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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256화 (256/1,108)

256화

둘째 날, 범한은 집에서 내기 돈 없이 마작을 하고 하루 종일 내리는 비나 감상하며 어사들이 자신을 탄핵한 일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범한의 입을 통해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임완아와 범약약이 더 걱정을 했다. 언관들이 내는 목소리의 중요성을 이들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사가 범한을 탄핵했다는 소식이 경도 전체에 퍼져 나갔을 즈음, 중서(中書)에서도 탄핵 상주문을 베껴 그것을 사남 백작가로 보냈다. 그러자 범한은 그제야 알았다는 듯 가짜로 경악하고 화를 내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밤에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숙면을 취했다.

셋째 날, 범한은 이른 아침부터 저택을 나섰다. 규율에 따르면 어사에게 탄핵을 당한 관원은 하던 일을 모두 내려놓고 자신을 변론하는 상소를 올려야 했다. 하지만 범한은 그 규율을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느긋하게 신풍관으로 가, 식구들과 함께 그 맛있다는 접당 왕만두 공략에 나섰다.

이 일은 경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 유명 인사가 어떤 반격을 펼칠지 그 누구도 감을 잡지 못하고 있어서였다. 어사들이 단체로 탄핵 상주문을 올렸다는 건 누가 봐도 당사자를 갈가리 물어뜯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일을 벌였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어사들은 이미 이번 달에 1처에 드나든 관원들에 대해 모조리 조사도 마친 상태였고 말이다.

그런데 범한 제사는 너무나도 뜬금없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어사대를 공격하기는커녕 오히려 왕만두 공략에 나서다니.

넷째 날, 며칠 동안 쉼 없이 내리던 비가 드디어 그쳤다. 범한은 식구들을 데리고 교외로 국화 꽃놀이를 갔다. 그리고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린 작은 국화 한 송이를 손으로 어루만져 주었다.

* * *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중서에서는 황제 폐하의 뜻을 보내야 했다. 조사를 할 건지, 물어볼 건지 결정해야 했던 것이다. 어찌 되었든 요 1년 동안 너무 잘나간 범한 대인을 일깨워 주든 아니면 쓸데없는 짓을 한 도찰원 어사들을 꾸짖든 황제는 어느 쪽이든 태도를 취해야 했다.

조회 때, 궁금증을 참지 못한 이부 상서 안행서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한데 황제는 콧방귀만 뀌고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상황은 이렇듯 난처한 교착 상태에 빠져 버렸다. 그러자 엄숙했던 도찰원 어사들의 얼굴에서도 점점 난처한 기색이 떠오르더니 그들은 다시 한번 연명 상소를 올릴 계획을 짰다. 아울러 조정 문관 중에서 같은 해 급제한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태학 학생들까지 동원할 준비를 했다.

사실 경국의 황제는 범한의 자기 변론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범한의 변론서를 가지고 대충 아무렇게나 얼버무려 일을 흐지부지 처리할 생각이었다. 태평성대를 구가한 모든 제왕이 자유자재로 썼던 ‘두루 뭉실한 일 처리’ 능력을 발휘해서 말이다.

그런데도 범한은 줄곧 모르쇠로 일관하며 자신은 떳떳하다는 듯 사방으로 놀러나 다녔다. 그리고 이 문제의 해결책을 황제에게 떠넘겨 버린 채 음흉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직접 물어뜯으시려던 거 아니었나요? 황제씩이나 되시니 어쨌든 알아서 장애물을 제거하고 나를 보호해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겨우 이까짓 일로 체면까지 잃을 각오를 하셨다면 나중에 신양 쪽에서 움직였을 때도 장 공주를 처리해 주시고요. 그리고 그때 가서 저를 황태후 마마께 던져 놓고 찜 쪄 드시게 하면 안 됩니다!’

만약 황제의 총애를 받는 평범한 신하나 문신이었다면 범한처럼 사악한 생각을 하거나 삐딱선을 타지 않았을 것이다. 황제의 마음은 측정하기 어렵고 천자의 위엄은 수시로 변하니 말이다. 황제의 총애만 믿고 오만방자하게 우쭐대다가는 아주 사소한 실수가 훗날 문제가 되어 변명할 기회도 없이 참수당하는 일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범한은 자신이 평범한 신하가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한편 황제는 그가 이미 알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어서 상황이 좀 재미있어진 터였다. 이에 범한은 황제 폐하가 자신을 위해 어디까지 해줄 수 있는지 시험해 보는 중이었다.

