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유씨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범건을 바라보며 속으로 ‘왜 이런 결정을 한 거지?’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범건이 겉으로는 온화해 보이지만 사실은 단칼에 사람을 베어 버릴 수 있는 장군과 같은 풍모를 지니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가 한눈에 반해 시집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범건이 한번 결정을 내렸다는 것은 다시는 바꿀 수 없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머리가 민첩하고 꾀를 많이 가지고 있는 유씨도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가 입술을 살짝 깨물며 고민하다 몸을 돌려 범한에게 느릿느릿 절하며 호소했다.
“집안의 큰아들인 네가 아버지께 부탁을 해주렴.”
지금 범사철을 유배 보내겠다는 범건의 뜻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범한뿐이었다.
범한이 유씨의 절을 급히 피하며 난처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러자 범건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대신 말했다.
“그 애가 저지른 일을 언관이 조정에 상소한다면 3천 리 유배형을 받을 것이야. 그럴 바에는 차라리 조정에서 움직이기 전에 경도에서 쫓아내는 게 나아.”
하지만 유씨는 이 말을 믿지 않았다. 천자의 총애를 받으며 권세를 누리고 있는 백작가 자제가 기생집을 운영하며 기녀 몇 명을 죽였다고 유배를 가야 하다니, 모반을 꾀한 것도 아니고 철이 없어 멋대로 행동한 것뿐이니 범건과 범한이 나선다면 아무 일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아는 그녀가 울며 애원했다.
“정말 이렇게 모질게 하실 겁니까? 사철이는…… 그 애는 이제 겨우 열네 살이라고요!”
“모진 게 아니야. 그 애가 지금까지 한 짓이 이런 결과를 불러온 거네.”
잠시 생각하던 범건이 냉소를 짓더니 성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열네 살이라고? 잊지 말게. 범한은 열두 살 때 살기 위해 살인을 해야 했어!”
범건의 말에 서재가 순간 조용해졌다. 그 사실을 몰랐던 임완아와 범약약이 놀란 눈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이 일을 줄곧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유씨는 화들짝 놀라더니 절망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난처해진 범한은 아무 말 없이 조심히 상처투성이인 범사철을 안고 서재 구석으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아내와 여동생에게 아우를 내실로 데리고 가서 쉬게 하라고 분부했다.
“범한, 좀 있다가 건너오거라.”
범건이 유씨를 힐끗 바라본 뒤 서재에서 나가며 말했다.
서재에는 유씨와 범한만 남게 되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유씨가 초점 잃은 눈동자로 말했다.
“정말 경도에서 쫓아낼 거니?”
범한이 한숨을 쉬며 그녀 옆으로 가까이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위로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는 사철이가 경도에서 나쁜 일에 휘말리지 않고 외부에 나가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씨가 다시 물었다.
“얼마나 멀리?”
“아주 멀리요.”
범한이 생기 없는 유씨를 바라보며 말했다. 항상 고귀함을 잃지 않던 유씨가 자신의 모습이 흐트러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아들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자 그는 범사철이 부러우면서 누군가가 그리워졌다.
“도대체 얼마나 멀리 간다는 거니?”
애가 달은 유씨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날카롭게 반응하는 유씨의 모습에도 범한은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젯밤에 제가 사철이를 담주에 피신시키는 게 어떻겠냐고 건의해 봤지만, 아버지께서는 할머니께서 신경 쓰시는 게 마음에 걸린다고 하시면서…… 북제로 보내기로 하셨어요.”
“북제?”
유씨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북제도 먼 곳이긴 하지만 조정 유배지인 서만이나 서호보다는 번화하고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양국의 사이도 평화 협상을 한 뒤 이전과는 다르게 좋았다.
범한은 유씨가 자신에게 부탁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무슨 말을 할지 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북제에 친구가 많으니 잘 보살펴 달라고 말해 둘게요.”
