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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285화 (285/1,108)

285화

“천하 통일?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범한이 비꼬는 말투로 묻자 언빙운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경국의 젊은 세대인 언빙운은 국가의 힘이 빠르게 성장하던 시기에 태어났기에 천하를 통일한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천하 통일은 너무나도 당연한 거라서 그는 단 한 번도 왜 해야 하는지 고민해 본 적도 없었고 이런 질문을 듣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래서 범한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뭐라 말해야 할지 적당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천하가 세 갈래로 갈라지고 소국들이 즐비한 상황에서는 전쟁을 피할 수 없으니 백성들도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천하 통일을 이뤄 전쟁에 따른 재난을 영원히 없애야 하지 않겠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언빙운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말하자 범한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오랫동안 갈라져 있으면 반드시 합쳐지고 오랫동안 합쳐져 있으면 반드시 갈라진다는 말을 믿지 않습니다. 이 말만큼 터무니없는 말이 없지요. 천하를 통일하는 데 수백 년이 걸리듯이 갈라지는 데도 수백 년이면 족할 겁니다. 만약 갈라진 나라 중 어느 나라도 천하를 통일하려는 야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전쟁이 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완전한 통일은…… 평화를 가져오는 방법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전쟁에 뛰어들게 하는 유혹에 불과합니다.”

언빙운이 가만히 바라보다가 비꼬았다.

“굉장히 유치한 생각을 품고 있군요.”

“저도 압니다.”

범한이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저는 살아 있는 동안 전쟁이 일어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 1년 동안 저희 감찰원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사람의 수가 대략 4백여 명 됩니다. 8월 제방이 무너졌을 때 사망한 사람의 수는 수만 명이지요. 만약 전쟁이 정말로 일어난다면 수개월 만에 십수만 명이 죽을 겁니다.”

“잠시 전쟁을 막을 수는 있겠지만 영원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언제든 전쟁은 반드시 일어날 겁니다.”

언빙운이 코웃음을 치며 이어서 말했다.

“설사 대인이 4대 종사를 모아 황실의 야심을 억누른다고 해도 대인이 사망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범한이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죽은 뒤요? 죽으면 아마 홍수가 넘쳐 하늘까지 닿겠지요.”

자만한 발언에 언빙운이 정색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어둠 속에 숨은 어진 사람인 줄 알았더니만 이 말을 들으니 제가 방금 지나친 말을 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대인은 모진 사람이면서도 아주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상대방을 놀리듯 말했다.

“오해는 무슨, 지난번에 저는 성인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오늘 보니…… 거의 성인이라 해도 괜찮을 것 같군요.”

“지금 본인이 감찰원을 장악한 성인이란 겁니까?”

언빙운이 귀신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대인은 인생을 어떻게 살지 계획해 두셨습니까?”

“저는 계획해 두었습니다.”

대답한 범한이 상대방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허허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 사철이가 북쪽으로 갔으니 대인과 대인 아버지께서 고생 좀 하시겠습니다.”

범한은 각 지역 관리들의 동향을 관찰하고 외국 첩보망을 구축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감찰원 4처에게 범사철을 경국에서 빼내 상경으로 보내는 일을 맡긴 것이다.

“제 상사이지 않으십니까.”

언빙운이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했다.

그의 생각을 이해한 범한이 말했다.

“이 일은 원장께 제가 보고하도록 하죠. 그런데 아십니까? 제가 지난번 사신단으로 경도를 떠난 첫날 밤에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송림포에서 야영을 했습니다.”

그가 코를 비비며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당시 사절단 안에도 가장 인기 있었던 사리리 낭자가 있었지요. 오늘 사철이는 쫓겨나는 신세니 당시 나보다 더 처량한 상황이긴 하지만 어쨌든 제가 가장 인기 있는 기생을 옆에 붙여 주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우리 형제 모두 떠나는 길이 외롭지는 않은 셈이지요.”

언빙운이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친밀한 부하나 친구 앞에서만 드러내는 범한의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스러움이 정말 적응되지 않았다.

“이제 걱정할 것도 사라졌으니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범한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상대방은 황자이니 우리가 함부로 죽일 수도 없지 않습니까.”

언빙운이 차갑게 말했다.

“제가 보기에 대인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데요.”

범한이 찔린 표정으로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정말 대인은 저를 잘 아시는 군요. 하지만 급할 건 없습니다. 먼저 홍성의 명성에 금이 가게 만든 뒤 둘째 측 부하들을 좀 괴롭히고 최씨 가문도 혼쭐을 내줘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는 이제 더는 포월루 일에 관여하지 않을 거니 대인이 사천립을 도와 처리해 주십시오. 이후 무슨 일이든 대인께 전권을 부여하겠습니다. 사실 음모를 꾸미는 일은 대인이 저보다 훨씬 낫지 않습니까.”

