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홍죽은 문밖에서 깨금발을 하고 안쪽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런 그가 입가에 싸늘한 웃음을 띠었다.
‘황제 폐하와 진평평 원장 대인의 관계가 어찌 당신들 같은 문신들과 비교할 수 있겠소이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 추밀원 참찬 진항이 찬바람이 쌩쌩 도는 얼굴로 문을 밀고 나왔다. 홍죽은 서둘러 그에게 다가가 비위를 맞춰 주며 말했다.
“진 대인, 소인이 서둘러 회궁해야 합니다. 언제쯤 받아 볼 수 있을까요?”
진항은 30대로, 추밀원 정사 진 장군의 친아들이다. 작년에 북제와의 전투에서 그는 경국 통령으로 참전했었다. 그러므로 경력만 보면 중서성 회의에 참석할 자격은 안 되었다. 하지만 지난번 어사들이 곤장을 맞은 사건 이후, 아버지 진 장군이 줄곧 병환을 이유로 조정에 나오지 않자, 황제가 진항에게 중서 회의에 참석하도록 특별히 명을 내렸다. 이는 황제가 진씨 가문을 향한 두터운 총애를 보여 준 것이었으며 또한 경국이 군사적 공훈을 세운 자를 여전히 중시함을 보여 주는 처사였다.
아버지인 추밀원 정사 진 장군은 병환을 핑계로 조정에 나오지 않고 있었다. 이에 조정 대신들은 감찰원 제사 범한이 지금 조정에서 너무 잘나가 제멋대로 구는 걸 진씨 가문에서 못마땅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홍죽은 오늘 진항이 의외로 말끝마다 범한을 옹호해 저도 모르게 버릇없이 몇 마디 말을 걸고 만 것이었다.
진항이 태감을 쓱 보고는 웃었다.
“그냥 떠드시도록 내버려 두어라. 결국 단 한 분도 황제 폐하의 뜻을 거스를 수 없을 테니. 한데 이제 그만 엿듣지 그러냐. 아무리 간덩이가 부었다 한들 결국 가슴에 담아 두기만 하고 말도 못 할 것을 무엇 하러 그리 답답한 행동을 하는 것이냐!”
그러자 홍죽이 고개를 숙이고 웃기만 했다. 이어 그는 조정에서 가장 잘나가는 군 측 중견 인사가 변소로 들어가는 걸 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서 회의가 또는 말싸움이 서무 대학사의 조정으로 드디어 막을 내렸다. 대신들은 문서에 자신들의 의견을 완곡하게 적어 내려갔다. 황제 폐하께서 부디 이번 일에 조금 더 신중을 기해 달라고 말이다. 이번에 끌려간 다섯 대신의 품계는 그리 높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두 경도 출신의 노인들인지라 가재는 게 편이라고, 이들 문신들로서는 감찰원이 이리도 간단히 그들을 끌어내리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홍죽이 문서를 다시 품에 안았다. 그러더니 이내 하늘색 관복 밑단을 들어 올려 허리춤을 꽂고는 소맷자락으로 문서를 감싸더니 엉덩이를 치켜들고 깨금발로 종종거리며 뛰어갔다.
중서의 임시 회의실에서 황궁 내 어서방까지 가는 동안 하늘에는 구름이 짙게 내리깔려 있었다. 하지만 경국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들은 여러 사람의 주목을 받으며 그리고 호위병의 보호를 받으며 옮겨지고 있기에 누군가에게 위협을 받을 수 없었다. 이에 홍죽은 의기양양하게 뛰어갔다. 가는 동안 궁녀들이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눈길로 인사를 건넸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또한 어린 태감들이 잘 보이려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 역시 못 본 체했다.
어서방 밖에 도착한 홍죽은 일단 호흡부터 골랐다. 그런 후 시선을 내리깔고 어서방 문을 열고 들어가서는 문서들을 책상 아래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남쪽에서 온 상주문을 읽고 있던 황제가 홍죽이 들고 온 문서 중 하나를 집어 들고 보았다. 미간이 갈수록 강하게 일그러지더니 얇은 입술을 열고 싸늘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이런 평범한 인사들 같으니! 서무는 웃을 줄만 알고 안행서는 그래도 좀 담대하고······. 그래, 진가네 녀석이 오히려 쓸 만하군.”
홍죽은 천자가 하는 말을 감히 들을 용기가 없어 옆에서 찍소리도 안 내고 바짝 긴장한 상태로 서 있었다.
황제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홍죽은 이제야 살았다는 듯 어서방에서 물러났다. 그로서는 오늘 일과가 다 끝난 셈이었다. 그가 푸른 바닥 돌이 깔린 길을 따라 몇 번이고 돌아 걷다가 태극궁 옆까지 왔다. 그곳에 곁채처럼 있는 방에서는 태감 몇몇이 씨앗을 까먹으며 놀고 있었다. 들어가자 그들은 서둘러 홍죽을 자리에 앉히고는 히죽히죽 웃으며 물었다.
