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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261화 (261/1,108)

261화

황의는 원굉도가 싫었다. 신양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장 공주의 깊은 신임을 얻다니. 그가 속에서 은근히 끓어오르는 질투심을 억누르며 말했다.

“경도에서 작은 소란이 있었지만 분명 안정을 되찾을 것입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직접 선발하신 감찰원 후계자가 아드님과 풀 수 없는 갈등 관계에 놓이는 건 원치 않으시겠지요.”

그러자 원굉도가 싸늘하게 웃었다.

“황제 폐하께서 어찌 생각하시는지 저는 모릅니다. 하오나 범한 대인은 절대 자기가 손해 보는 사람은 아니더군요. 이번 도찰원 어사가 집단으로 그분을 탄핵한 건,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게 있음을 일깨워 주고자 벌인 일이었습니다. 하오나 황제 폐하께서 그리도 총애하시는데도 범한은 오히려 그분 체면에 금이 가도록 했으니, 폐하께서도 이제는 자연스레 체면을 되찾으실 방법을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자 황의가 그의 표정은 살피지도 않고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설마 범한이 일을 더 크게 만들 거란 말인가요?”

그러자 장 공주가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입을 뗐다.

“원 선생 말이 일리가 있군. 이번에 도찰원과 그 녀석이 섣불리 부딪치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 그 녀석, 성미가 불손하거든.”

장 공주가 느닷없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황의, 그리 말하지 말거라. 우리 사위는 말이다, 진짜 말썽꾼이거든. 그러니 범건 그 늙은이가 제 아들에게 안지란 자를 지어 준 건 참으로 선견지명 있는 행동이었어. 사위가 가만히 있지 못하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 말이야.”

그녀가 입을 가리고 웃자 이궁에 순식간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생기 가득한 눈동자와 예쁘고 사랑스러운 미간은 처연한 가을날 모든 공간을 적시는 빗방울이 되었다. 이에 황의는 할 말을 잊고 멍하니 서 있었고 심지어 원굉도도 잠시 정신이 아득해져 버렸다.

“내 보기엔 우리 사위는 분명 둘째를 두 번 더 물어 버릴 거야.”

장 공주가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편지를 쓰게. 둘째에게 범한과 화해를 하라고 해. 아무리 많이 다쳐도 꼭 화해를 해야 한다고 말이지.”

경국 최고의 미녀는 나긋나긋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위세 때문에 그 누구도 감히 토를 달 수 없었다. 황의는 말을 하려다 멈추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장 공주자 달콤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마마마께서 서한을 보내셨는데 설에 황궁에서 함께 지내자고 하시더군. 기다려 볼까나. 이제 경도로 가게 되었어. 이제 곧 본궁이 사위와 놀아 줄 거야.”

* * *

한편 경도에서는 감찰원 1처 밀정들이 가을밤의 품 안에서 행동을 개시하고 있었다.

흠천감 감정, 이는 본래 별 볼 일 없는 직위이다. 하지만 아주 특별한 일이 발생한 경우에는, 가령 유성이 떨어지거나 달이 개에게 먹히는 일이 발생하면 황제에게 그에 대한 풀이를 해주던 터라 어떤 때는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기도 했다.

흠천감 감정은 2 황자의 사람이나 제 역할을 할 때를 맞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경국에서 가장 유명한 검정 개들에게 사냥당해 그들의 입 속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길게 뻗은 길 위로 여러 차례 휙휙, 소리가 났다. 곧이어 밤의 악마처럼 검은 옷을 입은 십여 명의 사람이 곧장 흠천감 감정의 관저로 들어갔다. 호위병들이 알아챘을 때는 이미 그들의 어르신은 검은 옷의 사람들에게 꽁꽁 묶여 버린 상태였다.

그런데 이들 강적은 곧장 관저를 떠나지 않고 정원에서 등불을 밝혔다. 정원을 밝힌 등불 아래에서 검은색 의상의 정체를 확인한 호위병들은 감히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현장에는 흠천감 감정의 가족을 포함해 여러 사람이 있었다. 온통 검정 일색으로 위장한 목철이 그들을 싸늘하게 바라보며 똑똑히 말했다.

“감찰원이 황명을 받들어 사건을 처리하러 왔다.”

