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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269화 (269/1,108)

269화

포월루는 아주 교묘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주루 아래쪽을 돌아 나가면 곧장 호수가 나왔고, 다정하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릴 듯 말 듯 전해져 오는 정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정원은 돌을 깔아 만든 풀 사이로 난 몇 가닥의 길과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방해하지도, 간섭하지도 않도록 분리되어 있었다.

세 사람은 안내인의 인도를 따라 어느 정원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건물 쪽과는 달랐다. 정원으로 들어서자마자 여러 명의 아름다운 여인들이 그들을 맞았다. 여인들은 세 사람에게 바짝 붙은 채로 얇은 사를 들고 하늘하늘 춤추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들의 행동은 마치 귀가해 들어오는 상공을 맞는 듯 매우 자연스러웠다.

실내는 따뜻했다. 한쪽 구석에 놓인 난로 상자가 이 초가을에 봄과 같은 따스함을 억지로 불어 넣고 있었다. 한 귀퉁이에 있는 나무 상 위에는 조화가 놓여 있었다. 꽃잎을 모두 수를 놓아 만들었는데 정교하고 특이하니 매우 아름다웠다.

향내가 코를 확 덮쳐 오자 범한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사천립을 바라보았다. 사천립은 풍만한 여인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범한이 말했다.

“마음 편히 먹게나. 호랑이 같은 아내도 없지 않은가.”

범한이 외투로 입은 도포를 벗자 옆에 있는 기생들이 냉큼 받아 들고는 나긋하게 말했다.

“어르신, 이미 음주를 하셨군요. 그렇다면 곡이나 연주해 드릴까요? 아니면······ 술을 더 올릴까요?”

범한이 부드럽고 긴 의자에 앉으며 손을 내저었다.

“의자나 좀 더 놓거라. 노래와 곡도 듣고 싶구나. 그리고 이리 와서 좀 주물러 다오.”

범한을 시중드는 여인이 기쁜 기색으로 감격하며 말했다.

“어르신께서는 정말 배려심이 많으시군요.”

그녀는 서둘러 옷부터 정리했다. 그러는 사이 어린 여종이 차를 따라 조심스레 세 사람 앞에 놓았다. 이어 경도에서 보기 힘든 신선한 과일을 한 접시 내왔다. 그사이 기생은 의자 위에 한쪽 다리만 올려 무릎을 꿇고는 범한의 양어깨를 딱 알맞은 강도로 부드럽게 주물렀다.

범한은 돈을 더 쓸수록 자신을 시중드는 여인들도 더 잘해 준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에 어깨에 전해지는 힘을 느끼며 이곳 포월루의 접대 수준이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사이 옆에 있는 사립천은 머뭇거리며 불안해하고 있었고, 등자월은 엄숙한 표정으로 아직도 기풍 바로잡기 운동을 실천 중이었다. 범한은 이 둘의 모습을 바라보다 자기도 모르게 ‘못난 놈들!’이라며 속으로 흉을 보았다. 누가 봐도 이 두 병아리는 지금 감찰원과 자신의 체면을 구기고 있었다.

뒤에서 어깨를 주무르던 여인이 갈수록 몸을 굽히더니 어느새 그녀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몸이 범한의 등에 바짝 붙었다. 범한은 순간 이 여인의 이름조차 묻지 않았다는 게 그리고 용모조차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다는 게 생각났다. 어찌 된 일인지 몰라도 범한은 그 순간 자신의 무정하고 냉정함에 놀라고 말았다. 이에 잠시 가만히 있다가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지?”

“연아이옵니다.”

여인은 정말로 머리가 잘 돌아갔다. 향기 나는 양 소매를 범한의 가슴팍에 얹으며 자신의 풍만한 가슴을 범한의 등에 대고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리고 대답을 할 때는 범한의 귓가에 매우 부드러운 음성이 울리도록 살짝 따스한 바람을 귓구멍에 불어 넣으며 말했다.

범한은 저도 모르게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분위기가 확 깨지게 귓구멍을 긁었다.

“간지럽구나!”

범한은 그녀가 당연히 가명을 사용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궁금했던 건 따로 있었다. 조금 전 슬쩍 보았을 때 짙은 화장을 하고 있기는 했어도 미인형인 건 확실해 보였다. 그러니 이 정도 미색이면 포월루에서 평범한 외모 축에 속하는 건지, 그리고 자신 같은 ‘무명소졸’이 와도 아무렇게나 불러내 어울릴 수 있는 등급의 여인인지 범한은 궁금할 따름이었다.

