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석청아가 억지로 상문을 향해 살짝 인사를 올렸다. 상문은 포월루에 있는 동안 자신의 이전 명성 때문에 뻣뻣하고 도도하게 굴었고, 석청아는 그런 그녀를 제법 괴롭혔던 터다. 그런데 그녀가 이렇게 포월루의 총관리인이 되어 나타나자 석청아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닥친 건지 알아 버렸다. 이에 답답한 마음을 억누르며 방으로 가 짐이나 싸려 했다.
한데 불안하기는 상문도 마찬가지였다. 하해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 준 범한 대인이 포월루를 자신에게 맡긴 이상 어떻게든 잘 해내고 싶었지만 3 황자의 세력만 생각하면 은근히 두려웠다. 그런데 석청아가 물러날 의사를 보이다니. 그녀는 순간 마음이 놓였다.
사천립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청아 낭자, 자네는 떠나면 안 되네.”
석청아가 싸늘하게 웃었다.
“내가 포월루와 계약 문서를 쓴 것도 아닌데 왜 떠나면 안 된다는 거죠?”
사천립이 골치 아프다는 듯 목 쪽에 있는 단추 하나를 끌렀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힘겹게 입을 뗐다.
“나는 기방 장사를 해본 적이 없어. 상문 낭자도 노래나 부르는 소리꾼이었으니 청아 낭자 자네가 떠난다면 포월루는 돈을 벌 수 없고……. 아무튼 내가 정말로 아는 게 하나도 없어서 그러네.”
이제야 저들에게 자신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 석청아는 저도 모르게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만약…….”
아직 ‘만약’이란 단어밖에 내뱉지 않았는데 사천립은 바로 그녀의 말을 끊고 자기가 하려던 말을 계속했다.
“범한 대인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분이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 자네는 이 포월루에서 단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 하셨어.”
석청아는 화도 나고 씁쓸했다. 자신이 필요해서라기보다는 말려 죽일 심산이란 걸 알게 되어서였다. 아무리 3 황자와 관계가 있다 해도 아녀자의 몸이니 그녀로서는 감히 감찰원 제사 대인의 명령에 말대꾸를 할 수 없었다.
또한 이 세상에서 고작 기생 하나 때문에 관리가 감찰원과 충돌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는 듣도 보도 못한 터였다. 그리고 아무리 황자라 할지라도 득보다 손해가 더 큰 일에는 나서지 않을 게 뻔했다. 게다가 범한 제사 정도면 자신을 파멸시키는 건 개미 한 마리 밟아 죽이는 것보다 쉬운 일 터.
“저는 왜 남겨 두시려는 거죠?”
석청아가 살짝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물었다.
사천립이 대답을 해주었다.
“범한 대인께서는…… 아니, 나는 포월루에 조금 변화를 줘볼까 생각 중인데 그중 청아 낭자가 해줄 것이 있어서야. 어쩌면 경국의 모든 청루들이…… 똑같이 따라 할 수도 있는 일이지.”
석청아는 깜짝 놀랐다. 포월루는 장사가 정말로 잘되어 큰 사장은 이미 이곳에서 본전을 뽑고 다른 주에 분점까지 낸 상태였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경국 전체 청루에서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는 몫은 아직까지는 그다지 큰 편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변화란 것이…… 옛날부터 청루 장사는 이런 식으로 해왔는데 큰 사장님이 바뀌는 게 아니라면, 설마 범한 제사가 여기에다가 시선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생각이란 건가? 그리고 천하 기생들에게 더 이상 몸을 팔지 못하도록 하려는 건가?
그런데 문제는…… 몸 파는 기생이 몸을 팔지 않고, 포주가 호객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그러고도 청루라 할 수 있을까?
사천립은 그녀에게 어떤 의문이 일었는지 알지 못했다. 이에 스승의 분부에 따라 하나둘 자신이 해야 할 이야기를 풀어 놓을 뿐이었다.
“첫째, 기루 아가씨들에게 오늘부터 계약 내용을 변경할 수 있도록 한다. 즉 5년마다 한 차례 기한이 되면 직접 다시 계약하도록 한다. 둘째, 포월루에는 의원이 항시 대기하며 아가씨들은 몸이 아프지 않을 때만 손님 접대에 나선다. 셋째…….”
말이 아직 다 끝나지 않았는데 석청아는 궁금한 게 생겨 물었다.
“계약 내용을 변경하게 하라고요? 왜 그래야 하는 것입니까?”
사천립이 설명해 주었다.
“대인…… 쿨럭, 또 틀렸구먼. 내 생각에는 그래야 옳기 때문이라네. 5년이 되면 반드시 당사자에게 다시 생각할 기회를 줘야 해. 이렇게 생각해 보지, 평생 남에게 속으며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외모까지 평범해서 잘나가지 않는다고 말이네. 그렇다면 그 아가씨 입장에서는 기분이 안 좋을 거 아닌가. 그러면 자연스레 손님 접대에 소홀해지겠지.”
