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288화 (288/1,108)

288화

“대학사께서 어찌 태학까지 오셨는지요?”

범한이 조금 의외라는 듯 의자에 앉아 있는 서무 대학사를 바라보며 존경심을 담아 인사를 올렸다.

범한의 장인이 재상 자리에서 내려오고 예부 상서도 사형을 당했으니 현재 조정 문관 체계는 그야말로 난맥상이었다. 일부는 몰래 범한을 지켜보는 중이었고 일부는 동궁을 따르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문관들로부터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건 그동안 쥐 죽은 듯 지내고 있던 2 황자였다. 다년간 문재(文才)를 떨쳐 명성을 얻으며 일을 꾸며 온 때문이었다.

지금 범한 앞에 있는 서무 대학사는 장묵한의 제자로 명성이 드높은 인물이다. 그러니 경력과 자질만으로도 그는 조정에서 이인자가 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북위에서의 경력은 그가 경국에서 관료로 커나가는 데 여러 차례 발목을 잡았다. 그러던 중 경력 5년에 일어난 커다란 소란으로 서무 대학사는 음으로 양으로 가장 덕을 많이 본 사람이 되었다. 비록 태학정이란 자리는 빼앗겼지만 동문각 대학사가 춘시에 연루되어 파직되는 바람에 서무 대학사가 그 자리에 임명되었다.

동문각 대학사 서무는 청렴하고 고귀한 인물이었다. 그런 데다가 재상이 파면된 후 재상 자리가 공석인 상태에서 중서에 들어가 국정을 논의하게 되었으니 조정의 실질적인 핵심이 되어 재상직에 맞먹는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범한이 아무리 위세가 좋다 해도 그 앞에서는 보잘것없는 일개 관원에 불과했다.

물론 서무 대학사는 범한을 평범한 관원으로 취급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만약 그런 생각을 가졌다면 오늘 이렇게 범한을 찾아오지도 않았을 터.

“범한 제사도 차분히 태학으로 돌아왔는데 나라고 돌아오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서무가 자기 아들뻘인 젊은 범한에게 농담하듯 말을 이어 갔다.

“밖에 비바람이 차게 부는데 자네같이 젊은 사람이 자기 복을 즐길 줄도 알고. 태학까지 숨어들어온 건…… 왜인가? 감찰원에서 일하고 있으면 비에 맞을 거 같아 싫어서인가?”

밖에 비바람이 차게 분다고? 서무 대학사께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범한은 이해가 안 되어 웃기만 할 뿐 어찌 대답해야 할지 잠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사천립이 포월루를 거두자 언빙운도 행동에 나섰다. 우선 감찰원을 통해 형부를 압박했다. 이에 형부에서는 경도부를 무시하고 곧장 도망간 죄수를 수배 및 체포하는 문서를 발행했다. 몇 가지 죄명을 가지고 물고 늘어지면서 원 대가로 불리는 원몽을 쫓기 시작했다.

원몽 낭자는 숨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정왕 세자 이홍성의 비호 아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도 범한은 서두르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수배문은 뿌려 놓았고 뒤에 꾸며 놓은 일도 있고 하니 원몽이 늦게 잡힐수록 그에게는 오히려 유리했다. 언빙운이 세운 규칙에 따라 일들을 하나씩 완수해 최종적으로 자신이 세웠던 목적만 달성하면 그만이었다.

이틀 전부터 경도에서 어떤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얼마 전 형부 13관아에서 잡은 청루 주인 원몽이 사실은…… 정왕 세자 이홍성의 정부(情婦)라는 내용이었다.

소문이란 놈은 원래 쉽게 퍼지기 마련. 더욱이 원몽과 이홍성은 원래부터 밀접한 관계였으니 이 뜨끈뜨끈한 소식은 그야말로 삽시간에 온 경도로 퍼져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이홍성의 명성은 한창 더운 날 썩은 내를 풍기는 돼지비계처럼 날이 갈수록 악취로 점철되었다.

이홍성과 2 황자의 교분이 좋다는 건 세인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이에 다른 소문도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지금 경도에서 가장 유명한 포월루의 실제 막후 주인은 2 황자이며 형부 관아에서 조사 중인 기녀 실종 사건이 황족들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이다.

이들 소문은 제법 상세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으며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원몽은 과거 유정강 유역에서 가장 잘나가던 기생이라 세자를 제외한 다른 손님을 받지 않았다. 어느 해 몇 월 며칠, 2 황자마마께서 포월루 밖에서 감찰원 제사와 길게 대화를 나누셨다. 그때 무슨 내용의 이야기를 나눈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남 백작가에서 바로 다음 날 포월루의 지분을 신비한 사씨 성의 상인에게 팔아 버렸다.’