“오늘은 어떤 희귀한 일이 있었습니까?”
홍죽이 귀찮다는 말투로 말했다.
“날마다 대인들 싸우는 소리만 듣는데 뭐 새로울 게 있겠는가!”
그러자 태감들이 이내 아첨을 떨기 시작했다.
“작은 홍 내관, 날마다 어서방과 중서 사이를 오가시고, 우리 경국 조정의 중요한 일은 몽땅 내관의 눈 아래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당연히 신선하다는 느낌이 전혀 없으시겠죠.”
다른 태감이 끼어들어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만약 우리 경국 조정에 급소가 있다면 바로 작은 홍 내관의 품속일 것입니다.”
홍죽은 거만하게 굴기는 했어도 이런 부분만은 경계했다. 이에 서둘러 자신은 모르는 척 정색하며 말했다.
“무슨 소리들인가! 나는 그냥 폐하의 종일뿐일세!”
그러자 태감 하나가 웃으며 말했다.
“황제 폐하를 제외하면 우리 경국 관원은 몽땅 종입니다요! 작은 홍 내관, 모르시나 본데 요즘 내관께서 유명하십니다. 이놈이 황궁 밖에 천을 사러 갔을 때였습니다. 제가 내관과 친하다 하니 그쪽에서 다른 눈으로 보더라고요. 다들 그러더군요. 상서 댁 범한 공자 빼고 경도에서 제일 유명한 이는 작은 홍 내관이시라고 말이죠.”
홍죽이 손을 뻗어 이마 앞쪽으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말없이 웃기만 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범한 대인과 비교해 자신의 명성은 한참 보잘것없다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첨이란 건 원래 듣기 좋은 법. 특히 자신을 그리도 유명한 이와 함께 언급해 주니 홍죽은 의기양양해지는 기분이었다.
바로 이 순간, 누군가가 편전 문밖에서 걸어 들어왔다. 어린 태감들은 서둘러 입을 봉했다. 홍죽 역시 심장이 떨려 왔다. 등장인물이 바로 숙 귀비 궁의 대 내관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비록 문서 전달 일을 하고 있기는 해도 품계만 놓고 보면 대 내관은 그보다 훨씬 윗전이었다.
대 내관이 멀리 사라지자 태감 하나가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조금 전 침묵했던 게 조금 창피했는지 분하다는 듯 말했다.
“대 내관은 일찌감치 글러 먹었습니다. 하여 제가 조금 전에 정신이 없었던 거죠. 저렇게 얼빠진 사람하고 무엇 하러 어울리겠습니까!”
홍죽이 순간 궁금한 마음에 물었다.
“대 내관께서 왜?”
그 태감이 득의양양해하며 말했다.
“며칠 전 어사가 범한 대인을 탄핵했을 때 대 내관이 불려갔었지요. 결론은 폐하께서 어사들에게 곤장 형을 내리시고 대 내관도 처벌을 받았답니다. 한데 최근에 들리는 말로는 황제 폐하께서 대 내관에게 성지 전달하는 직무를 내려놓게 하셨답니다. 그리고 귀비마마께서도 대 내관을 궁 밖으로 내치시려 한다네요.”
옆에 있던 다른 태감이 홍죽에게 알랑거리며 말했다.
“대 내관이 잘나갈 때 우리 아랫것들을 때리고 욕하고 그랬으니 권세를 잃은 지금 누가 상대해 주겠습니까! 그냥 진흙 속에 떨어진 가을 낙엽 신세가 된 거죠. 어디 우리 작은 홍 내관님 같은 신선하고 파릇파릇한 가지와 비교가 되겠습니까!”
홍죽은 이들의 아첨이 갈수록 정도가 심해지고 저속해져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에 대충 몇 마디만 더 말하고는 서둘러 편전을 나섰다.
그는 편전 아래 굵은 대들보들을 따라 서둘러 걸었다. 그리고 드디어 후궁이 드나드는 석문(石門) 앞에서 낙심해 있는 대 내관의 뒷모습을 보았다. 홍죽이 재빨리 그에게 달려가 인사했다.
“대 내관, 멀리서 누구인가 했더니 대 내관이시더라고요. 그래서 서둘러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대 내관이 의외라는 듯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 최근 며칠 동안 황궁에 있는 우라질 놈 중에서는 이리 예의를 차려 주는 이는 없었다. 대 내관도 홍죽이 최근 어서방에서 일하느라 갈수록 유명해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에 그의 행동이 희한하게 다가왔다.