그러자 석청아가 비웃었다.
“5년이 계약 만기라니 우리 같은 불쌍한 여인네들이 몸을 팔지 않고 배길 거 같습니까? 그러면 누가 기적에서 빼주기라도 한답니까?”
경국에서 기예만을 파는 기녀와 몸을 파는 기생은 처지가 달랐다. 몸을 파는 기생은 일단 기적에 오른 이상은 평생 그곳에서 이름을 뺄 수 없다. 누군가가 몸값을 내주고 기적에서 빼주거나 조정의 유명한 분께 총애를 받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앞서 사천립이 말한 방법에 따라 5년마다 계약을 갱신해도 포월루 기생은 5년 후에도 여전히 기적에 올라 있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이 일로 먹고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문제와 관련해 사천립은 아무런 답도 해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스승인 범한이 나중에 알아서 해결해 주겠노라 해서였다.
석청아가 비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의원을 여기에 둔다니 그건 더 웃기군요. 포월루의 여인들은 신분이 미천합니다. 그러니 그녀들을 위해 이곳까지 왕진 올 의원은 없습니다. 평소에도 의원에게 진료 한 번 받으려면 첩첩산중인데 세상에 어떤 의원이 포월루에 상주하면서까지……. 그들도 사내인데 체면 깎이는 짓을 하려 할까요?”
그러자 줄곧 침묵으로 일관하던 상문이 미소 지었다.
“제사 대인께서 이리 말씀하셨어. 감찰원 3처에 사질(師侄)이 많으니 그들에게 이곳 의원이 되어 달라 청하면 문제없을 거라고 말이네.”
그러자 석청아는 소리까지 내서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감찰원 3처라면 모두 벌벌 떨게 만드는 독약이나 다루는 관아 아냐? 설마 그들이 의원으로 갈아타려는 건가?’
석청아는 범한 제사가 헛생각만 하는 이상한 부류라 생각하며 비웃었다.
“의원이 있은들 무엇 합니까? 아가씨들 몸이 깨끗한데. 그러니 손님들도 성병 따위에 걸릴 걱정은 없답니다!”
사천립은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그 일은…… 나도 별다른 생각을 안 해봤군.”
이게 어찌 사천립이 생각을 안 해봐서 생긴 문제겠는가. 산업화된 양산형 매춘 사업을 하려는 범한의 구상이 시대적인 문제에, 즉 남성 피임 기구의 미보급이라는 일대 난제에 부딪힌 것이었다.
“일단 마저 들어 보게.”
사천립이 두어 번 헛기침하고는 말을 이어 갔다.
“오늘부터 강제로 매춘하도록 시키는 행위도 금지이다. 만약 다시 한번 그런 일이 있을 시에는…… 모두 자네에게 책임을 물을 거야.”
사립천은 석청아가 알아서 고개를 숙일 때까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어린아이를 기생으로 삼아도 안 되네.”
“중간에 중개료를 뗄 때도 규율을 지켜야 해. 이는 아가씨들의 등급에 따라 차등을 둘 거고.”
“아가씨들에게 한 달에 사흘은 휴가를 주고 자유로이 지내게 해주게.”
* * *
‘사 큰 사장님’께서 쉼 없이 말을 쏟아 내는 통에 석청아는 어느새 질려 버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심지어는 상문도 정신이 가물가물해지고 있었다. 결국 인내심에 한계가 온 석청아는 두 눈을 부릅뜨고 싸늘하게 말했다.
“그런 식으로 바꾸면…… 포월루가 청루입니까, 아니면 자선을 베푸는 곳입니까?”
사천립이 그녀를 쓱 쳐다보고는 말했다.
“대인께 들었다. 자네는 원 대가가 직접 키워 낸 사람이라지. 그러니 원칙대로라면 자네부터 내보내야 했어. 하지만 자네의 미천한 신분을 봐서 속죄할 기회를 주는 거니 포월루가 청루든 자선을 베푸는 곳이든 자네가 상관할 바 아니야. 그저 상문 낭자 밑에서 분수에 맞게 장사나 하면 그만. 만일 이 일이 제대로 실시되고 또 이것이 점차 천하에 보급된다면, 천하 수십만에 이르는 청루 여인들은 자네에게 은혜를 입게 되는 거야. 그러면 이것으로 자네는 요 몇 달 동안 진 빚을 갚게 되는 거고, 그때는 대인께서도 자네를 살려 주시겠지.”
이즈음 되자 사천립도 드디어 범한의 이름자를 거론했다.
석청아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 중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얼굴만 보면 당황해 어쩔 줄몰라 하고 있었다.
