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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272화 (272/1,108)

272화

지금까지 포월루는 위협한 적은 있었어도 위협받은 적은 없었다.

범한과 힘겨루기를 하는 미녀의 성은 석(石), 이름은 청아(淸兒)로 원몽이 키운 심복이었다. 사실 그녀는 오늘 밤 사건을 조사하러 온 젊은 관차 중 진 공자란 사람의 기개가 예사롭지 않고 무술 실력도 탁월해 다루기가 쉽지 않다는 보고를 받고 잘 타협하러 온 것이었다. 타협하려는 이유는 9월부터 사장이 계속해서 포월루에 소란이 생기지 않게 하라고 주의를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달리 상대방은 타협하려 하기는커녕 오히려 적나라하게 위협해 왔다.

순간 발끈한 석청아가 범한을 노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오늘 밤 일을 후회하게 될 겁니다.”

범한이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날 위협할 생각은 하지 말고 얼른 계약서가 가지고 오게. 기분이 좋지 않아 집으로 돌아가야겠으니.”

범한의 미소를 본 사천립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스승이 기분이 좋지 않으면 항상 엄청난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속으로 며칠 뒤면 포월루도 문을 닫게 될 거라 생각했다. 다만 범한이 누구인지 모르는 석청아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으며 부하에게 일을 진행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얼마 뒤 얇은 종이 한 장이 탁자에 놓였다.

“지금 은전 1만 냥을 주시면 사람을 드리겠습니다.”

석청아가 범한의 두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경국 법률에 몸값을 받고 기생을 양민이 되게 하는 속량(贖良) 조항이 있지만…… 사겠다는 말만 믿고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만약 지금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게 팔 수도 있습니다.”

범한은 겉으로는 태연한 척한 채 속으로는 상대방을 비웃었다.

“은전 1만 냥을 주고 사 갈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 내가 지금 돈을 지불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사 갔다고 핑계를 대고 주지 않으려는 거겠지.”

사천립이 붓을 들고 계약서를 쓴 뒤 상문의 인신 문서를 옆에 함께 놓고는 범한이 돈을 꺼내길 기다렸다. 사실 범한의 재정 능력이라면 1만 냥은 문제가 아니었다.

석청아도 범한을 빤히 바라봤다. 그녀는 지금까지 강남의 소금 상인부터 황실 상인까지 수도 없이 많은 부자를 만나 봤다. 하지만 고관에게 줄 선물을 준비할 때와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평상시에 은전 1만 냥에 해당하는 은표를 소매에 넣고 다니는 경우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젊은 공자에게 1만 냥의 은표가 없을 거라 확신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듯한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범한은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사천립이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짓자 석청아의 입가에 거만한 미소가 번졌다.

범한이 멋쩍은 미소를 짓더니 손가락을 까딱이며 줄곧 옆에서 가만히 서 있던 등자월을 불렀다.

등자월이 허리를 숙이고 물었다.

“진 공자, 분부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범한이 낮게 욕을 하며 말했다.

“바보인 척하는 겐가? 나한테 그렇게 많은 돈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빨리 빌려주게.”

등자월이 정색하며 범한을 바라봤다. 자신에게 은표 수 만 냥이 있다는 걸 제사 대인이 어떻게 알아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재빨리 품 안에 손을 넣더니 한참 뒤에 속옷 안에서 꽉 묶인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무언가로 안이 가득 차 있는 소박한 주머니였다.

방 안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등자월이 주머니 안에서 은표 한 묶음을 꺼내는 모습을 지켜봤다.

등자월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탁자에 은표를 놓고 세고 또 세더니 마지못해 열 장을 석청아에게 건네줬다.

멍하니 손에 들린 은표 1만 냥을 바라보던 석청아가 화들짝 놀라며 입을 쩍 벌렸다. 너무 놀라서 비명조차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귀족이나 부잣집 자제일 거라 짐작은 했지만 같이 온 수행원이 은전 1만 냥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손에 들린 은표를 한 번 보고 범한의 평온한 얼굴을 한 번 보던 석청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디서 온 신선이길래 돈이 이렇게나 많은 거지?’

한편 범한은 상대방이 눈치채지 못하게 뒤에 잠들어 있는 연아 낭자를 만져 보고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경부를 몇 차례 쓸어내렸다. 희롱하는 듯한 범한의 손짓에 연아 낭자가 깨어나더니 손으로 입을 가리고 크게 하품을 했다. 상당히 잘 잔 듯 보였다.

“가지.”

범한이 온화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제일 먼저 건물 밖으로 나갔다. 등자월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습격자를 업고 따라나서자 사천립도 너무 놀라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문 낭자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

머지않아 정체불명의 일행이 호숫가에 밝혀진 등불을 따라 사라졌다.

은표가 구겨질 정도로 손을 꽉 쥐던 석청아는 거액의 은전을 잃을 수는 없기에 조심히 품속에 넣었다. 그러고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내가 지켜볼 거야!”