* * *

어사들이 집단 상주문을 올린 지 7일째 되는 날, 범한이 마차를 타고 황궁 문 앞에 나타났다. 범한이 마차에서 내리자 계년조 소속 관원들이 범한을 에워쌌다. 흑회색 관복, 싸늘한 표정, 곧게 편 상체, 이것만으로도 그가 누구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황궁 문 앞에 몰려 있던 관원들도 이 장면을 보고 있었다. 딱 봐도 최근에 자신들이 식후 차를 마시면서 간식거리로 자주 언급했던 그 인물이었다. 다른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밀정들에게 사람들에게 노출된 곳에서 자신을 보호하도록 한 것만 봐도 범한은 감찰원의 일인자였다.

오늘은 조회가 있는 날로, 황제가 범한에게 입궁해 옆에서 회의 내용을 듣고 있으라는 특명을 내렸다. 관원들은 모두 오늘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알고 있던 터라 흥분한 상태였다. 일부 사남 백작가와 교분이 있던 문관들은 범한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는 날이 추워졌다며 황궁의 문 옆쪽으로 몸을 피했다.

광장 어도(御道)를 중심으로 양측에는 대여섯의 진홍색 관복의 관원들과 회흑색 관복을 입은 감찰원 관원들이 서로 대치하며 서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상대 진영을 뚫고 나가 저 멀리 성곽만 향할 뿐이어서 서로 보고도 못 본 체했다.

진홍색 관복을 입은 관원들은 범한 탄핵 상소를 낸 도찰원 어사들이었다. 범한이 그들을 싸늘하게 바라보며 목소리를 깔았다.

“어째 하나같이 돼지처럼 생겼을꼬. 그런데도 청렴한 관리라고?”

등자월이 옆에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1처에서 며칠 동안 조사를 했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대인, 저들 도찰원 어사들은 대부분 별 볼 일 없는 가문 출신이라 명성을 중시합니다. 기댈 게 그것밖에 없어서인 거죠. 그래서 집 문지기가 떡 선물을 받는 것조차 조심해 무언가를 찾아내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러자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탄식했다.

“관리는 탐욕스럽지 않다는데 천하는 어렵다니!”

등자월이 쓴웃음을 지었다. 제사 대인의 ‘묘한 말’이 조금 황당하게 들려서였다.

도찰원 어사들은 두려움이라고는 전혀 없는 싸늘한 눈빛으로 범한을 보고 있었다. 범한도 저들이 자신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관원들이 모두 탐욕스럽지 않다면 나 같은 감찰원 제사가 무슨 필요가 있을까?’

범한은 문득 수하 몇을 보내 저들을 암살해 버리고 이번 일을 끝맺어 버릴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저들은 언관이라 그럴 수는 없는 노릇. 정말로 그렇게 했다가는 아무리 아버지인 황제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담주로 내려보내는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청렴한 관리는 세상에서 가장 찾아내기 힘든 인재였다. 범한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고 또한 1처의 조사 능력도 믿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이 보기에도 여기에 있는 어사들은 진정으로 청렴한 관리들이었다. 그런데 그 청렴한 관리들이 적이 되어 떼로 몰려오다니. 이는 범한이 보기에도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일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범한은 어느새 젊고 아름다운 장모님께 탄복하고 있었다.

‘부패하지 않은 깨끗한 관리들까지 동원하시다니 진정한 능력자군.’

범한이 남몰래 감탄하는 동안 저들 도찰원 어사들도 제사 대인을 보며 속으로 감탄을 연발하는 중이었다.

한 달여 동안 범한이 보여 준 행동은 시선이라는 얼굴 뒤에 숨겨 둔 그의 진면목이었다. 바로 탐관의 모습을, 그것도 온갖 수완을 동원해 이익을 도모하는 권신의 싹을 말이다. 이와 관련해 어사들은 충분히 증거를 확보했다고 생각했지만 황제 폐하는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다. 어사들은 황제 폐하께서 범한을 편애하느라 자신들에게 더 심한 중벌을 내릴 거란 걱정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황제 폐하는 영명한 군주였고 또한 탄핵은 어사가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어사란 모름지기 도와 의를 굳건히 짊어지고 황제에게 간언해야 하는 법. 그러니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그저 백골이 되어도 한 점 오점이 없기만을 바랄 뿐.

그런데 도찰원은 요 며칠 그저 그런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우선, 조정 관료들과 함께 연명 상주문을 올리려던 게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어느 부에 가든 관원들은 그들의 의견을 예절 바르게 경청해 주기는 했지만 연명 상소에는 어떻게든 참여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민간의 문인들과 여론을 선동하는 데 실패했다. 왕년에 저잣거리에서 조정을 비판하던 인재들도 그들이 범한을 탄핵하려 한다고 하자 고개를 내저으며 믿으려 하지 않았다.