실내의 봄기운이 조금 지겨워질 무렵 노래를 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기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범한은 그 낭자를 보는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설마 저 여인도 포월루에 납치되어 온 거야?’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러 들어온 여인은 상문이었다. 경도에서 유명한 소리꾼이었다. 예전에 범한이 자신의 권세와 지위를 이용해 만나 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범한이 그녀를 알고 있는 이유는 1년여 전에 경도 서쪽에 위치한 피서 산장으로 임완아, 범약약과 함께 피서를 갔을 때였다. 이 상문이란 낭자는 임완아의 요청으로 산장에서 잠시 짧은 곡조를 부른 적이 있었다.

맑고 시원한 바람이 호숫가에서 불어올 때였다. 범한 옆에는 임완아, 범약약, 섭령아, 이 세 아가씨가 함께 앉아 있었고 그에게는 환생한 후 가장 미묘한 시간이었다. 게다가 이 상문 낭자가 ‘흰 비단 소매와 명주 치마가 서로 만나네’라는 구절을 읊을 때 문득 경묘에서 임완아와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그래서 범한에게 상문 낭자는 유달리 인상이 깊게 남아 있었다.

상문은 방으로 들어서자 살며시 인사를 한 후 무표정하게 방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비파와 비슷하게 생긴 악기를 받쳐 들고는 청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님들, 듣고 싶은 곡조가 있으신가요?”

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상문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그녀에게 시를 써준 일을 기억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작년 여름, 범한은 피서 산장에서 전생의 명나라 때 극작가 탕현조의 글을 베껴서 준 적이 있었다. 상문은 그 글을 노래로 만들어 경도에서 이름을 더 드날리게 되었다. 하지만 범한의 신신당부로 그녀는 진짜 작가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절계령(折桂令)>을 불러 보거라.”

범한은 연아의 부드러운 가슴에 몸을 반쯤 묻고 두 눈을 살며시 감았다. 그리고 가장 흔히 들을 수 있는 곡조 중 하나를 대충 말했다. 한편 속으로는 상문 정도의 유명 소리꾼이 어찌 포월루 같은 곳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저 정도 되는 이를 그냥 내보낼 수 있는지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 연아라는 기생에게서도 저속한 느낌이 없는 걸 보아, 설마 포월주 주인한테 자기 신분이 들통 난 건 아닐까 의심마저 들었다.

딩당, 시원한 소리가 두 번 울리자 범한은 잔뜩 의심에 차 있던 상태에서 벗어나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그냥 있어도 괜찮지.’라고 생각했다. 포월루에서 자신의 신분을 알아채고 몰래 잘 보이려 하는 거라면 자신도 굳이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마음을 편히 먹었다. 제사가 한밤중에 소리꾼의 노래를 들으러 왔으니 도찰원 어사들에게 또 탄핵밖에 더 당하겠느냐는 생각을 하며 말이다.

상문은 눈썹이 가늘고 완만한 곡을 이루고 있었지만 연약한 느낌은 아니었다. 입술연지도 바르지 않아 담백한 느낌이었다. 예쁜 이목구비를 지니기는 했지만 안타깝게도 양 볼이 조금 넓어 얼굴이 커 보였다. 입술 또한 일반적 미인 기준보다 조금 크고 두꺼웠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현을 튕기고 입술을 사뿐히 열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왜 이리 넓은 치마를 둘렀을까! 그건 옥 같은 피부가 줄어들고 향내 나는 허리가 가늘어졌기 때문이라오. 밥을 봐도 한술 뜨기 싫고, 잠자리에서도 전 뒤집듯 몸을 뒤척여 대고, 호흡도 가느다란 아지랑이처럼 쉬어 대지 않았겠소.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이 한목숨 걸겠건만 이내 마음은 죽어도 말로 전하기가 참으로 어렵더이다! 이리 오랫동안 홀로 애만 태우다니. 애당초 부부의 연을 맺었으니 행복한 삶을 누렸어야 하건만 결국에는 뼈에 사무치는 그리움뿐이라니.(작가 주석:원나라,교길(喬吉)의 <절계령> 중 <기원(寄遠)>.)

노랫소리는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특히나 ‘아지랑이처럼 쉬어 댄다’는 구절에서는 범한 뒤에 있던 연아의 호흡마저 무거워질 정도로 상문의 노랫가락은 사람의 감정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범한이 눈을 반쯤 감고 듣고 있는데 그의 입가에 어느새 술잔이 와 있었다. 연아가 술을 먹여 주려 하기에 범한은 눈을 뜨지 않고 그대로 받아 마셨다. 그러자 몸 주위가 따스해지고 사랑스럽고 편안한 기분이 드는 것이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의식이 흐리멍덩한 가운데 이리 편안히 하룻밤을 보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포월루의 주인이 누구든 나중에 다시 조사해도 늦지 않다고 말이다.

노랫가락이 몇 구절 흐르지 않았을 때였다. 방 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 같아 범한이 천천히 눈을 뜨고 아무 감정도 없어 보이는 상문을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상문은 자신을 알아본 게 아니라 그냥 냉담하게 있는 중이었다. 어쩌면 포월루라는 공간 자체가 그녀에게는 어색해서일 수도 있었다.