포월루는 계속 영업을 이어 갔다.

소식에 빠른 극소수 사람들은 경도에서 제일 유명한 기생집 때문에 범한과 2 황자 사이에 시끄러운 일이 있었고 이후 백작가에서 매질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후 격렬한 반응은 없었고 감찰원에서도 포월루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아 소문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관리들에게는 이건 아주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범한이 아무리 힘이 있어도 황자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사람들은 백작가 작은아들이 포월루를 경영하는 게 백작가 명성에 약간의 손상은 주겠지만 거기서 들어오는 은전이 상당할 것이므로 모두가 협력해서 이 일이 드러나는 걸 막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사실 이건 양측 모두 이익을 보는 결과이기도 했다.

반면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감찰원이 기생집을 수색하는 모습을 보거나 빗소리처럼 백작가에서 끊임없이 들리는 매질 소리를 들으며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폐하의 특수 기관이 기생집 일에 관여하기 시작했을까? 그리고 백작가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매일 경도 거리에서 난폭한 짓을 일삼던 불량배 무리가 갑자기 자취를 감춘 이유는 무엇일까?

다만 이 일을 아는 사람이거나 모르는 사람이거나 모두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경도 권력자들이 충돌하면 늘 그렇듯이 이 일도 결국에는 촘촘하게 얽혀 있는 관계망에 의해 모두가 좋은 게 좋은 거란 식으로 조용히 마무리될 거란 생각이었다.

하지만 포월루의 대행수와 점원, 접대부, 기생들은 외부 사람들처럼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감찰원이 수색한 뒤로 큰 사장이 포월루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실종된 것처럼 완전히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큰 사장이 감금되었다는 소문이 들리기는 했지만 모두 뜬소문이었기에 모두가 불안해했다. 게다가 작은 사장은 신분이 특수한지라 매일 포월루에 나와서 일을 감독할 수도 없었다. 이에 포월루는 겉으로는 평온한 듯 보였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불안의 그림자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불안하기는 2 황자 측도 마찬가지였다. 백작가는 왜 포월루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을 경도부에 보낸 것일까?

매집례가 이직한 뒤로 핵심 관아인 경도부는 줄곧 2 황자가 장악하고 있었고 상대방도 경도부가 2 황자 세력 범위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만약 백작가가 관계를 정리할 생각에 그리한 것이라면 범사철을 경도부로 보내 처벌을 받게 하면 됐다. 하지만 범사철은 감금되었다는 소문이 들렸고 감찰원이나 백작가나 조금의 이상한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이 일을 신경 쓰느라 머리가 아픈 2 황자는 백작가가 범사철을 이미 경도 밖으로 쫓아내 소리 소문 없이 다른 나라에 보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과연 감찰원의 일 처리는 물샐틈없이 완벽했다.

하지만 2 황자 측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가장 결정적인 시기에 상대방이 포월루와 자신이 조금의 관련도 없다는 걸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랄 거라 생각했다. 다만 범한의 복수를 막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의 주변 사람들부터 건든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모르는데 어떻게 방비할 수 있을까. 범한의 생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사람도, 언빙운의 집행력을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 * *

이날은 산들바람에 화려한 가을 단풍이 흩날려 경도 밖으로 나가 국화꽃을 감상하기 좋은 날이었다.

황궁에서 국화 감상을 하러 놀러 가기까지는 아직 6일이 남아 있어 경도 관리와 백성들은 가족들을 데리고 교외로 나가기 바쁜 데다가 낮이라 포월루는 조용했다. 더구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데다가 큰 사장까지 실종되면서 분위기도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항상 의욕이 넘치던 안내인들은 무기력하게 기둥에 기대어 있었고 기생들은 호수 옆에서 억지웃음을 지으며 대낮에 희롱하길 좋아하는 늙은 변태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이름도 모르는 곤충들은 돌계단을 있는 힘껏 뛰어오르며 기진맥진한 울음소리를 내는 게 자신의 종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포월루 점원들은 심란한 마음에 행주를 들고 대충 탁자를 닦았다. 범사철이 있을 때는 탁자는 반드시 하얀 비단으로만 닦게 하고 먼지 한 점도 없어야 통과시켜 줬으므로 지금처럼 대충 닦는 일은 있을 수도 없었다.

그때 사람이 한 명 들어왔다. 외모는 평범했지만 붓으로 그린 것처럼 눈썹이 엄청나게 짙어 기억하기 쉬운 얼굴이었다. 어느 날 밤 그를 접대한 적 있던 안내인은 단박에 그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포월루 대문 옆에 멍하니 서 있을 뿐 접대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모습을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보던 점원이 들고 있는 회색 행주를 떨어뜨리며 말했다.

