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마차가 경도 대로를 따라 돌 때마다 길옆 민가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등자월이 고개를 돌려 소리 나는 쪽을 지켜보다 범한에게 보고했다.
“뒤를 미행하던 종들을 모두 기절시켰으니 이제 조용히 갈 수 있을 겁니다.”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자니 좀 이상한데 왕계년이 직접 뽑은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미행, 추적, 잠행과 같은 것에 탁월한 능력이 있군. 그런데 감찰원에 걸맞은 위풍은 보이지 않는단 말이야.”
등자월이 부끄러워하며 설명했다.
“대인, 저희 조직 구성원들은 대부분 1처와 2처 사람들입니다. 왕 대인께서 가장 잘하시는 게 추적과 미행이다 보니 저희를 뽑을 때도 이 방면에 중점을 두셨습니다.”
잠깐 말을 멈춘 그가 뭔가를 생각하더니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대인께서 오늘 일에 직접 나서신 걸 저희도 무척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호위와 자객 업무를 전문으로 하는 6처 사람 중 적당한 사람을 골라 옆에 두심이 어떠합니까? 대인께서도 북제에 가셨을 때 그들의 실력을 봐서 아시겠지만 무공 실력은 그들이 저희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사실 ‘그림자’를 만나는 걸 약간 두려워하고 있었다. 가끔 진평평을 만나러 갈 때마다 감찰원 6처 책임자인 그림자를 만났는데, 서로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지만 자신이 오죽에게 배웠다는 이유로 상당한 관심을 보인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림자는 분명 오죽의 제자인 자신과 겨뤄 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범한은 되도록 6처와 마주치는 일이 없길 바랐다. 게다가 무공 실력만 보면 부친이 암암리에 키운 호위병의 검술 실력이 6처보다는 훨씬 뛰어났다. 언빙운의 예측대로라면 호위병이 곧 있으면 자신에게 올 것인데 굳이 조급하게 6처에 접근할 필요는 없었다.
“포월루가 불법적인 짓을 저지른 게 있는지 샅샅이 조사하도록 하게.”
생각에 잠겨 있던 범한이 나지막이 명령했다.
등자월이 화들짝 놀랐다.
“그럼 배후 사장은 조사하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범한이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감찰원 내부에서 비호를 해줘 찾기가 쉽지 않으니 외각에서부터 치고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네. 포월루를 꼼짝하지 못하게 수렁으로 몰아넣으면 조급해져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겠지.”
사실 그는 막대한 수입을 올리는 포월루가 세자 이홍성과 관련이 있을 거라 짐작하고 있었다. 이렇게 짐작한 이유는 상문이 포월루 책임자가 원몽이라고 말한 점과 국공가 자제들이 동원된 점이었다. 게다가 정왕 세자와 범약약의 혼사가 모두에게 알려졌으니 2 황자 측이 감찰원 제사라는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 감찰원을 압박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상대방이 이런 상황을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범한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어차피 혼사를 깰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자신과 누이의 명의를 이용하는 건 허락할 수 없었다.
더구나 놀 생각에 공금으로 기생집에 갔다가 결국에는 사건을 조사하고 싸움에 휘말리게 된 것도 기분 나빴다. 그가 옆에 조용히 앉아 있는 상문 낭자를 힐끗 바라봤다.
“사람을 시켜 성 밖으로 몸을 피할 수 있게 해줄 테니 사건이 해결되면 돌아오도록 하게. 하지만 가기 전에 먼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일을 조목별로 상세하게 써야 할 거야.”
범한은 상문의 성격이 치밀하고 조리 있기 때문에 포월루 일을 조사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범한이 포월루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를 모르는 등자월은 오늘 밤 일로 불쾌해진 제사 대인이 감찰원 내부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내려 하는 것이라고만 짐작했다.
반면 고민하던 사천립은 스승의 눈치를 살피다가 상대방이 고개를 끄덕이자 비로소 입을 열었다.
“대인, 왜 1처 임시 책임자인 목철 대인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으시는 겁니까? 대인이 경도에 없는 동안 포월루가 성장한 경위를 물어본다면 내막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범한이 눈을 감고는 고개를 저었다.
“목철 대인이 일부는 알고 있을지는 몰라도 전체를 파악하고 있지는 못할 거네. 이 일은 분명 나 아니면 내 집안과 연관이 있는 만큼 그를 이 일과 연관시킬 필요는 없네. 게다가…… 이런 작은 일도 내 힘으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관료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마차 안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조금 전 귀신처럼 신묘한 무술 실력을 보인 사람과 지금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범한의 무술 실력은 외양간 거리 사건을 계기로 점차 세상에 알려지긴 했지만 직접 그 실력을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더구나 범한과 겨루었던 사람들이 대부분 죽은 걸 보면 오늘과 같은 상황은 굉장히 보기 드문 경우였다.
