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254화 (254/1,108)

254화

“나를 무슨 성인 보듯 하지는 말아 줘요.”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이어 갔다.

“어찌 되었든 본관도 나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거든요. 아까 내가 내년에 황실 금고를 맡게 된다고 했죠? 그렇게 되면 신양 쪽은 자금줄이 끊어질 텐데 장 공주마마께서는 무엇으로 황자마마를 지원할 수 있을까요? 그분께서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지도록 그냥 놔둘까요? 황실 금고의 회계 상태는 당연히 정리가 잘되어 있을 것입니다. 하나 암암리에 손해를 입은 건 어떻게 하죠? 설마 본관이 그걸 맡은 후 머리가 세도록 걱정만 해야 하는 건가요?”

“장 공주마마께서 먹다 남긴 성대한 잔칫상에서 깨진 식기나 받쳐 들고 있는 짓은 하고 싶지 않단 말이죠!”

“황실 금고는 금광입니다. 하지만 오염된 물구덩이기도 하죠. 장 공주마마께서는 황태후마마의 총애를 받고 있습니다. 한데 나는요? 한낱 신하로서 황실 금고를 맡은 것 자체가 그냥 죄짓는 거예요.”

범한이 고뇌하며 말을 이어 갔다.

“지금은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나를 장 공주마마 대신 희생양으로 삼으려고 하시는 건 아닐까 하고요. 훗날 황실 금고가 비어 있는 일과 관련해서 나는 입이 8백 개라도 할 말이 없을 테니까요. 맞아요, 나도 그런 일은 당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내가 먼저 장모님께서 발 닦으신 물을 그분에게 뒤집어씌워 드리려고요.”

만약 진평평 원장과 범건이 지금 범한이 한 말과 표정을 듣고 보았다면, 분명 엄지를 치켜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녀석, 아직 나이는 어려도 연기력 하나는 끝내주는군! 한낱 신하라고? 그것도 웃기는 소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뒤에 숨은 경천동지할 비밀을 언빙운이 어찌 알까. 그는 그저 범한의 자칭 진짜 속내라는 듣고는 오히려 마음속 깊이 범한에게 감탄할 뿐이었다. 그동안 시답지 않게 보였던 범한 대인이 생각과 달리······ 강직한 신하였다니! 언빙운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건의했다.

“그렇다면 왜 대인께서는 황궁의 제의를 완강히 거절하지 않으신 겁니까? 황실 금고는 확실히······ 너무나 다루기 힘든 곳입니다.”

그러자 범한이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내가 말해 줘도 안 믿을 겁니다. 하나······ 천하 백성을 위해 무언가는 꼭 하고 싶습니다.”

언빙운의 표정은 여전히 냉랭했다. 하지만 마음의 온도는 조금은 상승했는지 불쑥 자리에서 일어나 범한에게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그런 후 차분한 음성으로 부하 된 입장에서 건의했다.

“지금 황실 금고를 건드리는 건 적절치 않은 일입니다.”

범한은 아무 말 없이 언빙운을 바라보았다.

범한의 살기등등한 눈빛을 언빙운은 느끼지 못했다는 듯 말을 이어 갔다.

“이 일이 들쑤셔져서 외부로 알려진다면······ 대인의 최근 계획을 보면 분명 그 어마어마한 담력으로 사천립에게 공문 하나를 쓰도록 하셨을 테고, 대리사 옆 벽에 거창하게 내걸어 천하 사람들에게 알리셨겠지요. 장 공주와 경도 관원들이 황실 금고를 가지고 많은 이득을 챙겼다는 내용의······.”

범한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정말로 그럴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리 담 크게 행동할 수 있는 건 든든한 뒷배가 있어서였다. 그 든든한 뒷배는 황제가 아닌 바로 그 아저씨를 말하는 것이었다.

“쓸데없는 행동이십니다.”

언빙운이 정색하며 말했다.

“적어도 올해 발생한 이재민들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입니다. 황실 금고에서 흘러나간 은전을 고작 한 달여 내에 회수할 수는 없으니까요. 황제 폐하의 결심과 상관없이 대부분의 관리들에게 미움을 사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벼슬자리에서 내쳐져 귀양 가는 관원들이 많아지면 조정 운영에도 차질이 생기지요. 하오나 재난 구제는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되는 일 아닙니까.”

범한이 신중하게 생각을 해보다가 물었다.

“그렇다면 언빙운 대인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이 안건은 잠시 덮어 두시지요. 호부 상서 대인께서 오랫동안 국고를 관리해 오셨습니다. 그러니 분명 방법이 있으실 테고, 남쪽 재난 지역을 그냥 저대로 두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입니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갔다.

“왕계년을 상경에 두는 시간이 너무 짧아 걱정입니다. 북쪽에 있는 이들을 완전히 장악하기 힘드니 최씨 가문 사람들을 완전히 몰아낼 수 없으니까요.”

