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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260화 (260/1,108)

260화

“앞서 있었던 무슨 일요?”

범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한마디 더 보탰다.

“본관은 도무지 모르겠군요.”

하종위는 과연 2 황자의 유세객이었다. 그가 잔잔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자 거무스름한 그의 얼굴에 누가 봐도 충직하고 진실한 웃음이 떠올랐다.

“앞서 있던 일 같은 것은 없습니다. 소관이 말실수를 한 것입니다. 단지 2 황자마마님을 대신해 운무산에서 나온 좋은 차를 한 상자 드리러 왔을 뿐입니다.”

범한은 자기 앞에 놓인 평범해 보이는 상자를 보며 깊은 침묵에 빠졌다. 자신이 이 선물을 받으면 며칠 전 그 어사들과 비기는 셈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2 황자마마가 봤을 때는 어쩌면 범한에게는 아무런 손해도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황궁 앞에서 벌어진 곤장 사건과 더불어 더 크게 체면을 세우게 되는 것이니, 이번에 범한은 분쟁을 관두고 서로 편케 지내는 편을 선택해야 했다.

“하종위 대인이 말실수를 했다 하니 도리어 한 가지 사건이 생각나는군요.”

범한이 미소 지으며 하종위를 바라보았다.

하종위는 가슴이 떨렸다. 젊고 잘생긴 범한 대인, 경도에 나타나자마자 자신이 누리던 경도 최고 인재라는 영광을 순식간에 송두리째 빼앗아 간 청년. 그런데 왜 2 황자마마의 모습과 비슷해 보이는 건지.

“대인, 어떤 일인가요?”

하종위는 조금 불안했다.

범한이 싸늘하게 그를 바라보며 대답해 주었다.

“본관, 봄에 경도를 떠나 북제로 갔었지요. 한데 그 몇 달 만에 돌아온 경도는 정말 많은 게 변해 있었습니다. 제 장인어른께서도 지금 강제로 퇴직하시고 여생을 보내고 계시고요.”

하종위는 순간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던 게 드디어 나오고 말았다.

범한이 조용조용하게 말을 이어 갔다.

“하종위 대인은 오백안이 누구인지 알고 있지요?”

하종위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답했다.

“이전 재상님 댁에 있던 모사이지요.”

범한이 눈썹을 잠깐 치켜올렸다 내렸다.

“하종위 대인은 과연 옛정을 잊지 않는 사람이더군요. 올봄, 대인이 과부가 된 오백안의 처와 경도로 들어왔다지요. 한데 그 미망인이 지금 어디에서 지내는지는 모르겠더군요.”

하종위가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허리를 굽히며 용서를 구했다.

“범한 대인, 소생은 그때 고인이 된 곽 씨 때문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에 과감히 오 씨를 데리고 경도로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재상 어르신께서 관두신 건 소생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하오나 그 일은 경도 국법과 관련된 일인지라 소생은 감히 속일 수 없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대인께서 아량을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종위는 범한이 자신을 봐줄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대신 이제 자신에게는 2 황자마마와 교분이란 게 있으니 그걸 믿고 강하게 나가 보았다.

“대인! 소생, 하 아무개만 나무라시고 2 황자마마의 진심만은 부디 사양 말고 받아 주시지요.”

범한이 그를 잠시 바라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본관은 조정 관료이니 아무도 나무랄 생각은 없습니다. 하나 이 범 아무개도 평범한 사람인지라 개인적 원한은 항상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하종위가 후회하는 눈빛으로 범한을 잠시 바라보았다. 오늘 화해를 청하러 온 일은 이미 허사가 됐다.

‘재상 어르신이 자리에서 내려온 게 나와 관련이 있기는 해도, 경국 신하로서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을 쓴 것뿐인데 뭐를 잘못했단 거지? 설마 당신네 장인과 사위는 그런 수단을 쓰지 않을 것 같은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하종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인사를 하고는 이곳에서 떠나려 했다.

범한이 혐오스럽다는 듯 그를 잠시 쳐다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자기 신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해버렸다. 하종위에게 걸어가 그의 허리 중 잘록하게 들어간 곳을 한 대 차버렸다.

하종위는 영문도 모른 채 윽,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거꾸러지고 말았다.

한데 하종위도 경도에서 유명 인물이다. 지금은 도찰원의 어사대부이고. 결국 그도 화가 머리끝까지 나 기듯이 몸을 일으키더니 범한에게 삿대질하며 한 소리 했다.

“네······ 네놈이······ 감히 날 친 거냐!”

