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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253화 (253/1,108)

253화

범한이 눈썹을 움찔했다. 하늘이 높고 공기가 상쾌해지는 가을이면 경도 사람들은 국화를 감상했다. 한데 황족에게도 그런 취미가 있었다니. 이씨 일족의 대대적인 모임이니 당연히 자신도 가야만 했다. 그런데 자신이 최근에 경도에서 벌인 일들을 생각하다 보니 퍼뜩 무슨 생각이 떠올랐다.

‘저 늙은 여우들이 지금 이 시각에도 국화 감상하듯 내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임완아는 갑자기 조용해진 상공을 의식하지 못했는지 진지하게 말했다.

“요즘에는 마작을 못 했고 국화는 아직 피지도 않았고. 정말 무료해요. 혼인 전에 상공이 내게 약속한 책 말인데요, 그거 언제 써줄 건가요?”

범한이 기분이 언짢아 인상을 팍 썼다. 《홍루몽》이나 베끼고 있을 정신이 없는데 말이다. 이에 쓴웃음을 지으며 에둘러 답했다.

“이런, 이 소인을 용서하시옵소서!”

임완아가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원고를 재촉하자 범한도 더 이상은 방에서 아내와 노닥거릴 수만은 없었다. 이에 엉덩이에 불난 사람처럼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와 피해 버렸다.

* * *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샛길로 도망치던 범한이 저택의 넓은 정원을 지나다가 얼굴을 가리고 웃고 있는 여종 몇몇과 마주쳤다. 그제야 범한은 지금 이러는 건 옳지 않은 것 같아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이어 유명 인사로서, 유명한 관료로서의 풍모를 드러내려 했다. 하지만 몸을 꼿꼿이 편 채로 있은 지 1각(15분)도 안 되어 다시 자세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이에 이를 악물며 어려서부터 멋지게 살기로 마음먹어 놓고 무엇 하러 저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답답한 마음에 끄응, 소리를 내었다가 이내 짧은 곡조를 읊조리더니 냅다 뛰어 곧장 자신의 서재로 꺾어 들어갔다.

처와 나눈 평범한 대화였지만 범한은 그 속에서 몇 가지 유용한 정보를 알아냈다. 그런데 범사철의 최근 행보는 조금 기이해 조금 걱정스러운 마음에 이맛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리고 《석두기》 문제에 관해서는 북제 황제가 비밀을 지켜 주기로 한 사실이 생각났다. 이에 그에게 은혜를 입은 것도 있고 하니 한 회 정도는 써서 보내 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북제 황제에게는 자신이 《석두기》 작가란 사실을 굳이 숨길 필요가 없으니 범한은 감찰원이 이용하는 비밀 서한 교환 통로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방 밖이 아직 어둠으로 완전히 휩싸이기 전 약속대로 언빙운이 나타났다. 범한은 그가 건네준 자료를 읽으며 자기도 모르게 관자놀이를 누르기 시작했다.

그가 오늘 한 일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목철이 보낸 사건 기록 파일을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사철립과 어떻게 할지 기조를 정한 후 집으로 돌아왔고 이어 마누라와 이야기도 나누어 보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언빙운 공자와의 대화가 남아 있었다. 하루 동안 이리도 많은 일을 해야 하다니. 이리 보니 ‘권신(權臣: 권세를 쥔 신하) 양성’ 과정은 정말이지 고생스러운 길인 것만 같다.

“체포하라던 이는 모두 잡아다 놨어요. 일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르겠군요.”

범한이 자료 내용은 보지도 않고 담담하게 물었다. 앞서 진행되었던 ‘쥐 잡기’는 경도 관료 사회는 건드리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군더더기 사건으로 연막을 쳐가며 조심스럽게 2 황자의 숨은 세력들에게 접근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번한은 탐색 차원에서 두 명의 관원을 구류하기도 했다. 이 두 관원은 품계가 낮은 이들이었다. 언빙운이 2 황자와 장 공주 사이에서 어떤 관계가 있는지 확인을 해봐야 할 중요한 인물이라고 여겨서였다.

언빙운이 의자에 앉으며 냉정한 표정으로 범한 앞에 놓인 자료를 가리켰다.

“다 끝냈습니다.”

범한이 깜짝 놀라며 대꾸했다.

“벌써요?”

한데 이번에도 자료는 보지도 않고 곧장 되물었다.

“결론은요?”

언빙운이 냉랭하게 말했다.

