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연회가 파하고 유씨는 정왕의 첩들과 이야기를 나누러 뒤채로 갔다. 젊은이들은 술에서 깨기 위해 호숫가로 가 바람을 쐬었다. 범사철은 어느샌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정왕은 직접 가꾼 농원에서 범건 상서와 함께 대나무 의자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풀들을 바라보았다.
“범한이 최근에······ 너무 거칠어졌군. 자네가 좀 진정시켜야 할 것 같아.”
정왕의 두 눈은 말똥말똥했다. 범건 상서는 편안한 얼굴이었다. 연회 자리에서 보여 주었던 술주정뱅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범건이 가볍게 “네.”라고 대답하고는 다시 입을 뗐다.
“아이가 경도로 왔을 때 말씀드렸잖습니까. 제가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아이가 아니라고요.”
정왕이 싸늘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자네가 통제를 안 할 거라면 설마 그 절름발이한테 맡길 셈인가? 그 절름발이는 배 속 가득 썩은 물뿐이라 대체 무슨 짓거릴 하려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단 말이지.”
그러자 범건이 웃으며 말했다.
“절름발이는 원래 이 댁 출신 아닙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황제 폐하께서도 그리 신임하지 않으셨겠지요.”
정왕이 싸늘하게 웃었다.
“자네들 때문에 괴롭구먼. 어찌 되었든 그 일 이후로 나는 담담해졌다네.”
정왕이 눈을 감으며 말을 이어 갔다.
“범한 저 아이 말일세, 마음씨가 참 괜찮아. 황제 폐하께서 저 아이를 너무 심하게 쥐어짜시다가 나중에 수습이 안 될 것 같아 걱정이라네.”
그러자 범건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시지 않습니까. 이 일과 관련해 저에게는 발언권이 없다는 걸 말입니다.”
정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탄식했다.
“그냥 저 아이들끼리 놀도록 내버려 두세! 우리 형님께서 이런 연극을 좋아하시는 것 같으니 말일세.”
저 멀리 호숫가에서 마작을 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두 늙은이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범한이 정확히 봤다네. 둘째에게는 기회가 없는데 조정의 대다수 사람들은 왜 그걸 못 알아채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정왕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을 이어 갔다.
“내 아들놈은 나랑 달라 좀 걱정이야. 나처럼 그냥 콕 틀어박혀 있으려 하지를 않아.”
범건이 정왕을 잠시 바라보고는 말했다.
“홍성 세자와 2 황자마마는 너무 가까이 지내는 게 맞는 것 같군요.”
정왕이 싸늘하게 웃더니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했다.
“둘째는 공부를 너무 많이 한 게 문제 같아. 호래자식 같으니. 정신 나간 완아 어미와 같이 이런저런 일들을 했으니 어찌 사달이 나지 않겠는가? 그리고 내 아들놈도 바보고······. 저 호래자식!”
그러자 범건이 희미하게 웃었다.
“둘째분의 어머니를 폄훼하시다니요. 숙 귀비께서는 폐하의 여인이십니다. 그리고 세자의 어머님은······ 왕야의 여인이시니 그건 알아서 하십시오.”
그러자 정왕이 크게 웃으며 또 욕을 퍼부었다.
“홍성이 어미가 죽은 지 언제인데 그러나. 지금은 지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나저나 요 늙은 놈 보소. 이제야 입이 트여서 음란한 말을 좀 하는군그래. 옛날에는 기방에서 매일 기녀나 끼고 살아 놓고는 왜 그러는지. 이제는 그거 떼버리고 여자 된 줄 알았다지.”
정왕이 의자를 가볍게 두드리더니 익숙한 주변 경관을 둘러보다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
“이 저택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는가? 옛날에는 성왕부(誠王府)였지. 어렸을 때 우리 셋이 이 저택에서 함께 자라던 때가 생각나는군. 유모가 형님을 키운 후 또 나를 키우느라 정작 친아들은 제대로 돌보지 못했어. 그때 자네 정말 꼬질꼬질했는데.”
범건은 자신의 유년기를 떠올렸다. 그 당시 성왕은 바로 현 황제 폐하의 친부이셨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의 정왕보다도 못한 처지였고 권력도 야심도 없는, 그냥 별 볼 일 없는 왕야일 뿐이었다. 범건이 아무리 명문가인 범씨 일족의 일개 방계였다 하더라도 어머니께서 왕가로 들어와 아이들을 돌보신 건, 지금 봐도 여전히 신분에 맞지 않는 일을 하신 거였다. 그러니 집안사람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냉대를 받고 모진 말을 들으셨을까.
“나중에 이렇게 될 줄 누가 상상인들 했겠습니까!”
범건이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제가 보기엔 어머니께서 담주에 계시기는 해도 자긍심을 가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리 대단한 분들을 키우셨으니 말이죠.”
“우리 셋이 싸우면 나랑 자네가 항상 편먹고 형님에게 맞서 싸웠었지. 그런데도 우리는 형님을 이기지 못했어.”
정왕이 갑자기 싸늘한 어투로 말을 이어 갔다.