포월루에는 신비한 사장이 두 명 있었는데 그중에서 작은 사장 쪽에 있는 석청아는 무서운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한편 인상을 구기며 일어나던 연아는 어지러움에 휘청이더니 방 안의 상황을 보고는 속으로 자신이 단순히 잠든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다정하게 웃던 진 공자는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바로 그때 석청아가 그녀의 뺨을 사정없이 갈기려 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음에도 연아는 재빨리 몸을 피하고는 석청아를 향해 물었다.

“왜 저를 때리려는 거예요?”

석청아가 이를 갈며 소리쳤다.

“이 쓸모없는 계집아! 정보를 알아내라고 보냈더니 잠이나 퍼질러 자고 있어!”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상황을 파악하던 연아가 냉소를 지었다.

“언니도 다를 것 없잖아요. 어떻게 상문 언니를 데리고 가게 둘 수 있어요? 이 일을 원몽 언니가 알면 뭐라고 하시겠어요?”

“흥!”

석청아가 연아의 농염한 얼굴을 경멸하는 눈빛으로 노려봤다.

“큰 사장의 총애를 믿고 네가 이렇게 오만방자하게 구는 거지? 포월루가 영업을 계속하려면 손님과 충돌하는 상황이 일어나서는 안 돼.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해결 방법이 생기게 되니까.”

두 사람은 포월루에서 가장 인기 있는 만큼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를 인정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부하들은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두려움에 급히 뒤로 물러났다.

잠시 뒤 연아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잊지 마세요. 큰 사장께서 요 몇 개월 동안 분수에 맞게 행동하는 법을 가르쳐 준 덕분에 잔악무도한 짓을 저지르는 횟수가 줄었잖아요.”

“잔악무도한 짓?”

석청아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차갑게 웃었다.

“경도에서는 우리가 곧 법이야.”

연아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일부러 의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응? 오늘 온 사람들은 13 관아에서도 대단한 사람들 같던데.”

“13 관아는 무슨!”

콧방귀를 뀌는 석청아의 눈은 살기가 가득했다.

“경도 전체를 통틀어서 1만 냥의 은표를 지니고 다닐 인물은 몇 사람 없어. 형부 바닥에 깔린 청석부터 부지깽이들까지 모두 긁어모아도 절대 낼 수 없는 돈이야. 내가 보기에 그 사람은 어느 왕후 집안의 세자가 아닌가 싶어.”

진 공자의 신분이 그렇게까지 높을 거라 예상하지 못한 연아가 어벙한 표정을 지으며 공자의 ‘손짓’을 떠올렸다.

연아의 미간에 드러난 교태를 본 석청아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야, 이 계집애야! 아무 데서나 교태 부리지 마. 큰 사장께서 싫어하시니까.”

석청아의 경고에도 무섭지 않은지 연아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큰 사장께서 오늘 언니가 손님을 모시라고 나를 보낸 사실을 알면 화를 낼 거란 생각은 안 드나 봐요?”

석청아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응수했다.

“네가 모셨던 그 진 공자란 사람이 시체로 발견되면 상관없지 않겠어?”

그 말에 놀란 연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말했다.

“또 사람을 죽이려는 거예요?”

“포월루에 망신을 준 놈을 편히 살게 둘 수는 없잖아.”

석청아가 냉혹하면서도 거만한 눈빛으로 연아를 바라보았다.

“다만 그의 신분을 고려해서 당분간은 죽이지 않고 내버려 둘 거야. 하지만 상문이란 기생 년은 반드시 죽여야 해. 그러고 보면 놈들도 운이 나빠. 오늘 마침 작은 사장님 패거리들이 여기서 놀고 있었거든.”

그 말을 들은 연아는 ‘진 공자’ 일행은 이제 죽은 목숨이라 생각했다. 비록 작은 사장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지만 작은 사장 패거리들이 경도에서 가장 난폭하고 거칠다는 건 알고 있었다. 물론 왕후 집안사람인 진 공자는 오늘 밤에 건들지는 않겠지만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할 터였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연아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제멋대로 굴다가 조정에서 조사라도 시작하면 우리도 살아남을 수 없을 거예요.”

석청아는 연아가 소심하게 구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힐끔 째려보았다.

“가장 잘나가는 대인이 뒤를 봐주고 있는데 황궁에서 말이 나온들 누가 포월루를 건들 수 있겠어?”

* * *

포월루에서 나온 상문이 눈물을 흘리며 범한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그러자 범한이 쑥스러운지 따뜻한 말 몇 마디를 건네고는 재빨리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포월루 앞 큰 대로를 따라 나아갔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얼마 뒤 마차가 긴 거리 위에서 멈춰 섰다. 범한은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는 듯 담담한 표정으로 마차 커튼을 걷어 횃불을 들고 서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바라봤다.

