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모든 준비를 마친 뒤 범한이 침실에 들어와 보니 유씨가 침대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유씨를 깨운 뒤 옆방에서 조용히 뭐라 이야기하자 유씨가 퉁퉁 부은 눈으로 결연한 눈빛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범한이 그녀에게 무슨 허락을 받았고 어떤 말로 설득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밤이 깊어진 가을 정원에는 새와 벌레도 보이지 않았다. 약약이 유씨를 데리고 가자 범한이 잠들어 있는 아우 옆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이를 가는 얼굴과 뺨에 난 사마귀 자국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책상에 놓인 인주를 집어 범사철의 손가락에 묻힌 뒤 품속에서 사천립이 쓴 문서를 꺼내 펼치고는 손가락을 눌러 지장을 찍었다.
범한이 하얀 문서 위에 찍힌 붉은색 지장을 보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범사철이 가지고 있던 포월루 지분 7할은 정식적으로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이로써 범사철은 온갖 더러운 일이 자행되는 포월루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완아는 범한의 기분을 풀어 주려 재미있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자 쓸모없는 짓을 했다는 생각에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었다.
범한도 웃으며 말했다.
“이 일은 당신과 아무 관련이 없어요. 철부지는 자고로 밖에서 다양한 경험을 해봐야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심 낭자를 데려왔나요?”
“서정에 있어요.”
완아가 설명했다.
“언 공자는 이미 갔고요.”
“그래요.”
범한이 범사철 침대 옆에 앉아 무언가를 생각한 뒤 다시 일어나서는 작은 주방 사람을 불러 휴대하기 좋은 말린 음식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주방 옆에서 뜨거운 죽을 호호 불어서 천천히 마셨다. 언 공자와 심 낭자가 옛정을 다시 떠올리는 시간을 갖도록 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유씨가 자신의 아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주는 게 더 중요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등자월이 종을 데리고 오더니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하지만 범한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 없었기에 직접 침실로 들어가 범사철을 끌어안고는 후원 쪽문 밖 마차에 태웠다. 유씨가 따라와 입술을 깨물며 잠에 취해 있는 아들의 뺨을 어루만지고 약약도 안타까운 마음에 아우의 통통한 귓불을 쓰다듬었다. 완아의 눈도 촉촉한 것이 이대로 떠나는 게 안타까운 것 같았다.
유일하게 사남 백작 범건만이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자신의 어린 아들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낯선 외국으로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자네들 먼저 가게. 수고해 주시게. 성을 나갈 때는 특히 조심하고.”
범한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을 한 언빙운을 향해 말했다. 밤이 되면 일찍 문을 닫는 경도성을 아무 소리 없이 나갈 수 있는 건 감찰원 관리뿐이었다. 언빙운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같아 안 가십니까?”
범한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송림포에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가 눈동자를 돌려 마차 안에서 눈물을 머금고 있는 아우를 바라봤다. 분명 깨어 있는데도 유씨 앞에서 자는 척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입술을 계속 삐쭉거리는 게 자신과 부친을 원망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어둠 속에서 계년조뿐만 아니라 6처 검수들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정도 세력이라면 2 황자 측에서 섭씨 집안의 경도 수비를 동원하지 않는 이상 정면으로 대적할 방법은 없을 터였다.
범한이 마차 아래서 잠시 고개를 숙인 뒤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마차가 천천히 경도 밖을 향해 움직였고 백작가 뒤채 쪽문 옆에 서 있던 세 명의 여인들이 슬픈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특히 유씨는 누구보다도 애통해했다.
* * *
표식이 없는 마차 몇 대가 조용하고 어두운 경도 거리를 나아갔다. 언빙운이 무슨 방법을 쓴 것인지 마차는 순조롭게 성을 나가 성 밖 관도로 진입했다. 이대로 북서쪽으로 반 시진 정도 가면 달빛을 받는 작고 낮은 숲이 보이는데 바로 그곳이 송림포였다.
마차는 이곳에 멈춰서 범한을 기다렸다. 이때 마차 안에서 범사철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여전히 오만한 눈빛으로 말했다.
“도중에 멈춰 서는 건 뭐야? 내가 도망갈 걱정은 하지 않나 보죠?”
마차 안에는 그와 언빙운밖에 없었다. 언빙운이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차갑게 말했다.
“총명한 사람이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텐데. 범한이 이번 일을 위해서 이렇게 많은 수단을 동원한 것은 자네를 무사히 보호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네.”
범사철이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자기 명성을 보호하기 위해서겠죠.”
