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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271화 (271/1,108)

271화

뒷짐 진 손에 풀과 진흙이 묻어 있자 범한은 상대가 건물 밖 잔디에 오랫동안 매복해 있었을 거라 짐작하며 뜻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도왕(刀王) 같은 족속이라 그런지 거칠기 그지없군.”

상문은 경도에서 비교적 유명한 가인이었기 때문에 좋아서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있는 편이었고, 그중 일부는 포월루와 대적할 능력이 없음에도 상문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보호하려 했다. 방금 범한에게 달려든 사람도 곡이 끝난 뒤에도 상문이 나오지 않자 조급한 마음에 창틈으로 안을 보다가 범한이 부축하려는 걸 희롱하는 거라 오해해 방으로 뛰쳐 들어온 거였다.

상황을 파악한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뒷짐을 지고 밖으로 나왔다. 소란을 피우는 소리에 등자월이 잽싸게 다가와 인상을 쓰며 그의 주변을 보호했고, 사천립은 여전히 술이 깨지 않은 듯 보였다. 범한이 몸을 옆으로 돌려 자신이 직접 뽑은 계년조의 두 번째 조장을 보며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는 등자월의 반응 속도도 만족스러웠지만 자신이 방금 한 일격이 더 만족스러웠다.

가벼운 일격을 통해 그는 비로소 자신이 담주, 경도, 창산에서 꾸준히 수련하고 북제 사신으로 건너가 여러 일을 조우하면서 상당히 성장했다는 걸 깨달았다. 사신으로 임무를 수행하면서 견뎌야 했던 압박감과 소은과의 결투, 연산 암석 절벽에서 치른 목숨을 건 사투 그리고 아무 뜻 없는 듯했지만 사실은 의도을 가지고 만났던 해당타타와의 만남 덕분에 그동안 수행해 왔던 이름 없는 공결이 마침내 경맥과 융합되었고 이로써 무술 실력이 상당히 향상된 것이다.

만일 예전 같았다면 일격에 상대방의 오른쪽 어깨를 산산조각 낼 수는 있었겠지만 지금처럼 멀리 날려 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순간 감격스러워진 범한은 해당타타와 이미 고인이 된 소은이 고마워졌다. 물론 가장 고마운 사람은 자신에게 이런 좋은 기회를 준 절름발이 노인이었다.

한편 자기 사람이라서 그런지 오죽에게는 고마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호수 표면은 계속 일렁였지만 밤이 어두워 호숫가에 불빛을 비춰 본들 피가 뿜어 나오는지 알 수 없었고 남자의 생사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때 호숫가 주변이 순식간에 왁자지껄해지더니 포월루 졸개들이 우르르 호숫가로 달려가 남자를 그물로 건져 냈다. 그리고 동시에 아름다운 미모의 중년 부인이 치맛자락을 흔들며 달려왔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부인이 헐레벌떡 범한 앞으로 달려오더니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주변을 통솔하지 못해 진 공자를 놀라게 했으니 저는 죽어 마땅합니다.”

놀란 표정에 떨리는 목소리로 사과하면서도 부인의 눈빛은 서늘할 정도로 차갑고 매서웠다.

부인의 눈에 드러난 차가운 눈빛을 본 범한은 포월루 사람들이 일부러 소란에도 늦게 나오고, 중년 사내가 방에 쳐들어가는 것도 막지 않았다는 걸 알아챘다. 이건 분명 범한의 신분을 의심하던 중에 도청 구멍까지 막아 버리자 정체를 알기 위해 벌인 짓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범한을 13 관아의 사람일 거라 짐작할 뿐 진짜 신분을 알아내지는 못했다. 만일 알았다면 이렇게 간단하게 그를 맞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기절한 중년 남자를 질질 끌고 가자 그가 지난 자리 풀들이 젖어 누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부인이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 공자가 농담을 좋아하시는 건 알았지만 놀라운 무술 실력을 가지고 계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노골적인 말투에 범한이 그녀를 힐끗 보고는 대답하기 귀찮다는 듯이 안으로 곧장 걸어 들어갔다. 대문과 방문이 모두 부서진 터라 포월루 안을 감싸고 있던 따뜻한 공기가 모두 빠져 안이 또렷하게 보였다.

부인이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범한의 행동을 바라봤다. 범한 일행을 형부 13 관아에서 살인 사건을 조사하러 나온 고수들이라고만 생각한 그녀는 포월루에서 가장 인기 좋은 연아를 보내 정보를 알아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고수가 방에 있는 도청 장치를 간파해 내고 상문도 방에서 나오지 않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하는 걱정에 중년 남자가 방에 쳐들어가 공격하는 걸 내버려 둔 것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호리호리하게 생긴 ‘진 공자’는 일격에 남자를 날려 버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나왔다. 상문과 어떤 말을 했는지, 무슨 흥정이 오갔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범한이 자신을 본체만체하며 들어가자 부인은 애가 달아 입술을 깨물었다. 잠깐 고민하던 부인이 얼굴 가득 미소 지었다.