홍죽도 자신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한 이야기를 해나갔고 헤어질 때는 대 내관도 기분이 좋아진 상태였다.
대 내관이 궁 뒤쪽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젊은 홍죽의 입가에 그제야 득의양양한 미소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주변에서는 모두 대 내관이 권세를 잃었다 하지만 홍죽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 내관은 황궁 밖 범한 대인과 관계를 맺고 있으니 언젠가는 반드시 재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한데 그도 대 내관은 신뢰하지 않았다. 그가 이리 행동한 건 범한 제사를 무한히 신뢰한 때문이었다.
최근 들어 그는 매일 어서방과 중서성 회의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니 범한 대인이 요즘 얼마나 잘나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감찰원 1처에서 열흘 동안 무려 대신 다섯을 잡아들였다. 그런데도 폐하는 줄곧 윤허의 뜻을 유지하셨고. 중서가 아무리 강하게 말해도, 아무리 강하게 반발해도 홍죽이 보기에는 그들은 범한 제사를 절대 건드릴 수 없었다.
열흘 동안 다섯 대신이라니. 비록 모두 3품이 안 되는 관원이기는 했지만, 깊은 황궁 안에서 일하는 태감으로서 홍죽은 속속들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범한 제사가 이렇게 큰 소란을 일으키려면 어떤 패기를 지녀야 하는지, 그리고 그 뒤에 어떤 든든한 뒷배가 있어야 하는지 말이다. 그런데 그는 항상 어서방에 있었으므로 누구보다 똑똑히 알고 있었다. 범한의 든든한 뒷배는 바로······ 경국의 황제 폐하란 것을!
홍죽이 입가에 돋은 곪을 대로 곪은 여드름을 만지며 황궁 밖 세인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범한 대인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내내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인데 어떻게 이리 급이 다르게 살 수 있는지 궁금했다. 만약 대 내관과의 관계를 통해 그의 곁에 착 붙어 있을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최고일 거라 생각했다.
* * *
흠천감, 이부(吏部), 연이은 경도 관리 다섯의 낙마. 감찰원의 어둠이 경도 전체를 다시 휘감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도 백성들에게는 별일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재수 없는 일을 당하는 건 관료들이잖아. 나랑 무슨 상관이래?’라고 생각했다.
관료 사회에서 감찰원 1처에 대한 평가는 대체적으로 부정적이었다. 과부 마음 홀아비가 알아주는 심리가 작용한 걸 빼면 제일 큰 이유는 감찰원에 대한 몰이해 때문이었다. 그 어떤 관원도 젊은 범한 제사가 왜 저리도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관원들에게까지 손을 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는 극소수의 사람만 정확한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낙마한 관원들이 모두 2 황자가 비밀스럽게 짜놓은 판 속의 중요 장기짝이라는 걸 말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범한이 복수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어사들의 집단 탄핵에 화가 많이 나서라고. 하지만 범한이 황제 폐하의 엄한 반대에 부딪혀 도찰원에게 손을 댈 수 없게 되자, 열받은 망나니처럼 무지막지하게 큰 칼을 길거리로 들고나와 포효하며 눈에 띄는 대로 베어 버리는 중이라고. 특히나 자기 몸을 지킬 힘이 없는 아이에게 분풀이하는 중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정작 범한 제사는, 경도로 온 후 근 2년간의 행적을 보면 충동적이고 뇌가 없는 사람처럼 행동할 인물은 절대 아니었다.
* * *
범한이 신풍관에 앉아 빙그레 웃고 있었다. 고기 양념이 올라가 있어 보기만 해도 군침 도는 국수를 오른손에 쥔 젓가락으로 비비면서, 목철이 들고 온 사건 기록을 왼손에 들고 읽고 있었다. 안건 심문은 제법 빨리 끝난 상태였다. 범한으로서도 충분히 준비를 해 두었고 1처가 확보한 증거도 매우 유효해 보였다. 그러니 대리사나 형부로 보내 심판하게 해도 별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이번에 행동에 들어가기 전에도 범한은 언제나처럼 아버지와 절름발이에게 먼저 물어보았다. 하지만 두 늙은 여우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이에 범한은 그들의 태도를 알게 되었다.
즉 이번 일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범한은 반드시 2 황자에게 타격을 주어야 했다. 그가 나중에 다시 신양 쪽의 말을 들으려 할 때 더욱 신중해지도록, 동시에 범한 자신을 위해 덜 번거롭게 되도록 말이다.
하지만 2 황자는 범한의 의도와 살짝 다르게 행동했다. 하종위가 범한에게 쫓겨난 후 다시 화해를 청하러 보낸 사람은 없었다. 황자의 존귀함에서 나오는 자긍심 때문에 이 정도에서 멈춘 것 같았다. 하지만 상대방이 반격을 하지 않는 것도 무언가 이상하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