* * *
앙상한 가을 나뭇가지 끝에 걸린 달이 등불보다는 희미하지만 은은하게 백작가 전체를 비췄다. 정원에서 매질을 당하던 범씨와 유씨 집안 자제들은 상서 거리와 근처에서 보낸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범씨 친척들은 자기 아들이 상처 입은 것을 보고 백작가를 원망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면서도 범건과 범한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재에서 범한이 공손히 부친의 옆에 서서 과일즙을 준비했다. 유씨는 범사철의 침대 옆을 지키고 앉아 한 발자국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기에 매일 밤 과일즙을 마셔야 하는 아버지를 위해 범한이 직접 나선 것이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세 명은 이미 경도부로 보냈습니다.”
범건이 말한 세 명은 포월루에서 살인 사건을 저지른 놈들이었다. 그가 아버지를 힐끗 본 뒤 걱정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경도부는 둘째 쪽이므로 저희가 정말로 그들을 경도부로 보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아마도 세 사람은 사철이와 연관된 살인 사건에서 중요한 인물인 만큼 밤에 둘째 측 사람이 데려갈 것 같습니다.”
범건이 웃으며 말했다.
“나를 속일 생각 하지 말아라. 네가 그렇게 조심성 없이 행동할 아이가 아니라는 건 나도 알고 있다.”
“후환이 없도록 제가 깨끗하게 처리할 생각입니다.”
범한도 웃으며 말했다. 그는 이번에 마침내 진평평이 자신에게 부여한 모든 힘을 사용했다. 바로 6처 자객을 파견한 것이다.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지른 사람들이긴 하나…… 이 일은 가문에서 반감을 품을 수 있는 일인 만큼 아버지가 직접 나서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범건도 아들이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경도 명문 가문 중에서 지금껏 자신의 가문 자제에게 손을 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뭘 나서란 말이냐? 우리는 경도부로 보냈을 뿐인데 우리가 무슨 관련이 있겠느냐?”
범한이 그 말을 듣고는 감탄하며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사철이가…… 오늘 밤 움직이면 저는 언빙운에게 이 일을 아무 흔적도 없이 처리하라고 명령할 것입니다.”
범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북제 사람과는 아무런 연줄이 없다. 게다가 예전에 그들을 너무 잔인하게 죽였어. 네가 보기에는 어떨 것 같으냐?”
사철의 안전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눈빛을 본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왕계년이 지금 상경에 있습니다. 게다가 제가 해당타타나 북제 황제와 관계가 좋으니 사철이는 상경에서 아무 문제 없이 지낼 수 있을 겁니다.”
한숨 쉬는 범건의 희끗희끗해진 수염이 오늘따라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네가 이전에 사철이가 상당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공부해 벼슬길에 오르는 것만이 방법은 아니라고 말했지. 네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동안 내버려 두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이지 사철이가 이런 짓을 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열네 살밖에 안 된 아이가 이런 일을 저지르다니. 내가 열네 살 때 뭘 하고 있었는지 아니? 정왕가에서 당시 세자셨던 폐하와 함께 공부하면서 온종일 뭘 하고 놀까 고민했단다.”
범한이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의 귀빈이 키운 3 황자가 정말 무서운 분이지요. 여덟 살에 기생집 사장이 되다니 만약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경사 같은 역사책에 실려 오래도록 전해질 겁니다.”
“의 귀빈에게는…… 내가 가서 말하마.”
범건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네 말대로 사철이가 상당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너무 철이 없어. 이렇게 위험한 짓을 벌이면서도 장기적인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니. 사실 그 애를 멀리 보내는 건 벌을 주려는 것보다 이번 기회에 세상을 보는 안목을 길러 더 나은 재목으로 성장하길 바라서야.”
범한이 한숨을 쉬었다.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저의 책임도 있습니다.”
“자책하지 말거라.”
범건이 손을 뻗어 앉으라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일이 생겼을 때 너는 경도에 없었지 않니. 다만 내가 사철이를 북제에 보내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을 때 네가 안심하는 표정을 지은 이유가 궁금하구나. 북제는 경국 사람들이 있기에 좋지 않은 곳인데.”
범한은 그와 해당타타 그리고 젊은 황제가 암묵적으로 맺은 협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자기 생각을 설명했다.