“아이였는데도 형님은 정말 인정사정없으셨어. 그건 자네도 잘 알 거야.”
범건은 이에 대해서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정왕은 자기 형 이야기를 하는 것이니 잘못된 점을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범건에게는 황제 폐하였으므로 절대 험담을 해서는 안 되었다. 이에 범건이 웃으며 말을 돌렸다.
“누가 그때 진평평에게 폐하를 도우라고 한 걸까요? 폐하께서는 왕야보다 춘추가 많으시고 진평평은 저보다 힘이 셌지요. 그러니 아무리 우리 둘이 같이 덤벼도 이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정왕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러게 말일세. 그래서 나는 싸우고 싶지 않네. 그냥 편안히 지내면 그만. 내 자식과 손자도 편안히 지내면 그만일세. 이번에 둘째 조사 사건 말이네, 실은 범한이도 잘 알고 있을 걸세. 황제 폐하께서 없는 돈까지 쓰시며 아이들끼리 서로 끝까지 싸우도록 만든 거라고. 너무 모진 분이시네.”
범건은 호부 시랑직에 있어서 지금 국고가 어떤 상황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에 씁쓸히 웃었다.
“황제 폐하를 너무 탓하지 마시지요. 지금 돈이 정말로 궁한데도 온갖 데 은전이 필요한 실정입니다. 그리고 황태후마마께서 건재하시니 황제 폐하께서도 장 공주마마를 너무 몰아붙이실 수 없는 것입니다. 범한이 그분의 칼이 되기를 원했으니 분명 무언가 알고는 있겠지요. 진평평도 성격이 갈수록 괴팍해지고 있기는 하나 범한이 손해 입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냥 상관 않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정왕이 범건을 잠시 바라보더니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자네 말이야, 여전하구먼! 뭐든 속에만 담아 두고 나한테도 털어놓지 않고 말이야!”
그러자 범건은 웃기만 할 뿐 역시나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 * *
연회가 끝나자 사남 백작가 사람들은 마차 몇 대에 나누어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범한은 아내와 함께 누이를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갔다. 한데 속에서 열불이 나 결국 몇 마디 하고 말았다.
“이 녀석 또 어디로 간 거야! 형수와 누나가 되어서 애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다니!”
임완아가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범사철과 마작 연구를 하라면 했지 그 아이를 돌보라고? 자신도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판인데 말이다. 그런데 범한의 말에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 아무도 모르게 아랫배를 살며시 문지르며 딴생각을 했다.
‘대체 왜 소식이 없지?’
범약약은 임완아보다 두 달 어렸지만 용모나 기질 면에서는 훨씬 어른스럽고 차분했다. 그리고 범사철을 교육하고 관리하는 건 모두 그녀의 몫이었다. 하지만 몇 달 전 황궁에서 혼처를 정해 준 후 화살에 쫓기는 사슴처럼 정신없고 긴장되는 날을 지내는 중이었고, 더군다나 집까지 나갈 준비를 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니 이런 와중에 오라버니가 짜증 내며 한 소리 하자 그것을 자신에게 한 말로 알아듣고 저도 모르게 억울한 투로 대답했다.
“알았어요!”
범한은 순간 자신이 이유 없이 화를 낸 걸 알아차렸다. 이제 겨우 열여섯인 어린 아가씨에게 보모 노릇이나 하라고 말하다니. 범한은 서둘러 봉합에 나섰다.
“화내지 마. 그냥 그렇다는 거야.”
세 사람이 집으로 들어가자 어린 여종들이 서둘러 차부터 내왔다. 범한이 작고 하얀 도자기 잔을 들어 차를 마시고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사사와 사기는 어디 갔지?”
그러자 임완아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하고 같이 정왕부에 갔었잖아요. 그래서 먼저 쉬라고 했어요.”
범한이 웃으며 답했다.
“우리 집 다 큰 여종들은 어째 평범한 집안 낭자들보다 더 호강하는 것 같군요.”
임완아가 범한의 말을 듣고는 문득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석두기》에서 대보 여종 중에 그 습인 말인데요. 사사죠?”
범한은 입에 머금고 있던 차를 뿜어내고는 손을 흔들며 답했다.
“그런 건 또 어디서 들은 얘기랍니까?”
그러자 옆에 있던 범약약이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겨 말했다.
“《석두기》에서 사사의 성격과 비슷한 건 청문이지요. 시원시원하면서도 귀염받게 행동하니까요.”
* * *
범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대신 속으로만 아직 《홍루몽》 77회를 쓰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청문이란 인물이 안 좋은 결말을 맞이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사사와 사기 때문에 범한은 입장이 곤란한 상태였다. 이치대로라면 사사는 벌써 침소로 들였어야 했다. 그와 사사는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사이라 단순히 주인과 여종이라 하기엔 감정이 깊었다. 그런데 문제는 사사를 거두게 되면 임완아가 데려온 다 큰 여종, 사기도 함께 거두어야만 했다. 아내 임완아가 강력히 원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매번 이 문제를 생각할 때면 범한은 이 행복감과 황당함을 동시에 느끼며 고민해야만 했다.