“포월루에서 경호를 제대로 하지 못해 손님을 놀라게 해드렸으니 오늘 밤 비용은 저희 쪽에서 부담하겠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렇게 하고, 이만 나가 보게.”

범한의 냉담한 말에 조급해진 부인이 미소를 지었다.

“공자께서는 어찌 저희의 성의를 거절하려 하십니까?”

범한 일행을 13 관아 사람이라고 확신한 부인의 목소리가 점차 노골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범한은 상대가 자신과 협상할 자격이 없기에 자신의 신분을 오해해 뭐라 말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고개를 비스듬히 뒤로 젖히며 주변을 흘겨보던 그가 넌지시 말했다.

“주인장께서는 여자와 놀기만 할 뿐 손님을 대접하지는 않나 보군.”

부인은 그 말에 약간 서늘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진 공자가 누구인지는 알아채지 못했다.

“문이 부서졌으니 손님께서는 더 여기 있지 마시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시지요.”

범한은 웃는 듯 마는 듯 한 표정을 지으며 부인을 힐끗 보고는 침대로 걸어가 앉았다. 그 모습을 본 등자월이 차가운 말투로 설명했다.

“공자께서는 이동하고 싶어 하지 않으시니 병풍을 가져와 치도록 하게.”

‘문을 활짝 열어 두고 음란한 짓을 하겠다는 건가? 이건 또 무슨 악취미이지?’

등자월은 겉으로는 냉담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포월루 기생들이 감찰원 제사에게 노출증이 있다고 오해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난처해하고 있었다.

이때 상황을 감지한 사천립이 놀라 외투를 입고는 걸어 나왔고, 옷이 약간 헝클어진 젊은 기생들은 방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부인과 범한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한편 방 안을 한번 훑어보던 부인은 침대에 누워 자고 있는 연아를 보고는 알았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화난 척 이를 갈며 연아를 향해 소리쳤다.

“죽일 년! 이 중요한 때에 손님을 내팽개치고 잠이나 퍼질러 자고 있다니!”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밖을 향해 외쳤다.

“이리 와 저년을 끌고 가서 흠칫 패줘라!”

범한이 미간을 구기자 부인은 더욱 맹렬하게 소리쳤다.

“이런 년은 때려 죽여서 본때를 보여야 해!”

부인은 한바탕 소리치고는 범한을 힐끗 바라보았다.

‘이런데도 물러서지 않는다고?’

범한이 미간을 다시 찌푸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앞에서 사람을 때려 죽이겠다고 하니 마음이 좋지 않군. 하지만 여기 사람들은 부인의 사람인 만큼 때려 죽이는 것도 부인의 일이겠지. 다만 때려 죽이기 전에 용모가 빼어난 낭자를 새로 골라 보내 주길 바라네. 참고로 나는 풍만한 체형을 좋아해.”

담담한 말에는 사람을 찌를 듯한 한기가 느껴졌다.

‘저렇게 선량한 얼굴을 한 사람이 어떻게 자신과 몸을 나눴던 여자의 생사에 저리도 무심할 수가 있지?’

놀란 부인이 속으로 생각했다. 세상을 떠돌면서 사람을 보는 안목을 길러 온 부인은 자신이 여기서 연아를 때려 죽여도 저 냉혹한 공자는 미간 한번 찌푸리고 말리라는 걸 깨달았다.

‘13 관아에 저런 인물도 있었나?’

부인이 우두커니 서서 멍하니 생각했다.

그때 범한이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짓자 등자월이 차갑게 외쳤다.

“모두 나가시오!”

자신의 예상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자 부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서로 본모습을 드러내며 체면을 구길 수도 없는 데다가 경도에서 계속 장사를 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방에서 나가려 했다.

부인과 포월루 졸개들이 방을 나가려 하자 범한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 남자는 두고 가게.”

범한의 말투에서 관원의 위엄이 풍겨나자 부인이 고개를 돌려 쏘아붙였다.

“이 남자의 죄는 경도부에서 처벌할 사항입니다.”

그러자 범한이 냉혹한 미소를 지었다.

“경도부에서 하는 일을 형부 관아에서는 할 수 없다는 겐가?”

드디어 상대가 정체를 드러냈다고 생각한 부인은 자신이 주도권을 잡았다는 생각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녀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하인에게 명령하는 듯한 범한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상문을 원하네.”

포월루는 경도에서 영업한 지 몇 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막강한 세력을 뒤에 업고 있었다. 더구나 부인은 자신이 모시는 사장이 감찰원과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형부 관아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이에 범한이 무례한 요구를 하자 자신도 모르게 비꼬는 말투로 냉담하게 말했다.

“상 낭자는 몸값이 워낙 비싸서 공자께서, 아니 대인께서 계시는 13 관아가 돈이 없는 곳은 아니지만 형부에서 그만한 돈을 낼 수 있는 사람은 상서나 시랑 정도일 겁니다. 실례지만 대인의 직위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범한이 눈꼬리를 치켜세우며 대답했다.