언관들은 태학에도 찾아갔었다. 한데 태학에 있는 젊은이들의 태도 때문에 그들은 울화가 치밀고 말았다. 태학으로 찾아가 학생들을 선동하던 어사들은 오히려 쫓겨나는 치욕을 겪어야만 했다. 모두가 다 알다시피 범한은 시선, 장묵한 대가가 지목한 후계자, 호부 상서 가문의 공자, 젊은 문인들의 마음속 우상, 무수한 규방 소녀들의 꿈에 그리는 낭군이었다. 그런데 겨우 그깟 푼돈이나 탐했다고? 태학 학생들은 어사의 말을 아예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한데 13,400냥이 고작 푼돈이라고?”

어쩌면 도찰원 어사들이 가난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들 입장에서도 태학 학생들의 반응이 이해가 안 되었을 수도 있다.

갑자기 새벽바람이 강하게 불어왔다. 황궁 문밖에 있던 관리들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비구름이 새벽 햇빛을 내몰며 몰려오자 모두 동굴처럼 생긴 황궁 문 입구 쪽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자 금군 호위병들과 소황문(小黃門)이라 불리는 하위 태감들은 나이 많은 고관 대인들에게 비를 맞도록 할 수 없어 입구 쪽으로 몰려드는 그들을 막지 않았다.

가을 경도는 낯빛을 수시로 바꾸었다. 바람이 불더니 이내 비가 오고, 가을비가 소슬히 내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주룩주룩 흐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잠시 후, 황궁 바닥에 깔아 둔 푸른 바닥 돌이 빗물에 흠뻑 젖어 짙은 검은색이 되었다.

그런데도 범한과 도찰원 어사 일행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빗물이 몸 위로 쏟아지고 있는데도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범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편을 바라보고 있다가 순간 무어라 했다.

“뢰 어사, 그만 비를 피하시지요.”

범한이 부른 이는 도찰원 좌도어사로 정3품 고관인 뢰명성이었다. 뢰명성 어사가 범한에게 잠시 싸늘한 눈빛을 보내더니 말했다.

“범 대인, 이리 비를 맞고 있다고 자기 몸에 있던 죄악이 모두 씻겨 내려갈 것 같습니까?”

뢰명성 어사가 두 손을 모아 가슴팍까지 올리고 인사하며 말했다.

“오늘 황제 폐하를 뵙게 된 이상 본관은 범한 대인을 끝까지 탄핵할 생각입니다.”

범한의 눈썹이 살짝 씰룩였다. 음험한 생각을 공개적으로 밝히다니. 범한이 웃으며 똑같이 두 손을 모아 가슴팍까지 올리고 인사하며 대꾸했다.

“그렇습니까? 만약 황족 측근과 관련한 법률이 있다면 과연 뢰 대인이 지금처럼 장렬한 기세를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군요.”

좌도어사는 화가 나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 표시로 소맷자락을 한번 털어 내고는 황궁 문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그의 뒤에 있던 나머지 어사들은 여전히 빗속에서 두 무릎을 땅에 대고 다리와 몸을 꼿꼿이 편 자세로 있을 뿐이었다.

“황궁 문 앞에서 무릎까지 꿇고 연기를 하다니.”

범한은 저들이 가련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 한숨을 내쉬었다.

“살면서 겨우 이름자나 세상에 알리고자 저러다니······ 조정에서 왜 그대들 같은 사람들을 데리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그러자 빗속에 꿇어앉아 있던 어사들이 분노에 가득 찬 눈으로 범한을 노려보았다. 범한은 못 본 척하고 등 쪽에 달린 비 모자를 머리에 쓰고는 엷게 웃었다.

“본관은 원래 검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씻어도 그냥 검을 뿐이죠. 여러 대인께서는 좀 전까지만 해도 붉은색이었는데 어째 비를 맞고 나더니만 몽땅 검어졌군요.”

빗물이 범한이 걸친 감찰원 관복 위로 떨어졌다. 빗물은 매끄러운 연의 속으로 침투하지 못했고 검은색은 아까와 똑같은 음울한 검은색이었다.

한편 어사들의 관복은 빗물에 젖자 점점 그 색이 짙어져 거의 검은색에 가깝게 변해 버렸다.

어사들이 고개를 숙여 자신들의 관복을 확인해 보았다. 그러고는 빗물이 자신들의 얼굴을 때리도록 내버려 둘 뿐 고집스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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