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궁녀들이 촛불을 밝히고 밖으로 나가자 어서방에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황제는 범한이 올린 상주문을 말없이 보기만 했다. 그리고 만약에 범한이 정말로 자신의 심중을 알아차렸다면, 게다가 자신이 판을 짜놓은 대로 기꺼이 고립된 신하가 되기로 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늦어도 오늘 밤 안에는 조사한 정보를 자기 책상 위로 보낼 것이리라.
그런데 만약 범한이 언빙운의 뜻에 따른다면 이 일을 덮을 텐데······. 문득 황제의 이맛살이 일그러졌다. 아무리 범한이 조정의 안정을 고려했다 해도 천자를 기만하는 행위는 허락할 수 없는 일이었다.
* * *
삐그덕, 소리와 함께 어서방 문이 열렸다. 태감 하나가 상주문이 담긴 함 두 개를 들고 와 황제에게 열람할 것을 권했다. 상주문을 읽는다면 한밤중까지 계속 일하게 될 터. 이는 황궁 내 규칙이 된 지 오래였다.
황제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상태로 상주문을 받았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던지라 가장 아래쪽에 있는 비밀 상주문 상자가 눈에 들어오자 황제의 입가에 따스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황제는 감찰원 비밀 통로로 들어온 상자부터 열어 보았다. 그리고 범한이 벼슬아치가 된 이래 처음 쓰는 상주문, 그러니까 비밀 상주문을 꼼꼼히 읽어 보았다.
한참 후 황제는 이 비밀 상주문을 촛불에 태워 버렸다. 그런 후 가볍게 두어 번 기침하더니 붉은 먹을 적신 붓을 들어 새하얀 종이 위에 몇 글자 적고는 비밀 함에 넣어 밀봉했다.
수많은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버릴 상주문이었건만 황제는 별것 아니라는 태도였다. 권력의 정점을 향해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황제는 이미 너무나 많은 일을 간파해 왔다. 이에 범한을 포함한 수많은 세력이 암암리에 예측했던 것과 달리 황제는 아들과 누이가 어떤 소란을 피우게 될지에 대해서도 아예 신경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자신의 야심과 자신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황제는 범한의 행동만큼은 매우 마음에 들었다. 분명 황태자의 입장에서 2 황자를 공격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에 안도감에 젖어 있던 황제는 뒤쪽에 놓인 상주문을 읽고는 수척한 얼굴에 그 어느 때보다 강한 노기와 경멸감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도찰원 어사들이 집단으로 낸 탄핵문이었다. 감찰원 제사 겸 1처 수장인 범한을 탄핵하는 상주문. 그것도 범한이 사익을 위해 부정을 저지르고 사사로이 뇌물을 받았으며 법을 왜곡해 횡포를 부렸다니.
그 순간, 모든 상주문이 도발하는 눈빛으로 황제의 음침한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도찰원이 이 시대의 최고 명사인 범한을 집단 탄핵했다. 그리고 경도에서 이 사실을 가장 먼저 안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닌 범한이었다. 황제가 탄핵 상주문을 읽기도 전에 범한은 자신이 이미 도마 위에 올랐음을 알고 있었다.
맞은편 의자에 예의 바른 자세로 앉아 있던 목철이 말했다.
“어젯밤 도찰원 좌도어사 뢰명성이 앞장서서 한 일이지만, 확인 과정을 거쳐야 해서 오늘에서야 1처로 도착했습니다.”
감찰원 1처는 백관들의 동향을 몰래 감시하는 책무를 지녔다. 그러므로 어사들이 연명 상소라는 이리도 커다란 움직임을 보였는데도 1처 관원들이 즉각 감지해 내지 못했다면 범한은 화를 내며 제2차 기풍 바로잡기에 들어가야만 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들고 있던 종이를 펄럭이며 호기심에 물었다.
“죄명이 이것뿐인가요?”
목철은 제사 대인이 별로 신경 쓰지 않자 자기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대인, 과소평가하시면 안 됩니다. 어찌 되었든······.”
목철은 말을 끝마치지도 않고 갑자기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범한이 고개를 들어 그를 잠시 보더니 장난기가 담긴 눈동자로 말했다.
“설마 본관이 이 죄명들을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가요?”
어사 언관의 상주문에는 다음과 같이 똑똑히 적혀 있었다.
‘범한은 1처를 맡게 된 지 겨우 한 달 만에 몇 명으로부터 얼마의 은전을 받았고, 동시에 몇 명의 혐의자를 사사로이 풀어 주었다. 또한 부하들을 종용해 거리에서 폭력을 행사하게 했으며 이 일은 조정의 체면을 손상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확실히 죄를 지은 것이며, 유씨 부인을 통해 범한에게 건네진 은표들과 관련해서는 조사 가능한 증거가 남아 있다. 바로 일전에 감찰원 1처로 붙잡혀 갔다가 풀려난 관원들이 증인이니 범한은 천하 사람들을 속일 수 없을 것이다.’
