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술잔이 세 번이나 돌았지만 정왕은 흥이 나지 않았다. 이에 술병을 받쳐 들고 범건에게 말했다.
“집에서 자식들 교육을 어떻게 한 건가? 여기에 자네가 있어서 그런가, 범한을 포함해서 모두 입도 뻥끗할 생각을 하지 않는구먼.”
그러자 범건이 사슴 꼬리를 집어 들고 씹으며 여유 있게 말했다.
“왕야보다는 잘하고 있을걸요. 적어도 본관은 아이들 앞에서는 욕설이나 음담패설은 안 하니까요.”
“이런 어미도 모르는 놈아!”
정왕이 턱에 묻은 술을 닦아 내며 욕을 했다.
“내 여식 앞에서 나를 욕하지 말거라!”
정왕의 비는 일찌감치 세상을 떠났다. 물론 측실을 몇 두기는 했지만 그녀들에게는 이런 자리에 참석할 자격이 없었다. 그래서 바로 아랫자리에는 유가 군주와 세자 이홍성이 앉아 있었다. 아버지가 욕설을 하자 유가 군주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범한을 몰래 쳐다봤다. 아버지 때문에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 범한의 눈치를 본 것이었다.
그러자 범건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다시 받아쳤다.
“자기 뺨이나 때리시지요!”
임완아가 시집온 후 처음으로 두 집안이 함께 모인 자리였다. 한데 양 집안 어르신들이 적절치 않은 행동을 보이자 서둘러 범한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러다 시아버지가 갑자기 황친인 군왕(郡王)에게 자기 뺨이나 때리라 일갈하자 너무 놀라 저도 모르게 잠시 숨이 멎어 버렸다.
범한은 두 분의 이런 행동이 익숙했던지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평소 몸가짐이 바른 아버지께서는 이상하게도 정왕과 함께 계실 때면 옛날에 기생집에서 창기들이나 후리던 풍류가객의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범건의 말에 정왕은 욕설을 내뱉으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자기가 했던 말이 생각나 저도 모르게 “이런!” 하고 감탄사를 내뱉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느닷없이 오른손으로 자기 뺨을 소리가 날 정도로 가볍게 때렸다.
하지만 범건은 용서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젓가락을 들어 정왕의 코를 가리키며 욕했다.
“아드님이 곧 혼인을 하니 그 입으로 덕담만 해도 모자랄 판에 이게 뭡니까!”
정왕이 얼굴을 불쑥 내밀며 말했다.
“실언했네, 실언하였소이다.”
하지만 말을 마치자마자 눈을 부라리며 어린 사람들을 쓱 훑어보고는 흉악하게 한마디 했다.
“방금 내가 한 말, 아무도 못 들은 게다!”
그런 후 난처하다는 듯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옆에 있는 범한에게 질문을 던졌다.
“범한아, 날 키워 준 어머니는 담주에서 어찌 지내시느냐?”
임완아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해 고개를 숙이고 꾹 참았다. 조금 전 범건 상서가 어떻게 감히 왕야에게 자신의 뺨을 때리도록 만들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아서였다. 어미라고 하셨지? 상공의 할머니 때문이었다. 왕야를 키워 주신 분이 담주에 계신 할머니라서 그런 거였다.
범한이 얼굴을 찡그리며 속으로만 불만을 드러냈다.
‘두 분께서 싸우시는 데 왜 저까지 끌어들이신 겁니까!’
하지만 이내 할머니의 근황에 대해 짧게 이야기해 드렸다. 주로 건강히 잘 지내신다는 말이었다. 그러다 범한이 눈을 또르르 굴렸다.
“왕야, 술이나 드시지요. 맞다, 경도에서 별로 할 일도 없지 않으십니까. 홍성 세자도 경도에서 한가롭게 지내고 있으니 내년에 시간을 내서 저와 함께 담주에 놀러 가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곳에는 정말 좋은 차나무도 있답니다.”
정왕이 범한을 잠시 바라보았다.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알기에 정왕은 범한이 더 좋아졌다. 이에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좋은 생각이구나. 내일 입궁해 황제 폐하께 말씀드려야겠구나. 한데 너는 안 된다. 너는 내년에 강남에 가야 하거든.”
아랫자리에서 줄곧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이홍성이 깜짝 놀랐다. 자기가 봤을 때 조금 전 범한이 참으로 절묘한 수를 썼기 때문이다.
범한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제가 왜 강남에 가야 하는 것입니까?”
그러자 정왕이 질책했다.
“이 녀석, 평소에는 엄청 똑똑하던데. 둘째 녀석까지 말도 못 하고 쩔쩔매게 만들어 놓고는 왜 갑자기 아둔해진 거지? 내년에 황실 금고를 물려받지 않더냐. 강남에 가지 않으면 어찌 물려받으려 그러느냐?”
