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281화 (281/1,108)

281화

유씨는 평범한 부인들과는 달랐기에 오늘 포월루가 수색당한 일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또 돌이켜 생각해 보면 범한과 2 황자 사이의 힘겨루기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것이기도 했다. 그녀가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별로 큰일도 아닌 걸 가지고 범한이 2 황자에게 약점을 잡혀 화가 나 저러는 것 아닙니까.”

유씨 역시 범사철과 마찬가지로 범한이 화가 난 이유가 2 황자에게 약점을 잡혀서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범건이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큰일이 아니라고? 방금 뒤채 서재에서 보내온 걸 보지 못했소? 나이도 어린 게…… 그런 짓을 벌였는데 큰일이 아니라니?! 사철이가 직접 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손으로 한 것과 다를 게 뭔가? 아들이 직접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죽여야지만 큰일이라 할 텐가?”

그러자 유씨가 자기 아들을 위해 변명하기 시작했다.

“경도에서 이런 일이 작은 일이 아니면 뭡니까? 어느 집에나 있는 일인데…….”

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범건이 말을 가로채며 차갑게 말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더는 가타부타 말하지 말게.”

범건의 말에 유씨가 입을 다물었다. 흐르는 눈물은 닦아도 끊임없이 계속 흘렀다. 멀리 서재에서 들리던 마음 아픈 비명 소리가 점차 잦아들었음에도 그녀의 마음속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철아가 기절을 한 거면 어떡하지?’

그런 유씨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던 범건은 침울한 마음으로 어젯밤 범한과 상의했던 일을 떠올렸다.

몇 달 동안 범사철이 경도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도 그는 아무런 소문도 듣지 못했고, 어린아이가 해봤자 뭘 할 수 있겠냐는 생각에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친아버지임에도 범사철의 능력과 수완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범한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게.”

범건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하듯 말했다.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그 애가 이렇게 매섭게 행동하는 건 사철이를 자신의 친동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네. 범한이란 아이는 적을 만나면 미소를 지을 뿐 오늘처럼 이렇게 화를 내지 않아. 사철이를 아끼기에 매섭게 혼을 내는 게야. 만약 아끼지 않았다면 단칼에 베어 죽였겠지 뭐 하러 이렇게 화를 내겠나? 이 점을 생각해서 안심하게. 솔직히 말해서 우리 집안이 훗날 누구에게 의지해야 하는지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나.”

유씨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지금은 백작가가 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엄청난 권세를 누리고 있었지만 언제나 그러리란 법은 없었다. 범건의 나이가 많은 만큼 언제든지 관직에서 물러날 수 있었고 그렇게 된다면 그녀와 사철이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앞으로 백작가가 편안하게 권세를 누릴 수 있을지는 범한에게 달려 있었다.

그래도 유씨는 지금 범한이 원망스럽고 미웠다.

범건이 고개를 저으며 자신과 함께 뒤채 정원 옆에 있는 서재에 가보자는 표시를 했다. 그러자 유씨가 기뻐하면서 급히 뒤를 따라나섰다. 어찌나 마음이 급한지 뜨거운 수건을 들고 뒤를 따르는 여종들에게 지시할 생각은 하지 않고 물러가라고 손을 내저었다.

범건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의아한 표정을 짓던 종들은 뒤채에서 들리던 ‘돼지 멱따는 소리’를 떠올리고는 화들짝 놀랐다.

‘큰 도련님이 둘째 도련님을 때리는 것 때문에 가시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집 안이 시끄러워지는 것 아냐?’

백작가는 요 몇 년 동안 아무 일 없이 순탄하게 지내 왔고 가풍도 엄격했기에 종들도 상당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집 안에 시끄러운 일이 발생하는 건 원치 않았다.

마음이 급한 유씨는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정원에 들어가면서도 날아가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하지만 사남 백작의 평상시와 같은 넓고 침착한 등을 보니 감히 앞장서서 나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앞집과 뒷집을 이어 주는 정원 문에 이르자 처참한 울부짖음과 함께 나무판이 살을 때리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유씨는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이런 소리를 듣자 자기 아들의 비명 소리인지 아닌지 구분할 여력도 없었다. 놀란 그녀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다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다행히 물러가라는 유씨의 말을 듣지 않고 규정대로 뒤를 따르던 여종들이 뒤로 넘어가는 그녀를 부축했다.