그러자 범한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네가 걷어찬 것이지. 직접 여기까지 맞으러 오지 않았느냐. 그러니 너의 소원을 들어준 것뿐이니라!”

그러고는 주먹으로 몇 대 더 갈겨 버렸다. 비록 하종위를 때려죽일 수는 없었지만 죽사발로 만들어 버렸다.

하종위도 더 이상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순간 범한 대인이 검은 주먹으로 이름을 날렸다는 게 생각나, 아파 죽겠는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쥔 채 구르고 기면서 서둘러 밖으로 도망쳤다. 한데 방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범한의 발이 공중을 가르고 그에게 날아왔다. 그리고 찻잎이 담긴 상자가 표창이 되어 그에게 날아들었다.

* * *

범한은 이제야 기분이 좀 풀렸다. 그는 엉망진창이 된 사람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숙이고 침을 탁 뱉고는 욕을 퍼부어 주었다.

“내 장인어른을 모함해 쫓아내 놓고 감히 여기까지 와서 화해 신청을 해? 이 개 같은 놈아, 그러고도 매 맞으러 온 게 아니라고?!”

등자경이 갑자기 옆쪽에서 쓱 나타나더니 씁쓸하게 웃었다.

“도련님, 이 일이 새어 나가면 어르신께서 화내실지도 모릅니다.”

그러자 범한이 어깨를 으쓱였다.

“개가 짖어서 패준 것뿐이지 않은가. 저놈 주인께 보이려고 한 짓도 아니고 말일세.”

때는 수개월 전이었다. 범한이 북제 사절단으로 가 있을 때 감찰원으로부터 재상과 관련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바로 범한의 장인어른이 재상직에서 내려오게 된 상세 과정이 적힌 정보였다. 그 당시 범한은 이미 죽은 소은의 도움 덕분에 이 사건을 더 정확히 판단할 수 있게 된 상태였다.

오백안은 장 공주가 재상가에 심어 둔 모사였다. 그는 작년 여름, 임씨 가문 둘째 아들에게 북제와 손잡도록 부추겼고, 외양간 거리에서 범한을 죽이려 했다. 한데 뜻밖에도 포도나무 넝쿨 아래에서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 사건 때문에 산동에 있던 오백안의 아들이 재상의 문하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었다. 한데 범한은 지금까지도 그 일이 진평평 원장이 가장 은밀하게 심어 둔 첩자 원굉도가 한 짓인 건 모르고 있었다.

이후 오백안의 처는 신양 쪽의 도움으로 경도로 들어오게 되고, 교묘하게 하종위의 손을 거쳐 도찰원 어느 늙은 어사의 오래된 저택에서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황제에게 자신의 사정을 고하기 위해 일련의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어처구니없이 살인을 기도한 사건이 일어나고 그 일은 임약보 재상이 물러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경도 거리에서 오백안의 처가 살수에게 살해 위협을 받은 것이었다. 재상의 수하가 그녀의 입을 막으려 했던 것처럼 말이다. 한데 정말 이상하게도 그녀는 2 황자와 정왕 세자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결국 이 사건은 황궁에까지 알려지게 되었고, 임약보 재상은 하는 수 없이 뒷거래로 들어온 제안을 받아들이고 슬픔에 젖어 경도를 떠났다.

범한은 길에서 감찰원 보고서를 받은 순간부터 2 황자와 정왕 세자가 맡은 역할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2 황자와 신양 장 공주 사이의 진짜 관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범한은 매번 임대보를 볼 때마다 낙향한 장인어른이 떠올랐다. 그러니 그에게 이 일은 공무나 나랏일 같은 게 아니라 자신과 2 황자 사이의 사적 원한에 불과했다. 비록 배후에 범한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깊은 게 있겠지만 적어도 범한은 사위로서 이 사건과 관련해 복수를 해야만 했다.

* * *

범한이 주먹을 문지르며 몸 근육을 풀었다. 확실히 아까보다는 기분이 좋았다. 범한은 뒤로 돌아 뒤채로 향했다. 가는 동안 등자경에게 맑게 트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일은 아버지께 말씀드리지 말게나. 하종위도 여기저기 말하고 다닐 것 같지 않으니까.”

뒤채에 도착하자 임완아가 진지하게 수를 놓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범한은 자신의 처를 주시하며 슬그머니 다가갔다.