이 <절계령>이란 곡조는 후반부에서 무엇을 묘사하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더군다나 일상적인 쉬운 용어로 되어 있어 어느 아낙의 마음이 매우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바로 먼 길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원망하고 증오하면서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마음 말이다.

그러니 간결한 가사와 음률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속에 담긴 뜻이 매우 훌륭해 상문에게는 아주 잘 어울리는 곡이었다. 한데 여기는 사람들이 기생들을 데리고 노는 곳. 그런 곳에서 그녀가 이런 노래를 부르는 건 분위기를 깨는 행동이었다.

그러니 범한이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자 연아는 원인 모를 두려움이 들어 서둘러 술부터 따랐다. 그리고 그 술잔을 범한의 입가에 대고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술을 권했다.

“진 공자님, 상문 언니는 경도에서 아주 유명한 소리꾼이랍니다. 평범한 공자님은 볼 수도 없는 유명한 사람이지요. 저기, 언니에게 분위기를 띄우는 것으로 몇 곡조 더 부르라고 할까요?”

포월루에서 제일 잘나가는 아가씨가 자신을 감싸 주자 상문의 애처로운 눈동자에 의외라는 듯한 감격이 어리었다. 그녀도 조금 전 자신의 노래가 지금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에 연아가 난처해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살며시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저······ 진 공자님, 모두 상문의 잘못입니다.”

그러자 범한은 콧방귀만 뀌고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방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 범한의 기분을 살피고 있었다. 사천립과 등자월은 대인이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건지 이해를 못 하고 있었다. 한데 범한이 돌연 미소를 지었다.

“경도에는 인물이 많다더니 역시 강남과는 다르군. 세상에서 제일 좋은 곳이니 이런 짧은 노랫가락에서조차도 좋은 일을 하라 권한단 말이지.”

범한의 농담에 여인들은 한숨 돌렸다. 이어 연아가 서둘러 웃는 얼굴로 화답했다.

“공자님께서 좋은 일을 하러 가시면 이 소녀, 어찌 먹고살아야 하나이까?”

범한이 웃으며 연아의 다리를 토닥이다가 그녀의 길고 탄력 있는 허벅지를 손으로 문질렀다. 이렇게 재미를 본 범한이 연아에게 어깨는 그만 주무르고 옆에 앉아 함께 술이나 마시자고 했다.

상문도 정신을 차리고 살며시 웃었다. 그리고 다시 <절계령> 중 한 소절을 불렀다.

―나부산 꿈에서 진짜 선녀를 만났네. 양쪽으로 틀어 올린 머리에 사방으로 빛을 내는 머리 장식을 하였더라. 맑은 날 나부끼는 가는 버드나무, 봄날 가녀리게 뻗은 파, 가을날 동그스름한 연근 뿌리를 닮았구나. 술을 걸쳐 발그레한 얼굴에 부끄러움을 살짝 얹은 것이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달과 같아라. 존귀한 선녀에게 물었더니 달이 서쪽으로 간다던데, 오늘은 어느 해냐 묻더군.(작가 주석: 원나라,교길의 <절계령> 중 <증라진진(贈羅眞眞>)

노래가 끝나자 범한은 누구보다 먼저 진심을 담아 반응을 보였다.

“참으로 듣기 좋구나!”

이어 고개를 살짝 기울여 품속 아름다운 연아의 얼굴을 바라보고 웃었다.

“이 <절계령>은 연아를 위한 것이로구나. 봄날 가녀리게 뻗은 파 같고, 가을 연근처럼 동그란 얼굴하며······.”

범한의 손이 점잖지 못하게 연아의 손가락을 타고 곧장 소매 안으로 들어가 그녀의 팔을 조몰락거렸다. 이어 다른 손으로는 연아의 턱을 들고 감탄사를 늘어놓았다.

“참으로 미인이로다. 한데 살짝 취하기는 했으나 부끄러움에 찬 붉은 기는 안 보이는구나.”

범한이 고개를 돌려 아래쪽에 있는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기생을 품은 그의 눈에서는 정욕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사천립을 향해 범한이 농담을 던졌다.

“그 구절은 자네 이야기인가 봄세.”

범한이 농을 하자 방 안에 있던 여인들이 모두 입을 가리고 웃기 시작했다. 연아는 술 두 잔을 들고 달콤하게 웃으며 범한에게 술을 권했다. 범한과 건배하고 한 잔 들이켜니 연아에게는 황홀지경이 따로 없었다.

‘이렇게나 사람 마음을 잘 가지고 노는 공자님이 있었다니, 설마 원 언니가 말했던······ 바로 그 관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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