* * *

집 안 서재 세 곳 중 가장 조용한 곳은 가짜 산 옆 으슥한 곳에 있었다. 그래서 범한은 종들의 접근도 막고 이곳을 감찰원 일을 처리하는 곳으로 썼다. 이때 서재에는 범한 말고도 세 명의 사람이 앉아 있었다. 범한과 마주 보고 앉은 사람은 방금 4처에 부임한 작은 언 대인인 언빙운과 범한의 제자 사천립, 1처 주부 목철이었다.

이 밖에도 서재 밖 정원에는 형을 감독하는 등자경과 등자월도 있었다. 언빙운을 제외하면 모두가 범한의 측근이었다. 자연스레 특별한 위치에 있는 언빙운은 범한과 상사와 부하 사이면서도 약간의 우정을 나누는 사이였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정원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더니 고개를 저었다.

“경도부에서 처리할 일을 왜 집 안에서 가법으로 처리하려 하십니까? 이건 경국 법률에 맞지 않습니다.”

세 사람 중 언빙운만이 범한의 결정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었다. 사천립이 범한의 표정을 힐끗 살피고는 웃으며 작은 언 대인에게 설명했다.

“이 일은 잠시 묻어 둬야 합니다. 정말 경도부에 맡기려면 둘째 도련님과 황궁에 계시는 그분을 조사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제사 대인께서 2 황자와 완전히 갈라서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수사한들 백작가 작은 도련님에게는 좋은 결과가 있을 수 없고, 경도부에서 수집하는 증거로 2 황자를 건들 수도 없지 않습니까.”

목철이 아무 말 없이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어쨌거나 포월루 일을 범 제사가 알게 된 것은 자신이 한 말 때문이었다. 그러니 백작가 작은 도련님이 오늘과 같은 상황에 부닥치게 된 데에는 자신의 책임도 있었다. 물론 범 제사는 만족스러운 듯 보였지만 백작가 사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언빙운이 다시 고개를 저으며 범한이 가법을 사용해 국법을 대신한 것에 반대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그도 현재는 이 방법 말고는 없다는 걸 알기에 답답한 마음에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

“우리 제사 대인께서는…… 정말 수정 같은 심장을 가진 사람입니다. 가법으로 호되게 야단을 쳤으니 나중에 포월루 사건이 드러난들 폐하에게 변명할 구실은 생긴 셈 아닙니까. 최소한 2 황자가 엄청난 죄목을 들먹이며 백작가를 궁지에 몰지는 못하겠군요.”

그 말에 사천립의 표정이 굳었다. 오늘 범한이 때리는 소리를 집 안 사람이 다 듣게 하는 것은 사전에 언관들의 입을 틀어막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 일로 범사철이 관련된 형사 사건이 덮어지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사천립의 생각을 읽은 언빙운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쪽 스승께서 이미 계획을 해 두셨으니까요.”

사천립이 무언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4처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이 일에 범한이 언빙운을 불렀다는 것은 다른 계획이 있다는 것이지만 분위기상 계속 물어볼 수가 없었다.

목철이 창가로 걸어가더니 가짜 산 너머 정원에서 나무판으로 엉덩이를 때리는 모습을 바라봤다. 피부가 터지고 피가 튀는 장면과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울음소리를 들으니 감찰원 관리인 그 역시도 범한이 두려워졌다. 범씨와 유씨 집안 자제들은 고통에 자신의 엉덩이를 계속 만지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한편 사천립은 책상에서 당장 요긴하게 쓰일 문서를 정신없이 쓰기 시작했다.

* * *

잠깐 졸도했다가 깨어난 유씨는 당장 범한을 찾아가 결단을 내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정원에 들어가 보니 맞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집안 친척들이었다. 비록 피가 튈 만큼 무서운 매질에 애처로운 아이들의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자신의 친아들이 괴로워하는 건 아니었기에 상관없었다. 다시 백작가 부인의 고귀하고 단아한 모습을 되찾은 유씨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녀는 한없이 사랑스러운 아이인 범사철이 경도에서 패악 무도한 짓을 저지른 것은 어떤 사악한 유혹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범사철이 삐뚤어진 것은 지금 맞고 있는 조카들과 범 씨의 집안 자제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화가 난 그녀는 구해 달라고 사정하는 소리를 무시한 채 등자경을 향해 소리쳤다.

“범한이 너희들에게 처벌을 맡겼으니 반드시 저놈들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도록 해라. 그러지 않으면 내 가만있지 않을 거야!”