목철이 말을 마치자 감찰원 1처 관원들은 흠천감 감정을 관저에서 끌고 나와 마차에 밀어 넣고는 이내 칠흑같이 어두운 밤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순간 관저에서는 울부짖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고 등불은 점점 희미해져만 갔다.

* * *

경력 5년 가을, 어린 태감 홍죽이 문서 더미를 품에 잔뜩 안고 구부정한 자세로 빠르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서쪽 쪽문에 있는 방으로 가는 중이었다. 그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자그마한 발끝을 종종거리며 젖은 바닥을 계속해서 밟아 나갔다. 그의 하늘색 도포 밑단은 위로 끌어 올려져 있었다. 옷자락에 발이 걸려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홍죽은 오른손을 문서 위에 가로로 얹은 후 넓은 소맷자락으로 다시 한번 문서를 감싸서 들고 있었다. 마치 납처럼 무겁게 내리깔린 비구름에서 비라도 떨어져 문서가 젖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사람 같았다.

문턱을 넘어서자 인수인계 절차가 시작되었다. 방 안쪽에 있는 태감들이 서로 명부를 훑어보았다. 그제야 마음이 놓인 홍죽은 명부 위에 조심스레 표시를 한 후 품에 있던 문서를 건넸다.

중서(中書)는 경국 조정 일을 처리하는 중추이다. 과거에는 요즘처럼 중요한 지위를 지닌 곳이 아니었다. 6부를 총괄하는 재상이 상주문을 일일이 살펴본 후 황제께 전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임 재상 임약보가 낙향하고 없는 터라 중서성의 지위가 갑자기 도드라지게 되었다. 이에 황제는 몇몇 나이 많은 대신들을 뽑아 중서에서 함께 공무를 논하도록 하였고, 또한 서로 편하게 연락하기 위해 공무를 논하는 장소도 황궁 서쪽 쪽문에 있는 방으로 옮겨 버렸다.

그러니 현재 중서에서 조정 대사를 책임지고 있는 이는 서무 대학사와 몇몇 나이 든 대신들이었다.

살짝 쌀쌀한 가을바람이 황궁 광장에 불어왔다. 홍죽이 입김을 불어 손을 비비며 조용히 문 앞에 서서 나이 든 대인들의 답변을 기다렸다. 사실 다른 곳에 가서 기다려도 되지만 홍죽은 문 앞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내부 동정을 살폈다.

가끔 관원들이 나타나 홍죽의 곁을 스쳐 가기도 했다. 그때마다 관원들은 그를 향해 겸손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면 홍죽은 자신의 신분을 생각해 서둘러 얼굴에 미소를 띠고 답례를 했다. 그런데 중서 임시 회의실 밖에 태감 홍죽이 서 있는데도 이를 수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그의 직책을 알고 있어서였다.

가끔 나이 든 대인을 시중드는 어린 태감들이 파견 나왔다가 홍죽과 마주치는 일도 있었다. 그러면 그들은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는 홍죽에게 옆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 추위를 피하라고 청했다. 그럴 때면 홍죽은 그들을 향해 거만하게 고개만 끄덕여 주고는 계속 문밖을 지켰다.

홍죽은 올해 겨우 열여섯이었다. 그런데도 이렇듯 황궁에서 작은 지위라도 누릴 수 있게 된 건 날마다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서였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그의 성이 홍씨이기 때문이었다. 즉 홍죽이 나이 많은 홍 내관의 친척일 수도 있어서였다.

홍죽은 아랫입술 왼쪽에 난 작은 종기를 손으로 만져 보았다. 살짝 화끈거렸다. 요 며칠 감찰원에서 사람들을 심하게 잡아들이는 것 때문에 문관들의 상소가 늘고, 중서에서도 이 문제를 두고 시끄럽게 논의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홍죽은 하루에도 몇 번씩 황궁 안팎을 오가는 중이었고, 얼마나 바쁜지 똥오줌을 바지에 지릴 정도였다. 이에 홍죽은 체내에 너무 많이 쌓인 화기가 드디어 몸 밖으로 분출되어 나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궁으로돌아가면 주방에 가서 차가운 차나 한 사발 들이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문 안쪽에서 나는 소리는 그리 큰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 소리는 고스란히 홍죽의 귀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 * *

“그것은 감찰원의 업무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이 상주문을 돌려보내셨는데 무슨 뜻으로 그러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어지는 목소리는 머뭇거리며 말을 이어 갔다.