언빙운이 비웃으며 말했다.
“만약 범한이 자기 명성만 보호하려 했다면 자네를 직접 경도부로 보냈을 거네. 그렇지 않은가?”
범사철도 마음속으로는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아 볼멘소리로 말했다.
“그야 아버지가 허락해 주지 않으셨으니까 그러겠죠!”
“상서 대인이?”
언빙운의 차가운 눈빛에 놀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상서 대인의 생각을 자네나 나처럼 젊은 사람들이 어찌 마음대로 단정 지을 수 있겠나.”
범사철이 무기력한 목소리로 넌지시 말했다.
“언 형님, 형님은…… 나를 어디로 유배 보내는지 알아요?”
“북제.”
언빙운이 대답했다.
“뭐요?”
범사철이 절망하는 표정으로 긴 한숨을 쉬더니 얼굴이 창백해져서는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엉덩이와 등에 생긴 상처가 닿자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언빙운이 재밌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범한이 바른 약이…… 효과는 있지만 통증이 심해서 한동안 고생해야 할 거야.”
그도 북제 상경에 있었을 때 범한이 발라 준 약 때문에 고생했어야 했다.
“내가 뼈는 다치지 않게 적당히 때렸는데 왜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어.”
범한이 마차에 올라타며 차갑게 말했다. 그의 차가운 표정을 본 범사철은 아까 큰 가법에 따라 매질당했던 걸 떠올리며 진저리를 쳤다.
“뭘 하다 오신 겁니까?”
언빙운이 미간을 찌푸리며 이어 말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범한이 등에 업고 온 사람을 범사철 옆에 내려놓자 마차 안에 은은한 향기가 퍼졌다. 범사철이 놀란 표정으로 아름다운 외모의 여인을 바라보더니 대경실색하며 범한을 향해 소리쳤다.
“어쩌려고!”
범한이 납치해 온 사람은 포월루에서 가장 인기 있는 기생인 연아였다.
범한이 범사철을 힐끗 보고는 조롱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여자가 불쌍하냐? 성격은 난폭한 놈이 여자를 아끼는 아버지의 유전자는 또 물려받았나 보네. 그럼 기생집을 운영할 때는 왜 여자를 아낄 줄 몰랐던 거야?”
범사철과 언빙운은 유전자라는 단어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보다 범한이 연아를 납치해 온 이유가 더 궁금했다. 물론 오늘은 포월루가 흉흉해서 손님도 없었을 것이고 또 범한이 미약을 사용하는 솜씨가 훌륭하니 아무도 모르게 기생 하나 납치해 오는 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 낭자가 너의 첫 번째 여인이냐?”
범한이 아우의 두 눈을 바라보며 온화하게 물었다. 범사철이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여자를 놓아 달라고 애걸하는 눈빛을 지었다. 그러자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네가 나보다 낫다. 열네 살에 첫 경…….”
그가 말하다 말고 큰 소리로 웃더니 정색하며 말했다.
“네가 이 낭자를 대하는 태도가 남다른 걸 보고 마음이 있다는 걸 눈치챘지.”
범한이 입꼬리를 자꾸 올리며 말했다.
“포월루는 앞으로 조용하지 못할 테니 연아 낭자를 남겨 두고 떠난다면 너도 마음이 편할 수 없겠지. 그렇다고 내가 집 안에 둘 수도 없어. 아버지께서 허락하신다고 하더라도 새어머니께서 가만두지 않으실 테니까.”
범한이 담담하게 계속 말했다.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네가 성장하기 위해서 북으로 가는 거긴 하지만 너무 외로운 것도 마음을 수양하는 데 좋을 게 없을 것 같아. 그러니 이 낭자를 데려가도록 해.”
범사철과 언빙운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눈을 부릅떴다. 다른 나라로 유배 가는데 가장 인기 좋은 기생과 함께 가라고? 이게 도대체 유배야, 휴가야?
“형님……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범사철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큰일을 저질러 유배 가는 자신에게 이런 대우를 해주다니 너무 놀라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그는 범한의 평온한 표정이 두려워 고통도 잊을 정도였다.
언빙운도 범한을 바라보며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범사철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네 형님은 정말 대단한 사람일세.”
그러고는 형제가 이별할 수 있게 마차에서 내렸다.
잠시 아무 말 없이 사철을 바라보던 범한이 입을 열었다.
“아까 깨어 있었으면서 새어머니와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았니?”
그러고는 대답은 기다리지 않고 다시 물었다.
“내가 화를 낸 이유와 나와 아버지가 너를 북제로 보내려 하는 이유를 알고 있니?”