“나는 상문이 부르는 노래만 좋아하네. 그러기 위해서라면 몇백 냥이든 지불할 의향이 있네.”

상문은 오늘 반드시 이곳에서 나와야 했다. 범한과 상문이 방에서 대화를 나눴다는 걸 상대측이 알고 있는 상황에서 상문을 여기에 놓고 간다면 내일 호수 아래서 시체로 발견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범한의 말에 부인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냉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공자께서는 관원의 권한을 이용해 이곳을 압박하려 하실 뿐 경도 호수가 얼마나 깊은지는 모르시는 것 같군요.”

“허튼소리 하지 말게.”

자신이 나서야 할 순간이라는 걸 안 사천립이 입을 열었다.

“상문은 기생이지 군영에 배치된 기생이 아니라서 경도 법률에 따라 누구든지 돈을 내고 기적에서 빼내 줄 수 있네. 그런데도 포월루에서는 어찌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가? 우리가 은전 몇백 냥도 못 낼 사람으로 보여 무시하는 건가?”

‘겨우 은전 몇백 냥에 상문을 데려가겠다는 건가?’

부인은 화가 부글부글 끓었다. 정말로 상문을 데려가려 한다면 최소한 은전 2천 냥은 내야 했다. 그런데 겨우 몇백 냥을 내고 데리고 가겠다니 어이없는 금액에 기가 막힌 그녀가 냉정함을 잃고 소리쳤다.

“만약 손님께서 은전 1만 냥을 내신다면 당장 상문을 데려가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저 남자도 덤으로 드리지요!”

은전 1만 냥은 저택 십여 채를 살 수 있는 금액으로 일반 백성이라면 몇 대가 먹고살 수 있었고, 천하에 내로라하는 부자들도 눈이 튀어나올 만한 액수였다.

부인이 냉소를 지으며 범한 일행을 바라봤다. 노래는 잘 부르지만 외모가 평범한 상문을 1만 냥이나 주고 데려갈 사람은 없었다.

반면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던 범한은 말을 바꿀 틈을 주지 않고 잽싸게 상황을 정리했다.

“금액이 정해졌으니 얼른 계약을 체결하도록 하지.”

그 말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심지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남자 옆을 지키고 있던 상문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부인도 너무 놀라 나무처럼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짝! 바로 그때 갑자기 찰진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디선가 나타난 미인이 부인의 뺨을 사정없이 때리고는 범한 일행을 향해 두 손을 모아 절했다.

“진 공자가 농담을 잘하신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범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낯선 미녀를 바라봤다. 버드나무 잎처럼 긴 속눈썹에 붉은 입술 그리고 교태가 가득한 눈동자와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입술까지 아름다운 얼굴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불쾌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미인은 겉으로는 유약해 보이면서도 은은하게 거만한 분위기를 풍기며 범한 일행을 깔보고 있었다. 이렇게 도도한 태도를 보이는 걸 보면 원몽의 심복이 틀림없었다.

“농담한 게 아니네.”

범한이 미소를 거두고 정색했다.

“설마 1만 냥에 팔겠다는 말을 번복하려는 겐가?”

미녀가 한동안 차갑게 범한을 쏘아 보다가 말했다.

“보상하는 의미로 포월루에서 은전 천 냥을 드릴 테니 없던 일로 하시지요.”

은전 천 냥을 주겠다고 말하면서도 양미간에서 드러나는 거만함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에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 재미있는 밤을 보냈는데 보상할 게 뭐가 있겠는가? 내가 상문과 저 사내를 데려가고 싶다는데 팔 생각이 없는 겐가?”

범한이 채신머리없이 노골적으로 말하자 미녀가 조롱하는 말투로 대답했다.

“정말 1만 냥을 낼 수 있으십니까?”

본래의 목적은 사라지고 상황은 어느덧 자존심 싸움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이제는 상문을 팔지 말지, 포월루의 사건을 조사할지 말지는 중요하지 않게 되고, 은전 1만 냥을 낼 수 있느냐 없느냐에 초점이 맞춰졌다. 사실 포월루는 상문을 절대 놓아줘서는 안 되는 입장이었지만 미녀는 은전 1만 냥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고 확신하여 범한을 떠본 것이었다.

범한이 아무 말 없이 정수리를 긁자 옆에 있던 사천립이 웃었다.

“그건 낭자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네.”

세 사람을 바라보던 미녀가 그 말에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저희 포월루의 체면을 깎으시려는 것 같은데…… 대인 세 분께 알려드리자면 오늘 상문을 사 가셔도 내일이면 다시 돌려보내셔야 할 겁니다.”

위협하려는 의도가 농후한 말이었지만 범한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가 웃으며 가벼운 목소리로 응수했다.

“자네야말로 오늘 밤에 받은 은전 1만 냥을 내일 순순히 돌려줘야 할 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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