사사와는 감정적인 기반을 다진 게 있다지만 사기와는······ 제기랄! 한밤중에 정혼자를 만나기 위해 별궁으로 숨어들 때 밤마다 미향을 피워 재워 놓은 정은 있다만, 함께 침대에 눕는 거는 도무지 상상조차 안 된단 말이지.
사사의 경우는 올해 나이가 찰 대로 차서 더 이상 결정을 늦추었다가는 영영 시집을 못 가게 될 수 있었다.
범한이 모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임완아를 바라보며 사랑스럽다는 듯 그녀의 얼굴을 조몰락거렸다. 기분 좋은 말랑말랑한 감촉. 범한은 일단 그 문제는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아내에게 눈짓을 보냈다. 임완아는 남매지간에 할 말이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일어나 방을 나섰다. 그리고 시중을 들던 종들도 방에서 내보냈다.
* * *
“내가 너의 어떤 점을 제일 좋아하는지 아니?”
범한이 누이에게 직접 차를 따라 주고는 웃으며 말했다.
범약약이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백옥 같은 손으로 머리에서 비녀를 살며시 빼냈다. 머리에 얹어 두었던 머리카락을 편안히 늘어뜨리기 위해서였다. 머리를 가볍게 흔들자 어깨 위 새하얀 의복 위로 검은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녀가 찻잔 속에 남아 있던 차를 손가락에 묻혀 이마에 문지르며 고뇌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 저 요즘 우울해 죽겠어요. 그러니 그만 놀리세요.”
찻물을 이마에 묻힌 건 심신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이는 범한이 습관적으로 하는 동작이었다. 한데 범약약도 그게 습관으로 굳어져 있었다. 범한은 식은 차를, 범약약은 살짝 미지근해진 차를 사용하지만 남매라 그런지 비슷한 습관을 공유하고 있었다.
“너를 놀리려고 한 말이 아니야.”
범한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 갔다.
“약약아, 너 정말로 침착하더라. 오늘 정왕부에서 어른들께서 혼사 이야기를 하실 때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는 게 너무 힘들었거든. 그런데 당사자인 너는 낯빛 하나 안 변하더라. 심지어 심박수도 그대로였고. 정말 대단했어.”
범약약은 원래 담담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미래에 관한 일에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녀가 아주 엷게 웃는 얼굴로 오라버니를 보았다.
“오라버니가 집에 안 계실 때는 그냥 막막했거든요. 한데 오라버니께서 돌아오시고 나니 그런 느낌이 없네요. 모두 오라버니가 계셨기에 가능한 거였어요.”
범약약이 부른 세 번의 오라버니라는 호칭이 거대한 산이 되어 범한의 몸을 짓눌렀다. 순간 범한은 모든 걸 다 관두고 상관하지 않고 싶어졌다. 이에 찡그린 얼굴로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정하신 혼사란다. 왕야께서도 기꺼이 원하시고 아버지도 기뻐하셔. 세자께서는 풍류 가인으로 유명하시지만 경도에서는 가장 우수한 젊은이시지. 그러니 이번 혼사는 물리기엔 너무 어렵구나. 약약아, 네가 나를 믿어 주는 게 조금 부담감으로 다가온단다.”
범약약이 입술을 꽉 다물었다가 말했다.
“어찌 되었든······ 저는 오라버니 말을 들을 거예요.”
범한이 잠시 생각을 해보다가 진지하게 말했다.
“사리리에 대해 기억하고 있니?”
볌약약이 오라버니의 표정을 보며 조금 의외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를 죽이려던 여자였죠.”
범한이 미소를 지었다.
“맞아. 나는 그녀가 이 세상 여자들과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어. 그녀의 행동이 옳고 그른 걸 떠나 그녀는 적어도 자신이 생각했던 것, 원했던 것을 했지. 북제 상경으로 가던 길에 그녀에게 왜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물어봤어. 사리리가 그러더라. 어쩌면 어릴 때 집안이 망해 부득이하게 도망 다니며 천하를 떠돌게 되어서일 거라고. 이 세상의 평범한 여자들보다 자신은 더 많은 곳을 다녀봤고 조금 더 많은 경험을 쌓았기 때문이라고.”
범약약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께서 만 리의 길을 가려면 만 권의 책을 읽으라고 말씀하셨어요. 인생에 매우 유익한 일이라면서요.”
“그래, 맞아. 그게 바로 내가 북제로 가기를 원했던 이유이기도 해. 하지만 독서는 언제든 할 수 있는 거잖아.”
범한이 누이를 따스한 눈으로 지그시 바라보았다.
“하지만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다른 풍경과 인생을 보는 건, 실은 매우 어려운 일이야. 특히나 너처럼 경도 내 관리 집안에서 자란 아가씨들에게는 말이야.”
범약약이 살짝 자조적으로 웃었다.
“어렸을 때 담주에서 1년 살았던 것 빼고 제 평생 가장 멀리 가본 건 창산이었어요. 오라버니께서 말씀하신 무도하강이니, 북제 사람, 초원의 풍광 같은 것들은 당연히 볼 기회가 없었지요.”
“보고 싶니?”
범약약은 머뭇거렸다. 그러다 한참 후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