범사철이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나를 보내는 이유는…… 첫 번째는 내가 없으면 경도부에서 포월루 사건을 건드려도 신경 쓰지 않고 둘째 측과도 맞설 수 있을 테니까.”
“그렇지.”
범한은 아우가 자신에게 혼난 뒤 황자들을 둘째와 셋째와 같은 호칭으로 부르기 시작하자 훈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둘째는…… 나를 벌주기 위해서.”
범사철이 고개를 들고는 엉덩이에서 전해지는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
“하지만 나 정말 가기 싫어. 형님, 무서운 북제 사람들을 상대로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범한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뭘 하느냐니, 당연히 네가 가장 잘하는 장사를 해야지.”
범사철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더니 포월루 큰 사장의 풍모를 드러내며 물었다.
“장사하라고?”
“그래. 아버지께서도 나에게 계획해 보라고 하셨어. 그래서 내가 생각해 봤는데 너에게 본전으로 은전 천 냥을 줄게. 상경에 가면 사람을 시켜 보내 줄 거야. 하지만…… 그 외에 도움은 주지 않을 거야. 만약 네가 5개월 안에 은전 천 냥으로 만 냥 이상으로 만들면 네 능력을 인정할게.”
“열 배로 불리라고?”
범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범사철이 놀라 버럭 소리쳤다.
“나는 그렇게는 못 해!”
“이게 바로 네가 가진 문제야.”
범사철이 범한의 말은 무시한 채 벌게진 얼굴로 화를 냈다.
“은전 천 냥 가지고는 못 해! 너무 적다고!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어!!”
“무슨 개소리야. 우리가 담박서국을 열었을 때 얼마 든 줄 알아?”
“흥! 그럼 형님이 《석두기》 완성본을 팔게 해주면 내가 천 냥을 만 냥으로 불려 줄게.”
“꿈도 꾸지 마! 원고를 하도 재촉당해서 미쳐 버릴 지경인데…… 완성본이 어디 있겠어?”
서로 투덕거리며 입씨름을 벌인 터라 분위기는 한층 가벼워졌다. 범한이 범사철의 오동통한 얼굴을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께서 밖이 아무리 위험하다 해도 너를 돌보려 하지 말라고 하셨어. 그러니까 모든 일에 조심해야 한다.”
범사철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말했다.
“형님이 말했잖아, 나는 거상의 자질을 타고났다고.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경도를 떠나는 일 때문에 나를 원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범사철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우의 마음이 편치 않으리라는 걸 안 범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사실 방금 네가 유배 보내는 이유를 말했을 때 맞는다고 했던 건…… 거짓말이야.”
범사철이 고개를 들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경도에 있다고 해서 두려울 게 뭐가 있겠니? 내가 너 하나 보호하지 못할 사람은 아니잖아. 이 일이 조용해질 때까지 어디에 숨겨 둘 수도 있는 건데……. 그렇게 해도 2 황자가 어쩌지는 못할 거야. 설사 경도부에서 포월루 사건을 조사한다고 해도 백작가까지 연루시킬 수는 없을 테니까.”
범한이 침착한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내가 너를 벌하려 보내는 거라는 두 번째 이유도 일부만 맞아.”
범한이 고개를 돌려 정신을 잃은 채 잠들어 있는 포월루 기생 연아를 바라보고는 차분히 말했다.
“북제에 가면 고생은 하겠지만 네가 지금까지 한 일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큰일을 하게 될 거야. 하지만 담주에 간다면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더 난폭해지겠지.”
범사철이 두려움을 느꼈는지 목을 움츠러뜨리고는 엉덩이에서 전해 오는 고통에도 비명을 지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는 형이 자신을 북제로 보내려 하는 이유를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범한은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눈꺼풀을 내려뜨리며 말했다.
“나는 네가 이렇게 대담하고 무서운 수단을 부릴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네가 계속 경도에 남는다면 주변 사람들은 나와 아버지에게 환심을 사려고 너를 달콤한 말로 꼬드길 거고 그럼 너는 나쁜 길로 더 빠지게 될 거야. 그래서 나는 차라리 바깥에서 고생하는 게 네가 성장하는 데는 더 좋겠다고 생각해.”
그가 갑자기 범사철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장사를 하려면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하지만 적당한 선은 지킬 줄 알아야 해. 지나치게 잔혹한 방법을 사용하면 항상 반격을 당하는 법이니까. 그리고 사람을 사귈 때는 항상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최대한 밝은 쪽에 서려고 하는 게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