범한이 머리를 긁적이며 아직도 이해가 잘 안 되어 물었다.
“황실 금고를 맡게 되는데 왜 강남에 가야 하는 것입니까?”
정왕이 범건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이보게, 범건. 자네 아들이 바보인 척하는 건가 아니면 정말 바보인 건가?”
범건이 범한을 노려보며 말했다.
“요 녀석이 큰 지혜는 없어도 잔머리는 좀 굴리는 줄 알았더니 오늘에서야 알겠구나. 이제 보니 잔머리도 없었던 거야.”
임완아가 불만이라는 듯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상공은 어찌 황실 금고 삼대방이 전부 강남에 있는 것도 모르고······. 외삼촌, 술이나 드시어요. 그런 재미없는 일을 가지고 왜 계속 말씀하세요.”
정왕은 하마터면 사레들 뻔했다. 이에 웃으며 임완아를 꾸짖었다.
“여자는 시집가면 남편 편이라더니 정말 그렇구나. 아무리 그래도 나는 네 친외삼촌이니라. 그런데 어찌 시집가자마자 범씨 가문 편만 드누?”
임완아가 웃으며 대꾸했다.
“제 보기엔 외삼촌께서도 우리 상공을 아끼시는 것 같은데요. 왜 저한테만 그러세요.”
아랫자리에 앉아 있던 이홍성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탄식했다. 아버지 곁에 앉은 범한 그리고 범한을 보며 빙그레 웃고 있는 부왕의 눈빛을 번갈아 보다 보니 질투심이 일어서였다. 2 황자마마와 마찬가지로 그는 불쾌한 기분에 휩싸여 버렸다. ‘왜 부왕도 이렇게나 범한을 좋아하는 거지? 대체 누구의 아버지인 거야?’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 * *
술자리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였다. 자식들 세대가 모두 함께 생신 축하주를 올리고 나자 정왕은 흥이 제대로 올라 갈수록 황당한 말을 해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이들을 혼인시킨 후 서둘러 애부터 낳아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그러다 또 유가가 두 살 더 먹으면 다른 놈에게 좋은 일 시키느니 차라리 그냥 범한에게 시집 보내 버리겠다는 이야기까지 해버렸다.
범약약은 긴장해 옷깃을 꽉 움켜쥐고만 있을 뿐 감히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이홍성의 표정은 차분했지만 연모의 마음을 담은 눈동자로 정혼자를 몇 차례 훑어보았다.
한데 그들 중 가장 긴장한 이는 범한이었다. 이에 범한이 서둘러 말했다.
“유가 군주님의 신분을 생각하셔야죠. 어찌 제게 첩으로 주려 하십니까. 왕야, 술을 너무 많이 드신 것 같습니다.”
그러자 아직 어린 유가 낭자가 원망이 가득 담긴 눈으로 범한을 잠시 흘겨보았다.
술기운이 잔뜩 오른 정왕은 계속 욕을 해댔다.
“이 경도 바닥에 이상한 놈 천지인데 다른 놈에게 시집보내면 내 어찌 마음을 놓겠느냐. 신분? 내 여식인데 너와 어울리지 않을까 걱정인 것이냐?”
정왕이 고개를 돌려 임완아에게도 한마디 했다.
“신아야, 너도 할 말이 있는 게냐?”
그러자 임완아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저는 달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외삼촌께서 할마마마를 설득하시면 그걸로 끝이니까요.”
정왕은 할마마마란 말에 술이 반쯤 깼다. 모후께서 범한에게 자신의 손녀를 둘씩이나 줄 리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이에 자기도 모르게 욕설을 해가며 말했다.
“이 일은 생각을 좀 해봐야지, 원. 유가 저 아이는 품성이 너무 유약해서······. 이런 염병할, 그냥 범한에게 시집보내지 말아 버릴까? 그러면 그 자리를 북쪽 그 여자애한테 그냥 넘겨주는 거잖아! 그건 손해 보는 건데, 손해 보는 거고말고. 이리도 예쁘장한 범한이를 북쪽 출신인 그 암컷 호랑이한테 공으로 넘겨주면 그건 너무 손해라니까.”
정왕이 잔뜩 취한 눈으로 범건을 바라보았다.
“북쪽 그 여자애 이름이 뭐라 했었지?”
범건도 술을 많이 마신 터라 트림을 하고는 살짝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해당타타. 북쪽 성녀 같은 거라던데. 고하 국사의 마지막 제자. 어쩌다 저리도 모자란 우리 아들한테 홀딱 넘어간 건지 모르겠군요.”
모자란 우리 아들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범건은 속으로 흐뭇해하고 있었다.