죄목만 봐도 관복을 벗고 물러나기에 충분했다.
범한이 일그러진 미간을 문질렀다. 오늘은 종일 바빴다. 한데 그 결과가 이런 엄청난 일이라니. 범한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우리 경국의 도찰원 어사 언관께서 주둥아리 두 쪽만 살아서는. 겁쟁이에 기둥서방 같은 놈들인 주제에 대체 언제부터 권력자를 우습게 본 거지? 그게 아니라면 본관의 권력이 아직 별 볼 일 없다는 뜻인가? 신분도 아직은 그저 그렇고?”
목철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 했다. 범한의 말처럼 감찰원은 줄곧 도찰원을 무시해 왔기 때문이었다. 목철은 억지로 웃음을 삼키며 제사 대인이 말한 마지막 두 구절을 놓고 ‘잘 아시면서 왜 그런 질문을 던질까?’라고 생각했다. 범한 대인이 큰 권력을 쥐고 있고 신분이 높다는 건 지금 경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점은 범한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기도 했다. 도찰원 어사들은 왜 겁도 없이 갑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건지. 요 며칠 동안 자신은 비교적 온건한 방법을 사용해 왔는데. 생각해 보니 저들의 체면과는 관련이 없었고 게다가 그동안 천자의 총애도 날로 커져만 가고 있는데. 설마 저들이 황제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일도 불사하겠다는 건가?
범한의 얼굴을 보니 목철은 그가 무슨 생각 중인지 알 것 같았다.
“대인, 이번 일은 도찰원에서 관례적으로 하는 일입니다. 저들은 언제나 감찰원을 겨누고 있지요. 경국 법률이 준 권한이니까요. 황제 폐하께서도 감찰원이 암암리에 수단을 쓰는 걸 억누르고 계신 것이죠. 하여 가끔씩 저 잘난 척만 하는 수재들이 우리 감찰원의 흠을 들춰 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오나······.”
목철이 이맛살을 강하게 찌푸리며 말을 이어 갔다.
“저들이 감히 이리도 애먼 죄목으로 대인을 직접 겨눌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범한이 찻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식은 차를 찍어 미간에 바르고 문질렀다. 차가운 찻물 덕분에 조금 냉정을 되찾은 것 같았다.
도찰원은 특수한 기관이었다. 이전 왕조에서 도찰원은 조정의 최고 감찰, 탄핵 및 건의 기구였다. 도찰원 장관으로 좌도어사, 우도어사가 있었고 그 아래에 부도어사, 금도어사가 있었다. 또한 지방 관할지에도 각각 감찰어사를 두어 주현(州縣)을 순시하며 살폈고, 주로 관리에 대한 현지 조사와 탄핵하는 업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장묵한 대가가 수정 정리한 《직관주(職官注)》를 보면, 예전 북위의 도찰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었다.
‘도어사는 백관을 탄핵하고, 억울한 사안을 밝히고, 각 도를 살피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천자의 눈과 귀의 역할을 한 기관이다. 이에 대신이 간사한 행동으로 소인이 당파를 이루어 권세를 가지고 정치를 어지럽히면 탄핵하였다. 벼슬아치 중에서 기율을 어긴 옹졸하고 천박한 탐관을 탄핵하였다. 학술에 있어 부정을 저지르고 상서와 진언을 문란하게 하여 이 상황이 고착화되도록 한 자를 탄핵하였다. 조사를 통해 이부사와 함께 벼슬아치의 어진 정도를 따져 봄으로써 관리의 승진과 파면을 결정하였다. 대감옥에 있는 중범죄인을 심문해 조정 밖으로 내보내고 형부와 함께 죄인을 문초하였다. 내지(內地)로 봉해져도 외지(外地)를 돌며 칙령에 따라 일을 하였다. 13도 감찰어사는 주로 내외 모든 기관의 부정을 살피고 그 내용을 모아 서면으로 탄핵하거나 비밀 상주문으로 탄핵하고······ 이와 같은 내용을 도찰원 총헌강(總憲綱)으로 삼았다.’