언빙운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시원하게 답을 주었다.

“하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그의 말에 범한은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자기 기분을 전혀 드러내지 않기 위해 표정 변화 없이 언빙운을 바라보았다.

“대인은 북제에서 유명인 아닙니까. 한데 어떻게 다시 북제로 가겠단 말입니까?”

언빙운이 대답했다.

“제가 수하로 둔 이들은 어떻게 일을 하는지 일일이 지켜보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더 많은 권력을 쥐기 위해 더 많은 실험을 할 거예요. 그런 후 그 권력을 이용해 내가 원하는 일을 할 거고요. 그러니 그사이 많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범한이 언빙운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북제 상경에 있었을 때처럼 언빙운 대인이 나와 함께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물론 이번뿐만 아니라 내년 봄에도 한 번 더요.”

언빙운은 범한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이에 너무 오래 침묵하지 않고 잠시 후 고개를 숙여 두 손을 맞잡고 가슴까지 올려 인사하고는 서재에서 나섰다.

감찰원의 잘생긴 청년 언빙운은 시원시원하고 맺고 끊는 게 확실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범한 대인이 충분한 신뢰를 보여 주었는데도 그로서는 무언가 의혹이 남았는지 서재 문을 나서려는 찰나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제사 대인, 대인께서는 어려서부터 호의호식하며 자라셨는데 왜 세간의 고통받는 백성들을 그리도 중히 여기시는 건가요?”

그러자 범한이 고개를 긁적이며 답해 주었다.

“어쩌면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착한 사람이 되고 좋은 일을 하려고 습관을 들여 놔서겠지요.”

* * *

“언빙운 공자는 참는 데 일가견이 있어 그런가, 어째 심 낭자가 지금 어찌 지내는지 묻지 않는군.”

범한은 석양이 내려앉은 창밖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머문 곳에는 반 정도 가지치기된 관목이 있었고 그는 속으로 한숨을 짓고 있었다. 관리 사회란 역시 갈수록 조심해야 하는 곳이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사남 백작가 저택에도 심후한 실력의 밀정이 숨어 있으니 말이다.

과거 1처에서는 사남 백작가 저택에 밀정을 심어 두었었다. 그런데 범한이 형부에서 자신이 감찰원 제사임을 공개적으로 밝히자 그 밀정은 눈치껏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뒤로 물러났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찰원이 가만히 있을 곳은 아니다. 만약 오죽 아저씨가 아니었다면 범한은 꽃을 심는 아낙이 또 다른 밀정이란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고 그냥 지냈을 것이다.

아까 자신의 말처럼 범한은 성인이 아니었다. 또한 순수한 의미의 호인(好人)도 아니었으며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장 공주에게 대적하기 위해 정작 진짜 실력을 알 수 없는 2 황자마마와도 연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장 공주와 자신이 원수지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둘 사이를 이렇게 만든 근본 원인은 바로 황실 금고였다. 황실 금고는 범한에게는 환생 후 어떻게 해서든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는 섭가의 것이었으므로 범한은 그것에 담긴 의미를 수호해야만 했다. 그러니 누구든 그 앞길을 막는 자가 있다면 인정사정없이 걷어차 치워 버릴 작정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언빙운에게 한 말이 모두 거짓은 아니었다. 그건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자신이 누이에게 말해 준 것과 같은 맥락에서 한 말이었다.

즉 ‘사람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렇다면 범한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는 자신, 아내, 가족, 세상 사람을 사랑했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다른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도 사랑했다. 이는 무슨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는 사랑 같은 것이 아닌 순수하게 내면의 본심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그런데 멍청하지만 부귀영화를 누리고, 돈 있다고 남을 무시하고, 남의 여자를 탐하고, 이것도 인생이다. 성실하지만 비굴하게 살아야 하고, 아침저녁으로 상황이 급변하는 일상을 사는 것, 이 역시 인생이다.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나가고, 수없이 사람을 죽여 천하를 통일하는 것도 역시 인생인 것이다.

범한 역시 부귀, 권력, 미녀를 탐하는 평범한 수컷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 전생의 기억이 있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비교적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이에 그가 생각하는 찬란한 인생이란 자연스럽고 대범하면서도 상황에 따라 독하기도, 부드럽기도 하고 미인들에게 더 다정히 대하고, 더 많은 돈을 벌고 또 이 아름다운 세계의 경관을 더 많이 찾아보는 것이었다.

그러니 가장 우선적으로 생명과 물질적인 삶을 보장받는다는 전제하에서 범한은 이 세상을 아름답게 보려 했다. 하지만 이 세상이 아름다워지려면 먼저 함께 살고 있는 세상 사람들이 마음껏 웃을 수 있어야 했다. 이에 범한이라는 이 ‘가련한 권신’은 시작과 동시에 지쳐 가고 있었다.