“손님이 왔어…….”

말끝을 흐렸지만 목소리가 맑아 또렷하게 들렸다.

손님이 순간 놀란 표정을 짓더니 거북스러운 듯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포월루의 엄청나게 큰 대청을 잠시 둘러보다 고개를 저었다.

“석청아 낭자에게 내가 만나러 왔다는 말을 전해 주게.”

그 말에 점원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석 낭자를 직접 만나러 온 것도 모자라 본명을 그대로 부른단 말이야? 경도의 내로라하는 귀족들도 포월루에서는 석 낭자에게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데 저 손님은 누구길래 저렇게 당당한 거지?’

손님을 아는 안내인이 정신을 번쩍 차리고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공손히 말했다.

“대인, 제가 당장 전하겠습니다.”

그런 뒤 점원에게 손님을 포월루에서 3층 가장 좋은 방으로 모시고 극진히 대접하라고 지시했다.

올라가는 손님을 보면서 1층에 있는 점원과 안내인들이 둘러서서 수군거렸다. 포월루에 안 좋은 일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정체 모를 사람이 나타나자 모두가 불안했다.

마침내 누군가가 유달리 짙은 눈썹이 이전에 왔던 서생과 똑같다는 걸 기억해 냈다. 바로 그날 ‘진 공자’와 함께 왔던 사람이다. 진 공자가 누구인가? 포월루 큰 사장의 큰형! 조정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작은 범 대인이었다. 그러니 오늘 온 손님은 범 대인의 심복인 만큼 감찰원 고위 관리일지도 몰랐다.

모두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날 발생한 일 때문에 포월루는 범 대인에게 미움을 샀고 큰 사장은 사라져 버렸잖아. 그런데 오늘 측근이 왔으니 또 감찰원이 수색하는 거 아냐? 포월루는 계속 영업을 할 수 있나?’

누군가가 한숨을 쉬었다.

“내가 봤을 때는…… 포월루에서 거금을 바쳐야지만 이 일이 해결될 것 같아. 그러고 보니 큰 사장이 없는 게 안타깝네. 성격은 거칠어도 경영은 참 잘했는데……. 관리들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워 줘야 아무 일 없이 영업할 수 있을 거야.”

“무슨 개소리야!”

그러자 어느 사람이 그가 경묘 대제사인 것처럼 허풍을 떠는 게 꼴 보기 싫다는 눈빛으로 소리쳤다.

“바보야, 포월루 큰 사장이 작은 범 대인 친동생이잖아. 그런데 감찰원이 은전을 받고 물러설 것 같아? 게다가 이 형제 위에는 상서 대인이 계시는데 돈으로 해결될 문제겠어?”

반박당한 사람이 멍한 표정으로 더듬거렸다.

“그럼 저 사람은 뭘 하러 온 거지?”

* * *

포월루를 방문한 사람은 바로 사천립이었다. 스승의 강요에 어쩔 수 없이 용모단정한 선비 차림으로 포월루에 오긴 했지만 기생집에 온 것이 거북하고 불쾌했다.

석청아가 심상치 않은 눈빛을 짓더니 공손하게 차를 가지고 왔다. 그녀는 사천립이 관원은 아니지만 범 제사의 측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큰 사장님은 종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에서 상대측 사람이 갑자기 나타난 이유가 뭐지? 도대체 무슨 속셈인 거야?’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공손히 물었다.

“사 선생께서는 오늘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사천립이 잠시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석청아가 흠칫 놀랐다. 그녀는 작은 사장인 3 황자가 뽑은 사람이라 백작가와 관계가 깊지 않아 상대방이 주저하는 모습을 보고 오해한 것이다. 그녀가 살짝 미소 지으며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모두 한 가족이나 다름없는데 설마 사 선생께서 수……색……을 진행하러 오신 건 아니겠지요?”

말할 때 혀가 꼬이는 바람에 이상하게 들렸다.

석청아가 오해하자 사천립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는 품 안에서 문서를 꺼냈다.

“오늘은 수색하러 온 게 아니라…… 인수를 하러 온 거네.”

인수라니! 놀란 석청아가 탁자에 놓인 얇은 문서를 들고 재빨리 읽더니 안색이 잿빛으로 변했다.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맨 아래 선명하게 찍힌 지장을 바라봤다. 한동안 말없이 아랫입술을 깨물던 그녀가 겨우 놀란 가슴을 추스르고 질문했다.

“큰 사장께서 가지고 계시던 포월루 지분 전체를…… 선생께 드렸다고요?”

석청아의 목소리에는 놀람과 의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엄청난 가치를 지닌 포월루 지분 7할을 어떻게 순순히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수 있을까?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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