범건이 말을 마치자 자리에 있던 이들이 모두 웃기 시작했다. 줄곧 한마디도 하지 않던 유씨도 어느새 입을 가리고 웃기 시작했다. 범사철과 이홍성 두 사람은 과장되게 웃었다. 범한은 지금 상황이 너무 의외여서 정말 난처했다.
‘아버지께서 술에 취하시더니 이리도 방종하게 변하실 줄이야. 더군다나 해당타타의 이름까지 마음에 새겨두고 계셨다니.’
어깨가 살짝 결렸지만 범한은 표정 변화 없이 임완아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리고 왼손으로는 잔을 들고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자, 술들 드시지요.”
그러자 또 한바탕 웃음이 흘러나왔다. 줄곧 이유 없이 불안해하던 범약약도 이번에는 가볍게 웃기 시작했다.
* * *
“그 해당타타란 여자는······.”
정왕이 느닷없이 말을 꺼냈다.
“고하의 마지막 제자가 아닐 수도 있을걸?”
범한은 해당타타란 두 글자에 순간 긴장했다. 하지만 뒤이어 나온 말을 듣고는 전에 자신이 계획해 놓았던 일들이 드디어 시작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이야기가 이미 경도에서 소문으로 돌기 시작한 것이었다.
범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이상하단 말이지. 그 해당타타란 낭자 말이야.”
범건이 아들을 잠깐 보더니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듣기로는 하늘이 낳은 인재라던데. 유사 이래로 가장 젊은 9등급 상 고수이고. 북제 사람들은 또 하늘의 자손이라고 부르고 있고. 그런 제자가 있는데 고하는 대체 뭐가 불만이라 다시 산을 열고 제자를 거두기 시작한 건지······.”
세자 이홍성도 이 이야기를 알고 있었던지라 인상을 쓰며 말했다.
“북제의 음모가 아닐까요?”
그러자 정왕이 또 욕을 했다.
“음모는 무슨 염병할! 제자를 거두는 게 음모면 고하가 밥 먹는 것도 음모더냐? 어째 매일 그런 거나 생각하는 게냐. 그런 거에 열중하느라 마음이 흐트러지는 게다! 다 큰 녀석이 이리도 모자라서야, 원.”
이홍성은 그냥 아무 소리도 않고 꾹 참기만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범사철이 그 슬픔을 깊이 공감한다는 듯 잔을 부딪쳐 주었다.
범건은 정왕이 자식을 타박하는 걸 그만 보고 싶었다.
“음모일 리는 없겠지만 이상하기는 하단 말이지. 고하가 수개월 동안 폐관했다가 갑자기 하늘의 뜻을 읽었다며 여제자 둘을 더 거둔다고. 뭐라더라, 하늘에서 상서로운 뭐라던데······ 정말 이상하단 말이지.”
정왕이 천천히 술 한 잔을 비우고는 신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4대 종사, 인간 중 최정점에 있는 인물들. 우리가 알고 있는 세 사람 중 우선 섭류운은 제자를 거두지 않는 대범한 사람이고, 사고검은 제자를 적게 거두기는 했지만 검의 오두막이라는 뜻을 지닌 검려(劍廬)란 것을 크게 열어 동이성에서 9품 고수를 여럿 길러 냈어. 또 고하 국사는 과거에 네 명의 제자를 거뒀는데 모두 다 놀라운 재주를 지닌 걸로 유명하고.”
범한은 순간 영혼을 잡아먹을 듯 움직이던 랑도의 곡도가 생각나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왕이 여전히 이맛살을 찌푸린 채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이들 세 종사는 여러 해 동안 제자를 받지 않았는데 고하는 왜 갑자기 이제 와서 제자를 거두는 건지······. 그야말로 천하의 일대 사건이로군. 우리 같은 사람과는 상관없지만 천하 무공 수련자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최고의 기회란 말이야. 만약 고하의 문하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무공 실력이 느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천하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니······.”
정왕이 잠시 탄식하고는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제자로 받아들여질 수만 있다면야 고하 일파와 가까운 관계가 되는 것이고. 내 보기엔 천하 군주들이 무척이나 반길 일인 것 같군.”
범한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고하는 북제의 국사입니다. 그러니 제자도 북제 사람 중에서 뽑았겠지요. 그런데 왜 우리 경국과 관계가 있다고 보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범건이 아들을 잠시 바라보고는 말했다.
“이번에 고하 국사가 문을 활짝 열었다고 했으니 그건 모두에게 기회가 생겼다는 뜻이다. 그가 비록 북제의 국사이기는 하나 대종사는 초월적 지위 아니겠니. 그러니 우리 경국 사람 중에서 누구든 그의 제자가 된다면 우리 황제 폐하께서도 기뻐하실 게다.”
범한이 이해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대체 해당타타는 그 대종사님을 어떻게 설득한 거지? 이제 보니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여인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