만약 담주에 있었을 때처럼 여전히 맑고 깨끗한 소년의 마음씨를 간직하고 있었더라면 범한은 훨씬 더 행복하고 자유로웠을 것이다. 황실 금고니 천하 백성이니 하는 것들은 그의 머릿속에서 단순히 곁가지였을 텐데. 하지만 경력(慶歷) 4년, 쓸데없는 호기심에 사로잡혀 버린 게 문제였다. 정혼자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사랑의 늪에, 가정에 빠져 허우적대게 되었고 그럴수록 더 깊이 빠져만 갔다. 이 세계에서 더 이상 자유롭게 떠돌 방도가 없게 되었다. 이 사실만 봐도 남자가 일찍 결혼하는 건 정말 바보짓을 하는 거다.

* * *

이날 오후, 감찰원 제사 범한은 감찰원 4처 수장 후보 언빙운과 함께했다. 이 둘은 사남 백작가에서 황실 금고, 2 황자, 민생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대화 내용은 경국 내 가장 은밀한 통로로 각각 황궁의 어서방과 진평평 원장 대인의 책상 위로 보내졌다.

진평평의 반응은 단순했다. 감찰원 전체를 통괄하는 자신의 권한을 잠시 범한에게 모두 위임한다는 내용으로 명령을 내렸다. 다시 말해 진평평 원장이 이 명을 거두어들이기 전까지 범한은 이 무섭고도 방대한 감찰원의 역량을 모두 다 이용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어서방에서는 경국의 지존인 황제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보고서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범한이 요 며칠간 벌인 일들에 대해 매우 흡족해했다. 천하 백성과 벼슬아치들이 감찰원을 자신의 개라고 부르고 있는 이상 그 개는 사람을 물어 버릴 용기와 살벌함을 지녀야 했다. 물론 아무 사람이나 덥석 물어서는 안 되었다. 그러니 범한에게 이 개들을 맡긴 장본인으로서 그의 능력이 어떤지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었다.

9개월 전, 진평평 원장과의 대화 후 황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범한이 감찰원을 이어받는 일에 대해서는 묵인했다. 언젠가는 그 아이에게 자신의 진짜 신분을 알려 주어야 하는데. 천자의 혈통이지만 출신 때문에 영원히 용상의 자리에 앉을 수는 없지만 말이다. 한데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그 아이는 지금 자신이 짜놓은 판에서도 만족할 것만 같았다.

오늘 오후 범한과 언빙운의 만남에서 황제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한 대목은 바로 대화 내용이었다. 대화 중 자연스레 흘러나온 정감이 과거의 그 여인과 너무나도 닮아 있어서······. 수척하게 마른 황제의 얼굴 위로 안도의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비록 그 어린놈의 자신을 향한 언사가 조금 불경하기는 했어도 말 속에 숨어 있는 자신을 향한 충성심을 어림짐작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어서였다.

황제가 뒤에 있던 태감을 잠시 쳐다보며 미소 짓는 얼굴로 말했다.

“홍사양, 네가 보기에 범한은 어떠하더냐?”

홍사양 태감이 살짝 몸을 굽혔다. 그러고는 늙은 얼굴 위로 아무런 감정적 동요도 내보이지 않고 답했다.

“지나치게 작위적이옵나이다.”

그러자 황제는 말없이 이맛살만 찌푸렸다. 그리고 속으로 범한이 자신에게 거짓으로 연기를 하는 중인지 생각해 보았다. 하나 듣기로는 오죽은 줄곧 남쪽에만 있다 했다. 그렇다면 경도에서 자신이 계획한 일을 알아차릴 사람은 없을 텐데.

“황제 폐하, 어찌 처리하실 생각이시옵니까?”

홍사양 태감이 물었다. 당연히 2 황자와 장 공주를 두고 한 말이었다.

황제가 싸늘하게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아직 본극이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어찌 그리 빨리 끝낼 수 있겠느냐?”

경국 황제는 국고 부족 문제로 계속 골머리를 앓는 중이었다. 신양 쪽을 향해 의심을 품고 있기는 했지만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자신은 늘 충효를 강조해 왔으니 이번 일이 황태후의 건강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이면에 있는 모든 걸 잔인하게 공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찌 되었든 이운예는 경국에게 과보다는 공이 더 컸고 2 황자는 자신의 친아들이니까 말이다.

황제는 이제야 진평평이 했던 말을 진정으로 믿게 되었다. 어떤 일들은 젊은 사람이 맡았을 때 무모해 보일 수는 있어도 박력 있게 충분히 능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지적 말이다. 범한뿐만이 아니었다. 황제는 이제야 언빙운이라는 젊은 관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자신이 처음부터 너무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 같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