범한이 목철에게 왕계년의 나대는 버릇을 닮지 말라고 말했을 때 등자월도 옆에서 듣고 있었지만 제사 대인이 우울해하는 모습을 보니 왕계년처럼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조심히 침묵을 깼다.
“대인, 아까 포월루에서…… 제가 거금을 가지고 있을 거라 확신하신 이유가 뭡니까?”
범한이 천천히 눈을 뜨더니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지난번에 최씨 효경, 그러니까 최청천에게 2만 냥을 받았을 때 부하들이 돈을 너무 헤프게 쓸까 봐 걱정하며 한 사람당 백 냥밖에 안 나눠 줬지 않은가. 그러니 부하들에게는 총 3천 2백 냥을 나눠 준 것이지. 그리고 왕계년 가족에게 5천 냥을 보냈으니 1만 1천 8백 냥이 남아 있다는 걸 알 수 있지.”
그러고는 눈을 감더니 등자월의 주머니 사정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는 구두쇠라서 먹고 입는 것도 감찰원에서 제공해 주는 거로 해결하지 않나. 심지어 3처 팽 선생 아들 결혼식에 은전 다섯 냥을 축의금으로 낸 뒤 아까워서는 내 앞에서 여러 번 나쁜 풍습이니 없애 버려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나. 이런 걸 보면 자네는 한 달에 기껏해야 은전 두 냥 정도밖에 쓰지 않을 거네. 게다가 자네는 왕계년과 다르게 혼인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으니 1만 냥이나 되는 거금은 어디에다 둘 수 있겠나? 자네처럼 신중한 사람이 비어 있는 집 안에 두지는 못할 테니 계속 몸에 지니고 다니겠지.”
범한이 웃으면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등자월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무 지나치게 절약하면 젊은 과부도 얻기 힘든 법이네. 게다가 부녀자들 사이에 짠돌이라고 소문이 나면 감찰원 체면도 말이 아니고 말이야.”
마차 안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등자월이 정색했다.
“그 은전은 대인에게 보고한 뒤 나눠 주려고 했던 겁니다. 그리고 백 냥은 절대 적은 돈이 아닙니다.”
범한이 씁쓸히 웃었다.
“이렇게 짠돌이면서 어떻게 왕계년 가족들에게는 그렇게 큰돈을 보낼 생각을 했는가? 상사라고 생각해 준 건가?”
등자월이 슬며시 웃었다.
“왕 대인이 북제에 계시니…… 변고가 생겨 급히 은전이 필요한 상황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보내 둔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감동한 범한이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만약 평범한 경국 사절이나 학생이라면 북제에 있는 게 위험하지 않다. 오히려 북제 국민과 거의 대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왕계년처럼 밀정 책임자로 있는 것이라면 언제 어디서 변고가 터질지 몰랐다.
그때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사천립이 불쑥 물었다.
“내일 정말 포월루에서 은전을 찾아오실 생각입니까?”
멀리 이국땅에 있는 왕계년과 그가 최근에 보내온 사리리가 궁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떠올리며 착잡해 하던 범한은 사천립의 질문을 듣자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감찰원은 조정을 위해 밖에서 목숨을 걸고 일하고 있는데 조정에 있는 황자들은 서로 알력 다툼이나 하고 있었다. 더구나 이 더러운 일에 감찰원까지 연루되어 있었다. 범한이 분노에 치를 떨며 대답했다.
“당연히 찾으러 가야지.”
그러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등자월을 바라보았다.
“자네 신분을 당당히 밝히도록 하게! 아까 대화할 때 그 낭자가 나보고 상문을 데리고 가더라도 내일이면 다시 돌려보내야 할 거라고 말하지 않았나. 그건 사람을 보내 억지로 뺏겠다는 말이네! 이런 놈들을 상대하려면 우리도 똑같이 대해 줘야겠지. 만 냥을 내일 되돌려 받겠다고 말했으니 자네가 반드시 되찾아 오도록 하게.”
범한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 * *
내일 성문이 열릴 때를 틈타 상문을 성 밖 농가로 데리고 가라는 명령을 받은 등자경이 이 일을 진행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 집으로 돌아온 범한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비단 이불 아래 있던 완아가 수심이 가득한 그의 얼굴을 보고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범한은 그녀가 있는 쪽은 쳐다보지 않은 채 오늘 밤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물론 공금으로 기생집에 간 일은 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둘러댔다.
