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호루라기 소리가 어디선가 들렸다.
소리가 나자 거리 양쪽 민가 지붕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뛰어 내려와 돌진하며 순식간에 귀족 자제들의 대열이 흐트러졌다. 계년조 조직원들은 오랜 시간 밀정 활동을 했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적당하게 대처할 줄 알았다. 이에 귀족 자제들은 건들지 않고 그들이 타고 있던 말을 공격했다. 순식간에 귀족 소년들이 말에서 떨어졌다.
등부터 떨어질 거란 범한 일행의 예측과는 달리 소년들은 갑작스럽게 떨어지면서도 다리부터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이들은 대대로 전해지는 왕공가의 무술 교육을 받아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저놈들 뭐야, 가만두지 않겠어!”
열네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우두머리 소년이 우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갑작스럽게 검은 옷을 입은 무리가 나타났는데도 전혀 겁먹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들은 경도에서 오랫동안 제멋대로 지내서 사실 누가 나타나도 무섭지 않았다. 우두머리 소년이 손에 들린 검을 몸에 바짝 붙이고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를 향해 엄청난 기세로 돌진했다.
범한의 부하는 여기 있는 소년들이 존귀한 신분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가슴을 활짝 펴고 달려오는 상대방을 보면서도 단검을 던지지 못했다. 더구나 아직 어린 소년들에게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건 옳지 않았다. 이에 몸을 살짝 돌려 피하자 왼쪽 어깨에 바람에 들어오면서 살짝 피가 맺혔다.
상대방이 소극적으로 나오자 소년이 오만한 표정으로 웃었다.
“이놈들, 우리가 누군지 알고 있나 본데. 형제들, 마음껏 죽입시다!”
상대적으로 숫자가 많은 소년들이 코끼리를 휘감는 개미들처럼 계년조를 둘러쌌다. 상대방의 신분을 알고 있어 함부로 나서지 못하는 계년조와 달리 횡포한 짓을 일삼는 소년들은 꺼릴 게 없었다. 그들은 조정이 할아버지의 체면 때문에 자신들에게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에 소년들이 죽기 살기로 덤비자 계년조는 순간 허물어지면서 수세에 몰렸다.
잠시 뒤 몇몇 소년들이 계년조 조직원들에게 맞아 기절하면서 양측의 세력이 균등해졌다.
어둠이 짙게 깔린 거리에 칼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왔다. 주인들을 대신해 횃불을 들고 있던 종들이 가까이 다가와 밀집 대형을 취했는데 심드렁한 표정을 한 것이 모시는 주인들의 안위가 걱정되는 모습은 아니었다.
마차 안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범한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자신을 호위하는 계년조는 고달이 이끄는 호위만큼 실력이 있지는 않지만 저기 귀족 소년들보다는 훨씬 뛰어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감찰원 관원으로 오랜 시간 나라를 위해 복무하다 보니 ‘유협 소년단’ 같은 망나니들에게도 과감하게 행동하지 못하는 터였다.
물론 범한도 부하들이 이 일 때문에 자신이 난처한 상황에 처할까 봐 걱정해서 그런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정말 상황이 급하다면 계년조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자신을 지킬 것이다. 그런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오만방자한 소년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맞고 있는 걸 보니 범한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전 세상에서 밀라노가 리버풀에게 역전당했을 때처럼 분하고 원통한 기분이었다.
“쓸모없는 놈들!”
범한이 마차에서 내리면서 난폭한 정기를 내뿜으며 말하자 싸움이 벌어지는 길거리 곳곳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싸우던 소년들이 일순간 동작을 멈추자 계년조가 재빨리 마차 옆으로 몸을 피했다. 하지만 맨 처음 무리와 맞섰던 두 명은 이미 상처를 입어 피를 흘리고 있었다. 계년조가 과감하게 대처하지 못한 데다가 소년들이 무지막지한 공격을 퍼붓는 바람에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까지 치달았던 것이다.
부하들을 보던 범한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북제 사람과 싸울 때는 이렇게 무능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것 같은데?”
부하들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면서도 가슴이 들썩거리는 것이 범한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는 듯 보였다.
‘저 꼬마들이 우리가 대적해야 할 적은 아니잖아. 젠장, 상대는 국공 집안 자제들인데 상대가 죽기 살기로 덤빈다고 똑같이 맞서면 결국 우리만 손해를 보게 될 것 아냐.’
계년조 조직원들이 속으로 이렇게 투덜대고 있을 때 등자월이 마차에서 내렸다. 화가 나 안색이 검푸르게 변한 그가 점점 가깝게 다가오는 소년들을 바라봤다. 소년들은 두려움이 뭔지 모르는 철없는 병아리처럼 거만한 표정으로 시시덕거리며 피가 묻은 칼을 들고 마차 옆에 선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인, 상대방 신분이 좀…….”