경국 도찰원에서는 북위 조정과 같은 위세는 없었다. 우선 감찰어사가 각 군현을 순시하도록 하는 권한을 없앴다. 사건 심사 권한을 형부와 대리사로 이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군을 감찰하는 것과 벼슬아치를 암암리에 감찰하는 유의 대부분 권력은 진평평이 건립한 감찰원이 가져가서였다. 이에 현재 도찰원의 기능은 풍기와 규율과 관련해 천자의 눈과 귀 역할을 하되 실질적 권력 없이 입만 놀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관리는 누가 하는가? 남자가 한다. 그렇다면 남자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미인을 빼면 권력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도찰원 어사는 자신의 대부분 권력을 감찰원에게 빼앗긴 상태였다. 그러므로 이 기형적이고 방대한 거물에게는 항상 부러워하는 마음과 적대시하는 마음이 공존하했다. 한데 이는 어쩌면 이들 문인이 아주 오래전 역사 속 도찰원의 영광을 그리워하고 있어서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무엇이든 말할 수 있다는 특권에 기대어 언제든지 감찰원 관원을 탄핵하는 상주문을 올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 해도 늙은 절름발이가 항상 독기 어린 눈으로 주시하고 있어 어사들은 오랫동안 본분만 지키는 중이었다. 그러던 어사들인데 왜 갑자기 반란을 일으킨 걸까? 범한은 조심스럽게 접근해 생각해 보았다.
감찰원이 감찰 기구 중에서도 독보적인 곳이라 해도 도찰원의 조정에 대한 잃어버린 영향력까지 대표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여론은 금속도 녹일 수 있다고 하고 세 사람이 모이면 호랑이도 만들어 낸다고 하지 않던가. 범한이 날린 몇천 장의 글 종이 때문에 무려 장 공주가 황궁에서 떠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다시 말해 말만 가지고도 관리 하나를 날려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도찰원 어사는 대부분은 별 볼 일 없는 가문 출신들이었으며 또한 선비들에게는 추앙받는 대상이었다. 과거에는 어사가 상소를 올리면 천하 문인들이 호응을 해주었고, 그들이 말로 공격을 시작하면 조정에서도 조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조사 결과 아무것도 나오지 않더라도 온통 오물을 뒤집어쓴 관원은 더 이상 조정에서 당당하게 지낼 수 없었다.
범한이 소리 내어 싸늘하게 웃었다. 생각을 전환해 보니 무엇이 문제인지 알 것 같아서였다. 감찰원이 신양 쪽과 2 황자 사이를 조사했다는 사실이 외부로 새어 나간 것 같았다. 범한은 형부에서 장 공주의 명령에 따라 자기 양다리를 잘라 버리려던 전임 좌도어사를 명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 공주가 데리고 있던 기생오라비는, 그러니까 자신이 지금 아무도 모르게 조사하고 있는 소위 대단한 인재 하종위는 아직도 도찰원에 있었다.
잠시 후 황궁으로 보냈던 비밀 상주문과 관련해 회답이 왔다. 범한이 황금색 비단 아래에 놓여 있는 함을 잠시 쳐다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이내 함을 열어 보았다. 하얀 백지에는 딱 두 글자만 있었다.
‘안지(安之: 편안히 지내라는 뜻).’
* * *
‘범’은 성씨, ‘한’은 이름이었고, 안지(安之)는 범한의 자(字)였다.
이것으로 범한은 옛날에 자신의 ‘자’를 황제 폐하께서 직접 지어 주셨음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그리고 황제 폐하의 뜻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편히(安) 살 수 없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도리질하고는 목철에게 말했다.
“자칭 청렴하다고 하는 어사들을 조사해 봅시다. 내가 법을 어기고 재물을 탐했다 하니 당연히 그에 따른······ 답례를 해줘야겠어요.”
목철이 무언가 의외라는 생각을 하며 말했다.
“진평평 원장 대인께서 일찍이 분부하신 게 있습니다. 도찰원 상주문에 대해서는 개 짖는 소리로나 여기라고 말이지요. 그러니 신경 쓰지 않으시는 게······. 왜냐하면 황궁 측에서도 감찰원이 도찰원을 조사하는 걸 원치 않으십니다. 보기 안 좋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언로(言路)를 넓게 열어 두기 위해 황제 폐하께서도 감찰원에게 언관을 체포할 권한은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범한이 혀를 찼다.
“단순히 떠들어 대는 선에서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모두 이를 드러내고 날 물어뜯을 준비 중이거든요. 조정의 체면 따위 상관없이 말이죠. 목 주부에게 조사를 맡긴 건, 내가 직접 조사에 나설 수 없는 상황이니 내 문제를 대리사나 형부가 맡을 것입니다. 그러면 황제 폐하께서도 덮으라 하셔도 안 받아들일 테고. 그나저나 1처 밖에 있는 저 담벼락이 무슨 용도라고 했었지요?”
목철은 겉으로 표는 안 냈지만 너무나 기뻤다. 감찰원 소속으로 이런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평소보다 백배는 활기찬 모습으로 명령을 받들고 사남 백작가를 나섰다. 그리고 밀정들을 파견해 도찰원의 어사들이 저지른 불법 행위를 비밀리에 조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