그 말을 들은 완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수상한 점이 있는 것 같아요.”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황궁에서 자라 상서 거리에 있는 국공 집안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완아가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내일 기회를 봐서 사철이 모친께 물어보는 게 어떨까요? 유씨는 상서 거리에서 자랐고 국공 집안 출신이니 들은 게 있을지도 몰라요.”
범한은 순간 완아의 말대로 유씨에게 물어볼까 고민하다 마음을 접었다. 유씨처럼 신중하고 좀처럼 속을 보이지 않는 사람은 분명 자신이 힘을 잃었을 때 발목을 잡고 넘어뜨리려 할 게 뻔했다. 유씨의 거의 모든 부분을 파악한 범한은 그녀가 항상 백작가, 특히 아버지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완아가 생각에 잠긴 범한을 보다가 걱정에 미간을 찌푸렸다.
“내일도 포월루에 가실 건가요? 오늘 만난 국공가 아이들은 경도에서 악명이 자자해요. 상공께서는 무섭지 않으시겠지만 그래도 조심하세요.”
범한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이 일은 경계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이어 말했다.
“어린 시절 담주에 있을 때부터 거리에서 남을 못살게 하는 귀족가 자제들을 흠칫 두들겨 패주고 싶었거든요. 그동안 하지 못하다가 오늘 밤 마침내 뜻을 이루니 속이 시원하네요.”
완아가 그의 가슴을 가볍게 쳤다.
“담주에서는 상공이 가장 큰 귀족가 자제였을 텐데 거기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고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범한이 완아의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고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살인 자체를 즐기는 거예요. 귀족가 자제들이 아무 이유 없이 단순히 살인하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는 건…… 그건…… 살인이 주는 짜릿한 자극에 중독된 거예요. 갓난아이들도 젖을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고 살인하는 경우가 있죠. 하지만 살고자 하는 기본적인 본능에 따른 거니까 사람을 죽여도 죄책감도 없고 자신이 뭘 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해요. 마찬가지로 경도 그귀족 소년들도 어려서 조정과 세상에 대한 경외심이 없을 테니 잔혹한 짓을 할수록 더욱 기고만장해지는 거죠. 일단 그 경계가 허물어지면 올해 강남 제방처럼 막을 수 없게 돼요.”
그가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부하들을 모질게 공격하던 소년들을 떠올렸다.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근심이 아름다운 눈동자에 서서히 떠올랐다.
* * *
그날 밤 긴 거리에서 벌어진 싸움 소식은 여러 사람의 마음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경도 치안을 책임지는 경도부는 가장 마음을 졸여야 했다. 자기 가문의 권위와 조정의 특별 대우를 믿고 악랄한 짓을 일삼던 국공가 자제들이 거리 한복판을 막고 싸움을 벌이다가 참혹하게 당했다니 정말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건을 책임진 경도부 관차는 뼈가 부러지거나 근육이 잘린 소년들의 모습을 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이런 일을 벌인 ‘진 공자’에 대해 의구심이 생겼다. 국공가의 권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런 짓을 벌인 사람이 있다니.
곧이어 등자월의 걱정처럼 몇몇 사람들이 범한이 이 일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날 밤 상황을 자세히 전달받은 경도부는 진 공자가 누구인지 조사하지 않았다. 몇몇 영리한 사람들은 거리 민가 지붕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뛰어 내려왔다는 증언에서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바로 감찰원의 젊은 제사 대인이 항상 데리고 다니는 ‘계년조’였다.
“원몽에게 오라고 하게. 범한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좋은 날은 다 갔다고 할 수 있겠군.”
경국 2 황자가 온화한 얼굴로 부드럽게 말했다.
천천히 창가로 걸어간 정왕 세자 이홍성은 자신의 사촌 형제의 성격이 누구보다 치밀하다는 걸 알기에 마음이 서늘해졌다.
“누구도 범한이 기생집에 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 괴팍한 성미에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군요.”
2 황자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작은 접시에 담긴 말린 과일을 집었다. 그러고는 과일 껍질을 벗긴 뒤 천천히 씹으며 말했다.
“범한이 자세히 조사할수록 포월루가 그동안 해온 일들도 드러나겠지. 일이 점점 재미있어지는군.”
이홍성이 고개를 돌려 2 황자를 바라보았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이런 상황도 염두에 두셨지 않습니까. 다만 궁금한 것이…… 왜 범한에게 나설 기회를 주셨습니까?”
2 황자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그야 범한과 화해하고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지. 포월루는 마지막 기회라고 할 수 있네. 만약 범한이 손을 내민다면 나도 그 손을 잡을 의향이 있네. 그래서 한 번은 그에게 손을 내밀 기회를 주고 싶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