그러고는 범건과 함께 서재로 들어간 그녀는 서재 구석, 긴 걸상 아래에서 바지를 벗은 채 엎드려 있는 범사철을 발견했다. 놀란 그녀가 재빨리 기어가서는 낮은 목소리로 울먹이며 피멍이 든 아들의 엉덩이를 조심히 어루만졌다.

“내 아들이…….”

그때 손 하나가 불쑥 나타나더니 손수건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 줬다. 그녀가 놀라 돌아보니 범한이 서 있었다. 그녀는 원망하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자기 아들을 이렇게 만든 범한이 밉고 원망스러웠다.

한차례 매질을 한 뒤 이성을 되찾은 범한이 위로하며 말했다.

“아무 일 없을 겁니다. 제가 아우에게 약을 발라 줄 테니 좀 물러나 주시지요.”

유씨가 아무 말 없이 물러나 범한이 범사철의 몸에 약을 발라 주는 모습을 지켜봤다. 범사철은 비명을 지르며 울다가 졸도한 상태였다.

한편 옆에 있던 범건은 서재 구석에 조용히 서 있는 며느리와 딸을 바라봤다. 완아의 얼굴에 놀란 흔적이 역력한 걸 보니 범한의 매질이 상당히 모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약약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 것은 아파하는 동생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철없는 동생이 안타까워서인 듯했다. 범건이 마른기침으로 주변의 시선을 집중시킨 다음 온화한 목소리로 범한에게 물었다.

“계획은 어떻게 됐니?”

“아버지의 뜻대로 사철이는 오늘 밤 떠날 겁니다.”

범한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두 부자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마주 보고 대화를 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세 여자는 멍한 표정으로 둘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저렇게 심하게 맞은 거로도 부족해 경도 밖으로 내쫓는다고?’

“지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유씨가 놀란 토끼 눈을 한 채 범건을 바라봤다. 한편 반 혼수상태가 되어 걸상 아래 엎드려 있던 범사철이 그 말을 듣고는 벌떡 일어났다. 심한 매질을 당한 사람치고는 민첩한 반응이었다. 사실 경도에서 권력을 누리며 살던 귀족가 자제에게 경도를 떠나 다른 곳으로 보내질 거란 말은 공포 그 자체였다.

범사철이 궁둥이를 치켜들고 자기 어머니의 다리를 꽉 끌어안더니 두 눈을 감고 닭똥 같은 눈물을 몇 방울 떨궜다. 그러고는 뭐라 말하려 입을 크게 열었지만 맞으면서 울고불고 소리를 질러서 그런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놀란 범사철이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하며 뭐라 말하려 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엉덩이는 피멍이 들어서는 말도 하지 못한 채 눈물만 흘리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는 모습이 정말이지 가여웠다.

“어르신!”

유씨가 참지 못하고 원망하는 눈빛으로 범한을 쏘아본 뒤 범건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사정했다.

“그러시면 안 됩니다! 그럴 수 없어요! 철아가 잘못을 했어도 당신 아들이잖아요. 애가 집에서 쫓겨나는 모습을 그냥 보실 생각입니까? 어미도 아비도 없는 낯선 이국땅에서 헤매게 두시려고요?”

그러고는 재빨리 옆에 서 있는 범약약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약약아, 빨리 네 아버지께 철아를 내쫓지 말아 달라고 말해 주렴.”

유씨는 포월루의 일로 범사철이 집에서 쫓겨나게 된 것은 분명 어젯밤에 부자가 대화를 나눌 때 범한이 몰래 무슨 말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약약을 재빨리 상황에 끌어들인 것이다. 약약은 자신이 낳은 아이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십여 년을 같이 살면서 사철을 누구보다도 아끼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알듯이 범한은 그런 누이를 가장 아꼈다.

범약약도 아우가 이처럼 무거운 처벌을 받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유씨의 요구대로 순순히 무릎을 꿇고 사정했다.

“아버지, 아우도 이제 잘못을 알았을 테니 더는 나쁜 짓을 하지 못할 겁니다. 부디 용서해 주세요.”

계속 옆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완아도 함께 무릎을 꿇었다.

줄곧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던 범건은 특별한 신분인 며느리가 무릎을 꿇자 급히 부축해 일으켜 세우며 유씨에게 말했다.

“사철이는 반드시 오늘 떠나야 하네. 그리고 이 일은 내 의견이니 범한을 탓하지 말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