* * *

하종위는 구타당한 일을 여기저기 알리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2 황자는 이미 알고 있었고 범한이 대체 무엇을 믿고 이리 날뛰는지 궁금해했다. 2 황자는 조정에 아무런 세력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장 공주의 도움으로 이미 적지 않은 신하들이 그를 따르는 중이었으므로 사실 그에게 범한은 별거 아닌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쯤 되니 범한에 대해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이 범한이란 녀석은······ 문장력이 뛰어난 큰 인재인데 왜 갑자기 이리 막무가내로 날뛰는 거친 신하로 변한 걸까? 설마 감찰원이 사람을 저 정도로 변하게 만든단 말인가?’

그는 범한이 기껏해야 감정이 격해져 싸운 것 정도로만 치부하고 말았다. 상황이 이쯤 되었는데도 자존심을 굽히고 범한을 제대로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이에 범한이 하종위를 패버렸으니 분명 기분이 풀렸을 거라 생각하고 신양 쪽에는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는 내용의 서한만 보내고 말았다.

* * *

신양의 아름다운 이궁, 기이한 형태의 아름다운 노목이 서서히 그리고 조용히 가지를 떨어뜨리고, 누렇게 뜬 나뭇잎들은 새하얀 얇은 사로 된 휘장 안에서 나풀거리고 있었다. 보드라운 손 하나가 공중으로 올라오더니 그 나뭇잎들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손 위의 푸른 핏대는 백옥 같은 피부 속에서 은은히 색을 발하며, 마치 옥 속에 깃든 정신인 양 아름다운 자태를 은근히 드러내고 있었다.

경도를 떠나온 지 1년이 된 장 공주 이운예가 소녀처럼 귀엽게 하품을 하더니 들고 있던 낙엽을 바닥에 버렸다. 그러고는 턱을 살포시 괴고 눈동자를 굴리며 물었다.

“원 선생이 보기에는 어떻지?”

임약보 재상을 배신하고 신양 쪽에 투신한 모사 원굉도가 무표정하지만 지금 상황에 딱 맞는 당황스러운 눈빛을 내보이며 대답했다.

“2 황자는 아직 천진한 면이 있어 적을 조금 얕본 것 같습니다.”

그러자 장 공주가 키득키득 웃었다.

“범한은 아직 젊은이야. 그런데 적이라니. 오히려 원 선생이 지나치게 신중한 것 같군.”

원굉도가 씁쓸하게 웃었다.

“공주마마의 사위분은 절대 평범한 이가 아닙니다. 북제에서 전력을 기울이지 않아 공주마마께서 내놓으신 묘수를 완전히 실현시키지 않기는 했습니다. 하오나 교묘하게 중간에 서서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북제 황제를 뒤에서 조종해 상삼호를 시켜 심중을 죽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런 인물을 어찌 단순히 망나니로 치부해 버릴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사위분은 이 시대를 대표하는 시선입니다. 문장력이 좋은 인물이니 속마음은 분명 평범한 이들보다 훨씬 더 복잡할 것입니다.”

장 공주가 한숨을 내쉬고는 비단을 씌운 긴 의자에서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화려한 의복 사이로 새하얀 등과 목이 드러났다. 그야말로 아름다운 한 마리 백조, 그 자체였다.

“고 녀석, 소은을 구출해 오지 않은 건 그렇다 쳐. 그런데 심중을 음해해 결국 죽여 버리는 통에 최 씨 녀석이 매일 찾아와서 징징대고 있어. 북제 쪽 진무사 지휘사 자리는 공석이 되어 버려 부하인 금의위들은 감히 알아서 나설 수도 없어. 물건을 내보내는 길이 순식간에 다 막혀 버렸지 뭔가.”

줄곧 옆에 얌전히 앉아 있던 장 공주의 심복 황의가 공손히 입을 뗐다.

“지금 북제 황태후와 상의 중입니다. 하온데 북제의 젊은 황제가 최근 고집을 부리고 있다 합니다. 황태후가 장영후를 진무사 지휘사로 임명하려 하는데 억지로 막고 있지요.”

장공주가 소리 내어 잠시 싸늘하게 웃고는 말했다.

“북제의 그 할머니도 정말 바보군. 그냥 별 볼 일 없는 심복이나 데려다 꽂아 놓을 것이지, 왜 꼭 자기 혈육을 데려다가 특무 기관 대장으로 만들려는 건지, 원. 자기 아들을 너무 바보 취급하는 거 같은데.”

그러자 원굉도가 화제를 돌렸다.

“북제 일은 잠시 논외로 하시지요. 경도 상황이 어떻게 될지 우리로서는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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