 속히 포월루로 가 혐의자를 잡아 오고 현장 조사를 하도록 했다. 그러고는 진지하게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드러내며 사남 백작가로 가 못된 짓이란 못된 짓은 골라 하는 둘째 도령을 데려오라고 엄숙히 명했다. 그런데도 그는 원몽 등의 이름은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
범한은 군중 속에서 이 모든 상황을 싸늘하게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러다 전정목 부윤의 눈에서 살짝 허둥대는 기색이 있음을 알아챘다. 기생 살인 사건의 범인들이 벌써 살해당한 걸 아는 눈치였다.
재판장에 있던 피해자들 가족이 욕하고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지만 범한은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포월루에서 죽은 그 기생들 때문에 자신과 아우가 욕을 더 먹는다 한들 달라질 게 없어서였다. 단지 이들 가족이 진심에서 우러나 이러는 것인지, 아니면 2 황자 쪽의 사주를 받아 이러는 것인지에 대해서만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말해, 감찰원의 조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아 아직은 자신이 나설 차례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경도부 재판은 무미건조하게 진행되었다. 단순히 구경만 하는 백성들 입장에서는 흥미진진했겠지만 이런 연극은 이미 수천 년 동안 반복되어 온 것이라 범한은 일찌감치 관심을 끄고 다른 데에 신경을 썼다. 범한이 이곳까지 온 이유는 곧 어떤 일이 일어날 거란 추측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