사실 사천립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이제 포월루는 감찰원 1처 소속인 상문 낭자의 감시 아래 놓이게 된 것이지만 그래도 자기 앞날에 대해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범한 대인의 문하생이자 떳떳한 수재인 내가, 이제 다시는 벼슬길에 오를 수 없게 됐다. 이렇게 청루에 남아서 위아래 층을 오가며 아가씨들에게 손님 맞으라고 소리나 질러 대는 기방 주인으로 남게 됐단 말이다!’
사천립이 상문을 잠시 바라보았다. 소리꾼 출신의 이 연약한 여인은 아무런 걱정 없는 사람처럼 의외로 차분한 모습이었다.
* * *
며칠 뒤 다시 처량한 가을비가 내렸다. 맑고 상쾌했던 가을날은 어느덧 춥고 비 내리는 밤을 맞이하게 되었다.
포월루는 범한이 완전히 접수한 상태였다. 그래서 2 황자 쪽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고 이미 어떤 일들에 착수했는데도 범한은 그저 태연하기만 했다. 요 며칠 동안 범한은 1처에 가보지도 않았거니와 신풍관으로 접당 왕만두를 먹으러 가지도 않았다. 대신 태학에 가서 젊은 교수들과 함께 자신이 북제에서 가져온 서적 정리를 했다.
빗방울들이 먹구름 위에서 다시 게으름을 피우고 있을 때다. 어느 순간 가을바람이 불어와 빗방울들을 다시 떨어지게 만들었다. 성글게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며 참으로 얄밉게도 내렸다.
이곳 넓은 대지 위에는 태학과 동문각만 들어서 있었다. 경력 원년 신정 때 몇몇 관아가 들어섰지만 그것들은 일찌감치 사라지고 없었다.
범한은 검은 우산을 들고 태학을 오가는 학생들 사이를 지나가다가 가끔씩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향해 예를 갖춰 인사한 학생들에게 답례를 해준 것이었다. 범한의 신분과 지위는 예전과는 많이 달랐다. 황제가 그에게 5품 봉정이라는 직무를 계속 맡도록 했고 시간이 날 때마다 태학에 가서 학생들을 가르치라 명해서였다.
스승 노릇을 하는 게 싫어 수업을 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관직을 이용해 태학에 들러 책을 보며 비바람을 피하는 건 자발적으로 하는 중이었다.
범한이 태학에 나타난 첫째 날 학생들은 깜짝 놀랐다. 범한은 근 1년 동안 태학에 얼굴도 비치지 않았거니와 젊은 대인이 감찰원에서 맡고 있는 직책이 학생들에게 두려움과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니 학생들은 1년 전보다 범한에게 거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범한이 예전과 다름없이 대해 주자 학생들은 그를 다시 편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태학에서 범한에게 마련해 준 서재 밖. 범한은 우산을 접고 우중충한 하늘을 바라보다가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아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서재에서는 몇몇 태학 교수들이 장묵한이 증정해 준 책을 정리하고 있었다. 마차에 있던 서적은 경국에게는 미묘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어 황제는 이것들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이에 태학에서도 이 책들을 감히 소홀하게 다룰 수 없어 필사와 보존 작업을 차근차근 진행해 나가는 중이었다.
범한 대인이 들어오자 교수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인사를 건넸다.
범한도 웃으며 답례를 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은 뜻을 펼치지 못한 보잘것없는 인물들이었다. 범한은 혼자서 장묵한의 책들을 유지, 보수할 수 없기에 태학정에게서 이들을 강제로 빼앗다시피 데려와 요 며칠 재밌게 지내는 중이었다.
한쪽 구석에 놓인 검은 우산에서 빗물이 흘러 바닥을 적시는 가운데, 서재 내부에는 화로 두 개가 피워져 있었다. 실내에 금세 습기가 차 눅눅해지자 찝찝해진 범한은 옷깃을 느슨히 풀며 말했다.
“이렇게 습한 것도 좋지 않아요. 지금 날이 많이 추운 것도 아니니 여러 대인분들, 잠시 참고 일단 화롯불을 꺼놓는 건 어떻습니까?”
그러자 교수 하나가 말했다.
“서적을 보관할 때는 온도가 일정해야 합니다. 너무 추워도 안 좋지요.”
범한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아직 겨울은 아니지 않습니까. 책들은 실내에 있으니 온도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습한 건 문제가 되겠네요.”
그러자 모두 범한의 말에 따라 조치를 취한 후 바로 다시 머리를 박고 하던 일에 몰두했다. 이 모든 상황은 헛된 논쟁은 지양하고 실사구시를 따르는 태국 조정의 풍격을 태학이 일관되게 따르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점은 북제와는 확연히 다른 점이었다.
범한이 자기 의자로 돌아와 앉았을 때다. 이제 막 일을 시작하려는데 밖에서 누군가가 그를 만나기를 바란다며 데리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