물론 이 소문은 감찰원 8처의 작품이었다. 춘시 사건으로 주목받은 범한을 더 띄워 천하 선비들의 마음속 우상으로 자리 잡도록 만드는 중이었다. 대(大)경국의 문서를 총괄하는 곳에서 띄워 주기 작업을 진행해 나갈 때마다 오물이 수도 없이 뿌려졌다. 하지만 결과물은 오히려 더 아름다워졌다.

물론 소문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경도 백성들은 포월루의 큰 사장이 사남 백작가의 둘째 도련님인 걸 알게 되었다. 이에 사남 백작가의 명성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데 뜻밖에도 사남 백작가의 명성에 영향을 준 소문의 시작점이자 퍼뜨린 쪽은 사남 백작가였다. 즉 범한 제사가 몽둥이찜질로 동생을 교육했으며 상서 어르신께서 집안 예법을 엄히 적용해 가정 내 기풍을 대대적으로 바로잡았다. 그래서 둘째 도련님은 다리가 분질러져 집 안에서는 처참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으며 백작가는 금전적 손해를 보는 것도 불사하고 청루에서 손을 뗐다는 등등의 내용이었다.

이는 한바탕 술렁여야 했던 경도 백성들을 그냥 어리둥절하게 만들어 버렸고, 사람들에게 사남 백작가는 포월루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도록 했다. 더군다나 소문은 시간이 갈수록 잦아들었다.

여론을 통제하는 일을 범한은 너무 잘했다. 전에 오죽 아저씨와 함께 몇천 장에 달하는 종이 전단지를 뿌려 장 공주를 황궁에서 내쫓은 전력도 있고 말이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아직 미숙한 2 황자 하나만 대적하면 되었으니 그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결국 경도 백성들은 실제로는 지분이 하나도 없는 2 황자와 세자 이홍성을 포월루의 막후 주인으로 여기게 되었다. 반면 범한 제사는 깨끗한 사람으로, 사남 백작가는 말 못 할 고충이 있어 그리했을 거라 생각했다.

언빙운의 다음 목표는 2 황자와 최씨 가문 간의 은전 거래였다. 이와 관련한 구체적인 방법은 범한도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언빙운의 능력을 신뢰했기 때문에 그가 하는 일에 끼어들거나 관여하지 않았다.

* * *

서무 대학사가 범한을 잠시 바라보고는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어제 경도부에서 포월루 안건을 접수한 사실을 자네도 알 것이네. 자네 동생의 죄가 가볍지가 않아! 악행을 저질러 놓고도 입막음하느라 사람을 죽였고 양민 처자에게 몸을 팔도록 강요했으니 오늘 심문을 시작할 걸세.”

그러자 범한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불효막심한 놈이 나온 건, 가문의 불행입니다.”

서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도부에서는 아직 사람을 색출하러 가지 않았던데 아무래도 다른 생각이 있는 것 같으이. 범한 대인, 이번 소송의 쟁점은 사람이 죽은 거네. 형사 안건이니 이론의 여지가 없어. 만약 경도부에서 정말로 심문하러 나선다면 황제 폐하께서도 놀라신 일이니 결과가 좋지 않을 걸세.”

이 정도 대화만으로도 범한은 문관 우두머리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조정 문관들을 대표해 사남 백작 가문이 2 황자와 화해하고 서로 체면 깎는 일은 이제 그만하라고 말한 것이었다. 앞서 조정의 체면 문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들 노(老)대신들은 이번 일은 호랑이 간 싸움이니 필시 한쪽은 다치리라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범한과 2 황자는 모두 경국의 젊은 실력자들이니 이번에 세를 잃는 게 누구든 결국 손실을 입는 건 경국 조정이라고 보았다.

물론 절대 다수는 범한이 아무리 감찰원 제사씩이나 된다 할지라도 황자들과 힘겨루기를 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는 범한도 잘 알고 있는 바였다. 그러므로 대학사의 화해 권유는 사실 자신을 생각해서 해준 말이었기에 범한은 감동해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인,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인께서는 2 황자마마도 이미 만나 보셨겠군요.”

서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범한은 북제에서 돌아온 후 계속 2 황자 파와 반목하는 중이었고 감찰원에서는 그의 신하들을 제법 많이 잡아들인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서무 대학사가 화해를 권유한 건 분명 2 황자의 의견을 먼저 들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2 황자가 서무 대학사를 통해 공손히 각자 한 발씩 뒤로 물러서자며 의견을 전한 건 정말이지 범한으로서는 의외였다.