범한의 안색이 점점 검붉게 변하는 걸 본 등자월이 재빨리 말을 바꿨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알아서 잘 처리하겠습니다.”
“신분이 어떻다고? 내 눈에는 길을 막고 있는 좀도둑만 보이는데. 저런 놈들에게 맞아서 다쳤다는 게 알려지면 얼마나 창피할지는 생각해 봤나!”
“이봐, 애송이. 너, 뭐라고 했냐?”
우두머리 소년이 사악한 기운을 풍기며 말을 타고 마차로 다가왔다.
“거기, 마차 안에 있는 기생을 데리고 와. 그러지 않으면 너의 쓸모없는 부하들의 팔을 잘라 버릴 거야. 너는 작은 사장께서 건들지 말라고 했으니 봐주도록 하지.”
그 말에 범한은 소년을 힐끗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에 발끈한 소년이 길길이 날뛰며 소리쳤다.
“이 오입쟁이 새끼, 내 말 안 들려? 당장 기생 년을 내놓으라고! 포월루에서 난동을 부렸으니 어떻게 죽을지는 생각해 뒀겠지? 우리가 최근에 곤봉형을 새로 발명했는데 한번 경험해 볼래?”
음란하면서도 모욕적인 말에 소년들이 다 함께 박장대소했다.
범한은 소년의 말에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은 채 부하들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보았다.
“밖에 있는 적이든 안에 있는 적이든 적을 대할 때는 인정사정없이 다뤄야 한다는 걸 모르는가? 아니면 늙은 절름발이 영감에게 돌아가고 싶은 건가?”
마차 앞에 서 있는 젊은 공자가 자신의 말은 무시한 채 부하들하고만 이야기하자 우두머리 소년은 자존심이 상해 포월루에서 지시받았던 내용을 완전히 까먹고 말았다. 범한을 건들지 말라는 주의를 잊은 그가 저속한 말을 퍼부으며 범한의 목을 향해 말채찍을 휘둘렀다. 두 사람이 멀리 떨어져 있어 말채찍으로 범한의 목을 감기는 무리였지만 그래도 충분히 위협적인 상황이었다.
범한이 눈을 치켜뜨고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말채찍을 바라보더니 조용히 왼손을 치켜들었다.
“억!” 하는 비명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우두머리 소년이 들고 있던 말채찍을 바닥에 떨어뜨린 채 자신의 손을 부여잡으며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검은색 쇠뇌의 화살이 귀신처럼 날아와 소년의 손바닥을 관통한 것이다. 우두머리 소년의 손바닥이 움직이는 자리마다 붉은 핏방울이 떨어지자 주위 소년들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지금 쇠뇌의 화살을 쏜 거야? 우리의 신분을 모르는 건가.’
소년들은 매일 잔악무도한 짓을 저지르다 보니 생명에 대한 경각심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편이 치명적인 무기에 공격당하자 순간 머리가 쭈뼛 서면서 겁이 났다.
이때 모두의 시선이 괴이한 눈빛을 뿜어내는 범한에게로 향했다.
“대인!”
순간 제사 대인이 화를 못 참고 소년들을 모두 죽어 버릴까 봐 겁이 난 등자월이 소리쳤다. 만약 그런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면 폐하는 경국 조정과 군대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제사 대인을 더는 총애할 수 없을 것이다.
범한이 천천히 왼손을 내리더니 방아쇠를 잡고 있던 손가락을 풀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주위 소년들의 얼굴을 바라봤다. 눈앞에 있는 소년들은 정말이지 앳된 얼굴이었고 가장 어린아이는 고작 열 살 정도로 보였다. 앳된 얼굴에 흉악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그래도 아이들인 건 변하지 않았다.
이렇게 소년들을 대면하니 계년조 조직원들이 소극적으로 반응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 범한은 깊이 숨을 들이켜며 마음속에 솟아오르는 분노를 애써 억누르고는 소년들을 향해 말했다.
“길을 막는 자는 죽는다. 마차에 깔려 죽고 싶지 않으면 모두 비켜라.”
무시무시한 검은색 쇠뇌의 화살에 놀라 겁먹은 소년들은 상황이 다시 잠잠해지자 흉포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쇠뇌의 화살을 맞은 우두머리 소년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울부짖었다.
“뭘 기다리는 거야? 저놈을 당장 죽어! 전부 죽여서 창산에 파묻어 버릴 거야!”
“너, 사람 죽여 본 적 있어?”
그 말에 범한이 고개를 돌려 우두머리 소년에게 물었다. 그러자 소년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날카롭게 소리쳤다.
“너 같은 잡놈은 매일 한 명씩 죽인다!”