거리를 막은 무리는 대략 열네다섯 살 정도로 보였는데 그중에는 간간이 어린 소년도 끼어 있었다. 모두 안색이 창백한 것이 건강하지 못한 생활 습관을 가진 듯했고 몸집이 크고 위풍당당한 것이 신분이 높은 것 같았다. 그들 멀리에는 주인을 따라온 종들을 보였는데 자기 주인들이 경도 거리에서 폭행을 일삼는 데 이골이 났는지 거리를 막고 있는데도 덤덤한 모습이었다.

“마차에 있는 사람은 얼른 내려 무릎을 꿇어라!”

우두머리로 보이는 소년이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마치 사람을 해치는 게 재미난 놀이라도 되는 듯 눈을 반짝이는 것이 당장이라도 살인을 할 듯한 분위기였다.

“포월루의 반응이 참 노골적이군.”

마차 안에 있는 범한이 감탄하며 말하고는 몸을 돌려 물었다.

“자월, 어디서 온 놈들인지 알고 있나?”

등자월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고민하다 대답했다.

“경도에서 가장 유명한 유협 소년단입니다. 못된 짓은 다 하고 다니는 놈들이지만 국공의 후손이라 감히 건들지 못합니다.”

“포월루는 이홍성과 관련이 있을뿐더러 국공 후손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군.”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거리 양측에 스쳐 지나가는 검은 그림자를 바라봤다. 암흑 속에 잠복해 있던 계년조 조직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걸 안 그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경국은 무력으로 천하를 얻은 나라인 만큼 태조를 따라 나라를 건립하는 데 일조했던 장군 중에서 국공 작위를 받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후 용상에 오른 황제는 그들이 세운 공을 봐서 국공 집안을 잘 대우해 주면서도 원로대신인 그들이 조정에 영향력을 뻗지 못하도록 경계했고, 그들의 자제들이 과거나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도록 암암리에 손을 썼다.

그래서 국공 가문의 3, 4대 자제 중에서 능력을 가진 인재는 극소수였고 대부분은 쓸모없는 망나니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열 몇 살 정도 되는 젊은 자제들은 집안이 부유하고 조정에서도 특별대우를 해주니 자연스레 향락에 빠지기 일쑤였다. 딱히 할 일도 없었기에 넘치는 혈기를 어쩌지 못해 남자를 기만하고 여자를 능욕하는 등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포악한 짓을 일삼았고, 조금이라도 심사가 뒤틀리면 칼을 뽑아 들고 잔악무도한 짓을 저지르면서도 뒷일은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자신들이 의협심을 품고 있다고 생각해 스스로 ‘유협 소년단’이라 부르며 경도 불량배들과 싸우고 다녔다. 하지만 범한의 눈에 그들은 그저 여자에게 상처를 주고 무고한 생명을 빼앗는 쓸모없는 귀족 자제들일 뿐이었다.

비록 범한은 저들과 나이가 별로 차이 나지 않았지만 훨씬 성숙했다. 거리 상황을 힐끗 본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하더니 커튼을 내렸다. 부하들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국공들은 직접 세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복잡한 인척 관계로 얽혀 있었다. 백작가도 유씨 국공 집안과 인척 관계인 만큼 범한이 직접 나서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 * *

“마차를 부숴 버리자!”

우두머리 소년이 크게 소리치며 앞으로 나가자 뒤에 있던 무리도 소리를 지르며 범한이 타고 있는 마차를 향해 돌격했다. 경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직도(直刀)를 사방으로 휘두르며 달려드는 게 피 냄새를 맡은 새끼 상어들 같았다.

그 광경을 본 상문은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한껏 웅크리고는 치마를 꽉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범한은 그런 그녀를 힐끗 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차 커튼을 살짝 걷은 뒤 말을 타고 마차로 돌진하는 소년들을 바라보며 경도 치안이 갈수록 안 좋아진다고 생각했다. 물론 경도 부윤은 2 황자 사람인 데다가 소년들이 민감한 신분인 만큼 관원들이 함부로 나설 수 없는 것도 이해는 갔다. 하지만 잔뜩 흥분한 소년들의 눈동자를 보니 파리를 씹은 것처럼 기분이 나빠졌다.

젊다 못해 앳된 그들의 눈동자에서 보이는 흥분 속에는 생명에 대한 경시와 천하거나 가난한 사람에 대한 경멸 그리고 피비린내를 좋아하는 변태적인 면모가 담겨 있었다.

이미 어릴 때 죽음이 뭔지 알게 된 범한은 타인의 생명을 뺏는 데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담담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살인하는 과정에 도취하지 않도록 주의했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생명을 아끼고 자신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기분이 상한 가장 큰 이유는 감찰원 제사인 자신이 공금을 가지고 기생집에서 놀려 하다가 길거리 한복판에서 불량배들과 싸움을 벌이게 된 사실이 너무나도 민망스럽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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