“황제 폐하께서 최근 제사가 한 일들에 대해 도가 좀 지나치다 생각하신 건 아닐까요?”

어느 나이 많은 신하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도가 지나친 정도가 아니지요! 범한은 공공연히 공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정적들을 쳐내고 있는 거예요! 겨우 열흘 동안 벌써 대신 다섯 사람이 잡혀갔습니다. 한밤중에 감찰원에서 들이닥쳐 사람을 잡아갔다고요! 이게 어찌 조정 소속 감찰원이란 말입니까! 그냥 범한이 쥐고 흔드는 도적 떼지요!”

그러자 반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범한 제사는 광명정대하게 일을 처리합니다. 다섯 대신이 붙잡혀 간 다음 날 대리사 담벼락에 죄명이 상세하게 담긴 방이 붙었습니다. 경도 백성들도 다 알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러니 안 대인의 이번 언사는 과하신 것 같습니다. 감찰원 1처가 한 일은 감찰 업무입니다. 대체 정적 제거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씀입니까? 제가 보기엔 그 다섯 대신이 부정을 저질러 그런 화를 당한 것입니다.”

그러자 안씨 성의 나이 든 대신이 화를 냈다.

“정적 제거가 아니라고요? 그렇다면 왜 지난번 도찰원의 제사 탄핵이 있은 후 감찰원의 움직임이 급증한 것일까요?!”

그러자 아까 그 대신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만약 보복하는 중이라면 범한 대인은 왜 도찰원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야 황제 폐하께서 영명하시어 감찰원이 도찰원 사무에 관여치 못하도록 엄히 금하셨기 때문이지요!”

되받는 말에는 조소가 담겨 있었다.

“그렇다면 안 상서께서 좀 가르쳐 주시지요. 흠천감과 도찰원 어사가 대체 무슨 상관관계에 있는 것입니까? 범한 대인이 만약에 보복하는 중이라면 왜 흠천감 감정을 잡아들였냔 말입니다!”

이부 상서 안행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다 한참 만에 다시 쌀쌀맞게 입을 뗐다.

“어찌 되었든 감찰원이 일을 더 크게 벌이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잡아들이다가는 조정 신하들을 몽땅 잡아들일 것입니다!”

그러자 상대방이 비웃듯 말했다.

“상서 대인, 염려 푹 놓으십시오. 3품 이상 대신은 감찰원에서도 손을 댈 권한이 없으니까요.”

은근히 이부 상서를 비꼬는 말이었다. 그 자신이 부정하기 때문에 감찰원 조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화를 낸다고 말이다. 그리고 감찰원의 권력 행사도 한계가 있어 3품 이상의 고관은 건드리지 못하니 그는 안심해도 된다고 말이다.

안행서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문밖에 서 있는 태감 홍죽의 귀에까지 전해졌다.

“참으로 황당하군요! 감찰원의 세력이 이렇게 커지는데 여러분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겁니까!”

그러자 가장 먼저 입을 뗐던 대신이 중재인으로 나서며 부드럽게 말했다.

“상서 대인, 이리 화를 내시면 안 됩니다. 소진(小秦)도 그만하면 됐습니다. 감찰원은 사건 조사만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특별한 의도가 있어서도 안 되고 사건 판결도 못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잡혀간 그 대신들이······.”

그가 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말을 이어 갔다.

“유죄인지 무죄인지 밝히려면 대리사에서 다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 폐하의 뜻이 분명하시니 우리도 무엇이든 의견을 내기는 해야 합니다.”

그러자 소진이라 불린 대신이 제일 먼저 의견을 냈다.

“감찰원 업무는 폐하께서 친히 돌보고 계십니다. 하오니 이 진(秦) 아무개는 신하로서 더 이상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이에 안행서 상서가 크게 화를 냈다.

“이 늙은이가 보기에 이번 일은 오래 지속되면 안 됩니다. 범한이 제멋대로 굴도록 내버려 둔다는 건 여러 동료 대신께서 우리 경국에······ 또 다른 진평평이 나오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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