두 사람이 대화를 벌이는 사이에 소년들은 이미 피에 굶주린 늑대처럼 달려들고 있었다. 부하들이 칼을 빼고 맞서려 하자 범한이 손을 저지한 뒤 앞으로 나갔다.
범한이 순식간에 오른손을 뻗어 칼을 들고 마주 오는 소년의 손목을 움켜잡자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년이 비명을 지르며 손목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범한은 멈추지 않고 몸을 옆으로 돌려 뒷걸음질 치며 다른 소년의 가슴팍에 파고들더니 교묘하게 상대방의 팔을 잡고는 자신의 어깨를 지렛대 삼아 손가락을 내리눌렀다. 그러자 서걱,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소년의 팔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아름다운 자세로 돌려차기를 하는 범한의 얼굴은 무섭기 그지없었다. 발은 정확하게 사악한 표정을 지으며 달려오는 소년의 허리에 꽂혔다. 피를 뿜으며 날아가는 소년의 모습을 보니 최소한 몇 달은 집에서 누워 지내야 할 것 같았다.
이후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며 왼손으로 달려드는 소년의 목덜미를 내리치자 상대방은 찍소리도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범한의 모습은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우아하면서도 야수처럼 위협적이었다. 포악무도한 소년들 사이를 종횡무진 움직이며 손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사람이 한 명씩 쓰러졌고, 거리에는 뼈가 부러지고 살 찢기는 소리와 앓는 소리만 들렸다.
소년들의 후안무치한 호통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자 거리에는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엄습했다. 쓰러지는 사람이 갈수록 많아지자 가장 외곽에 있던 소년들은 슬그머니 도망치기 시작했다.
등자월을 포함한 계년조 조직원들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바닥에 드러누운 소년들을 바라보더니 경외심 가득한 눈빛으로 범한을 우러러봤다. 비록 이들도 소년들을 격퇴할 수는 있었지만 범한만큼 깔끔하고 정확하게 처리할 수는 없었다. 범한은 단 일격에 생명에는 지장 없으면서도 일어나지는 못할 만큼의 중상을 입힌 것이다.
마차 안에 있는 사천립은 상황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아 눈을 가리고 연신 고개만 저었다. 반면 아랫입술을 깨물고 초조한 마음으로 범한을 지켜보던 상문은 속으로 기쁨의 환호를 질렀다. 그녀는 소년들이 무슨 일을 저지르고 다니는지, 경도 백성들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알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것 같은 잠깐의 시간 동안 도망치던 소년들도 범한의 손에 뼈가 부러져 땅에 쓰러졌다. 사방팔방에서 고통에 겨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범한은 자신의 발아래 있는 잘린 팔을 들어 방금까지 움직였던 손목을 만져 보더니 어렸을 때 비개에게 인체 구조를 배웠던 게 아주 쓸모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몸을 돌려 등자월에게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에 이런 상황이 생기거든 내가 나서게 하지 말게. 정말 민망스러우니까.”
그러고는 우두머리 소년 앞으로 걸어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 집안 자제인가?”
우두머리 소년은 쇠뇌의 화살에 맞고 범한의 무서운 실력을 봤으면서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소리쳤다.
“용기가 있으면 나를 죽여라! 그러지 않으면 네 집이 멸문지화를 당할 테니!”
범한이 웃으며 손가락을 펴서 흔들었다.
“첫째, 나는 너를 죽이지 않을 거야. 둘째 멸문지화를 당한다는 말은 함부로 꺼내는 게 아니야. 그런 말은 폐하만이 할 수 있는 거니까. 만약 다음에 또 그런 말을 지껄인다면 너희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으니 주의하도록 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소년을 보자 묻고 싶은 생각이 사라진 범한은 손을 흔들어 마부에게 마차를 몰라고 지시했다.
이때 횃불을 들고 구경꾼처럼 지켜보고 있던 종들이 휘청거리며 걸어오더니 허둥지둥 자신이 모시는 주인을 찾기 시작했다.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자 종들이 서슬 퍼런 눈으로 아무런 표식도 없는 마차를 바라봤다.
범한 일행은 이미 마차에 올라 있었고 상처를 입은 두 명의 부하들도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범한이 두 눈을 감고 앉자 마차 안에 타고 있던 다른 사람은 감히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서로 눈치만 보고 있을 때 범한이 갑자기 두 눈을 뜨더니 말했다.
“좀 이상하군, 기녀 한 명을 되찾아 오자고 국공 자제들을 동원하다니.”
등자월이 물었다.
“국공 자제들을 다치게 했으니 대인의 신분이 발각될 걸 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일이 대인과 관련 있다는 걸 알아채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범한이 그를 힐끗 보았다.
“그것보다 배후에 누가 있느냐가 더 중요하네.”
등자월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범한이 미소를 지었다.
“내일…… 포월루에 가서 은전 1만 냥을 되찾아 오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