* * *

서무 대학사의 말에 범한은 속으로 싸늘하게 웃었다. 2 황자는 어릴 때 ‘돌머리’로 불렸다더니 정말 상종할 인간은 아닌 듯했다. 둘은 이미 절교한 사이에다 자신은 동생마저 이국 타향으로 보내 놓은 상태다. 게다가 장인어른은 장 공주와 2 황자의 음모 때문에 재상직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그렇다면 2 황자는 적어도 무슨 해명부터 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범한은 생각했다.

더군다나 감찰원 1처 첩자가 보내온 내용에 따르면 2 황자 쪽은 범사철을 물어뜯을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2 황자 쪽에서 포월루의 비밀을 아는 흉악범 셋을 경도부 재판장에 세우기 위해 벌써 경도로 데려온 것이었다.

그러니 2 황자가 서무를 통해 말을 전한 건 단순히 범한을 잠시 진정시키기 위한 처방일 뿐이었다. 범한은 그 정도에 속아 넘어갈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이에 범한은 공손하게 서무 대학사에게 차를 올리며 말했다.

“이번 일은 감찰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니 저와도 아무 상관 없는 일이지요. 요즘 태학에만 있었던 것도 모두 사람들에게 오해를 살까 걱정되어서였습니다.”

서무 대학사가 더 이상 참아 줄 수 없었는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주름 가득한 얼굴로 안타까워했다.

“무엇 하러 그분과 싸우는 건가? 이번에는 그냥 이겼다고 치면 그만 아닌가? 자네가 아무리 천 번 만 번을 이긴다 한들 황제 폐하께서 기뻐하시는 것만 하겠는가.”

범한은 순간 가슴이 살짝 설렜다. 그의 말이 사실임을 알기에 이 나이 많은 학사에게 조금 더 감격해서였다. 이에 범한은 다른 생각이 있었지만 온화하게 응대했다.

“대학사 대인께서 하신 말씀이니 이 후배가 어찌 토를 달겠습니까. 경도부에서 우리 가문의 체면을 챙겨 줄 생각이라면 형부에서도 그 안건을 너무 깊이 추궁하지는 않겠군요.”

서무라는 노대신이 보기에 범한의 이번 말은 조금 성급한 면이 있었다. 관료 사회에서는 체면을 중시하는 법인데 어찌하여 일국 조정의 책임자 앞에서 대놓고 불법적인 걸 말하는 것일까. 하지만 서무 대학사도 범한의 인성이 원래 그렇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에 환하게 미소만 지어 보이고 아무런 말 없이 창밖으로 내리는 빗물만 바라보았다.

* * *

경도부 관아로부터 3리 떨어진 어산도(御山道)라는 길에 가을비가 거칠게 쏟아지고 있었다.

포월루 기녀 실종 사건은 벌써 조사에 들어갔다. 아직 시체를 찾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경도부는 이번 사건에 연루된 범인 셋을 이미 확보한 상태였다. 기녀를 죽인 세 명의 당사자가 체포되어 심판에 부쳐졌으니 이제 남은 건 자백을 받아 내는 것뿐. 그러면 사남 백작가 둘째 도령의 막후 주모자를 물어뜯을 수 있을 터였다. 이는 사남 백작가에게 심한 타격을 주는 것은 물론, 2 황자를 둘러싸고 있던 오물을 깨끗이 떨어내는 것이었다.

그러니 포월루의 세 범인은 정말로 중요한 증인이었다. 한데 2 황자 파는 지금까지도 사남 백작가에서 집안 규율을 집행한 후 왜 이 세 사람을 직접 경도부로 데려왔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백작가 쪽에서 대놓고 자신들의 약점을 드러낸 행동인데 말이다.

그러다 사남 백작가에서 포월루를 팔고, 원몽을 추격하기 시작하고, 검 끝을 이홍성에게 겨누자 2 황자는 모든 게 명확해졌다고 생각했다. 이제 보니 범한은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살인자인 졸개 셋을 보냈고 정말로 화해하는 쪽을 선택했다고 말이다. 이에 2 황자는 계획을 며칠 늦추기로 했다. 그리고 이 범인들을 자신이 쥐고 있는 한, 백작가 뚱보는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으리라 여겼다.

그랬던 2 황자가 지금은 정말로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범한 이놈! 정말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어 대는구나! 감히 나를 공격해? 경도에서 도는 소문이 몽땅 네놈이 퍼뜨린 줄 내 모를 줄 아느냐!’

한편 세자 이홍성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사남 백작가로 달려가 범한에게 따질 수도 없는 처지였다. 정왕이 먼저 알고 화를 내며 그에게 매질까지 하고는 정왕부 안에 가두어 버려서였다. 그런데 이는 지금 경도에 부는 비바람을 피하게 해주는 방도이기도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