“신양은 최씨 가문을 통해 북제에서 밀수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심중이 죽은 상황에서 그들의 노선도 문제가 생겼을 것입니다. 저는 사철이가 북제에서 성장하는 몇 년 동안에 최씨 가문의 사업을 가져올 기회가 올 거라고 예상합니다. 그래서 만약 그런 기회가 온다면 장사를 좋아하고 잘하는 사철이에게 관리하게 할 생각입니다.”
범건이 아들을 바라보며 안심이 된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범한은 진평평보다는 덜 잔인했지만 모든 계획을 주도면밀하게 세울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언제 최씨 가문을 건들 생각이냐?”
범건이 자신의 계획에 쉽게 동의하자 범한이 마음을 놓으며 말했다.
“황실 금고를 받은 뒤 시작할 생각이니 대략 내년 3, 4월쯤일 겁니다.”
범건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걱정되는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들에게 어떠한 반격의 기회도 줘서는 안 된다.”
항상 온화하던 범건이 처음으로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모습을 보이자 범한이 놀라 작은 목소리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범건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일은 네 결정이 옳았다. 잠시 뒤로 물러선다면 반격할 기회를 포착할 수 있을 거야. 사철이가 떠난 뒤에는 뭘 하든 내 의견을 묻지 말고 진행해라. 다만 그 사람…….”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지 범건이 미간을 찌푸렸다.
“원몽……이었던 것 같은데? 악랄한 짓을 서슴없이 자행하는 사람인 만큼 사건이 조용해지면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버지가 범사철의 일에 대한 화풀이가 아니라 다른 원인으로 사람을 죽이라 말하자 범한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범건은 그런 아들의 표정은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신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휴머니즘 정신과 오래도록 숨겨 온 박애 정신을 드러내며 냉정하게 말했다.
“아비가 과거 유정강에서 많은 기생을 품으면서 느낀 건 악랄한 방법으로 아름다운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이 가장 사악하다는 거다. 더구나 원몽은 원래 기생이었다면서? 같은 일을 하는 연약한 여자들에게 서슴없이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은 절대 살려 둬서는 안 된다.”
그 말은 들은 범한의 머릿속에 정왕이 농담 삼아 아버지가 기생집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살았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더구나 그 당시 아버지의 사랑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경도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 기생들이 처참하게 죽은 사건이 아버지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다면 원몽을 죽여야 한다는 말도 이해가 됐다.
기회를 포착한 범한이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원몽은 홍성의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보시기에 이런 홍성과 누이가 혼인하는 게 맞는 일인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범건이 고개를 저었다.
“홍성의 품성이 나쁘지 않으니 두고 보도록 하자. 폐하께서 정하신 혼처인 만큼 신중해야 해.”
범한은 실망스럽기도 했지만 그보다 부친이 약약의 행복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에 분노가 일었다.
‘아버지는 약약이를 기생집 여자들만큼도 생각하지 않으시는 건가?’
그는 마음속으로 이 일은 아버지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아버지의 서재를 나선 뒤 자신의 서재로 들어왔다. 서재에 있는 세 사람이 일어나 인사했다. 사천립이 먹물이 이미 마른 문서를 건네주며 말했다.
“포월루의 7할 지분에 대한 양도 계약서입니다. 대인이 보시고 문제가 없으면 작은 도련님의 지장을 받으면 됩니다.”
목철이 이어서 말했다.
“경도부도 계속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곳 정보원이 보내온 서신에 따르면 경도부는 저희가 보낸 살인 사건 범인들을 보고는 상당히 난처해했다고 합니다. 이후 2 황자 측에서 보낸 사람이 경도 부윤의 저택에 갔는데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네. 어차피 당분간은 움직일 수 없지 않은가.”
목철이 미간을 찌푸렸다.
“만약 상대방이 우리가 물귀신 작전을 쓴다고 잘못 판단해 경도부에게 작은 도련님을 체포하라는 공문을 보내라 하면 어떡합니까?”
목철의 말에 범한이 고개를 젓고는 언빙운을 바라봤다.
“4처 책임자가 여기 있는데 북쪽으로 간 사철이를 누가 찾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