“신양 쪽은 매년 북제와 동이성에 매우 큰 액수에 달하는 밀무역을 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봤을 때는 손해이고 이는 동궁 태자마마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가장 큰 금액은 모두 명가를 경유해 2 황자마마께 가고 있습니다. 그 돈으로 조정 관원을 매수하고 각 로(路)에 있는 대리(大吏: 지방 수석 장관)와 교분을 맺고 있더군요. 그러니 대인의 판단이 맞으셨습니다. 2 황자마마 배후에 장 공주마마가 계셨습니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명가라니요? 최씨와 인척 관계에 있는 명가를 말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리 큰 금액이 어떻게 황실 금고에서 2 황자 손으로 들어갈 수 있단 말입니까?”

범한이 가르침을 구했다.

“당연히 경도를 통해서는 안 되겠지요. 강남 쪽으로 돌아서 들어간다고 합니다. 중간에 몇 개의 황실 상단을 경유해 돈을 아래쪽으로 분산시키고 그 아래쪽에 있는 돈을 다시 위쪽으로 보내면, 그 모든 돈이 2 황자 전하께 가는 것입니다.”

언빙운이 범한을 잠시 바라보고는 말을 이어 갔다.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칩니다. 관련 내용은 자료에 모두 적혀 있고요. 하온데 대인, 불분명한 것이 있으니 직접 보시는 게 나을 듯싶습니다. 말로 하기에는 복잡하거든요.”

언빙운의 말 속에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는 느낌이 숨어 있었지만 범한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깊은 사색에 잠겼다. 그리고 자신의 판단이 정확했다는 생각에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고는 멋졌다고 한마디 내뱉었다.

범한이 반문했다.

“장 공주와 2 황자마마께서 은밀히 행동하고 계신데도 우리 쪽에서는 쉽게 알아냈습니다. 그런데도 황궁 쪽에서 이 사실을 모르고 계실 것 같다고 보나요? 그리고 진평평 원장께서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실까요?”

“황궁 쪽에서는 경계는 할지언정 분명 실질적인 증거는 쥐고 있지 않습니다.”

언빙운이 서서히 눈을 감으며 말을 이어 갔다.

“대인, 죽은 1처 수장 주격은 줄곧 장 공주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대인께서 1처를 장악하신 게 아니고 나머지 부서가 적극 협조하지 않았다면 절대 알아낼 수 없는 것으로······. 그러니 지금 상황에서 대인께서 정말로 이 안건을 공개하신다면 경도에는 필시 큰 혼란이 올 것입니다.”

언빙운은 냉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범한은 그 말 뒤에 숨은 냉혹함을 감지해 낼 수 있었다. 정보를 이렇게나 빨리 찾은 건 감찰원이 확보한 무시무시한 자원 덕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언빙운이라는 인물의 탁월한 능력이 더 많이 발휘된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언빙운은 자신이 조사한 사건 때문에 평화로워 보이는 경국 조정에 일대 혼란이 일어나는 걸 전혀 원치 않고 있었다.

그러니 결론부터 말하자면 언빙운은 범한에게 충성하는 게 아닌 황제에게, 경국에게, 감찰원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는 것이었다.

범한이 언빙운을 잠시 보고는 말했다.

“이 일을 그냥 덮는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습니까?”

그러자 언빙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아는 건 이 일이 공개되었을 때 가장 난처해지실 분이 대인의 부인이란 점입니다.”

사실 상류층에 있는 절대 다수는 말을 안 했을 뿐이지 범한의 아내가 장 공주의 여식인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범한이 이 일을 긁어 부스럼을 만들겠다고 작정한다면, 어찌 되었든 분명한 건 황제 폐하께서 그 어느 때보다도 훨씬 사납게 반응하실 것이고, 임완아의 처지도 난처해질 것이란 점이었다.

범한이 경도로 돌아온 후 한 행동들은 글 종이 사건으로 장 공주를 내몬 상황을 더 견고히 보완하고, 황궁 내 모순된 실책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이로써 범한이 원했던 결과는 어쩌면 다른 속셈이 있을 황제 폐하를 압박해 단시간 안에 장 공주가 쥔 권력을 박탈해 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내 아내를 존중합니다.”

범한이 싸늘하게 언빙운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하나 아내가 곤란해진다고 해서 내 행보를 늦추지는 않을 것입니다.”

언빙운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무언가 의혹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하관은 바로 그 점이 이해가 안 됩니다. 대인, 대체 무엇이 하고 싶으신 것입니까?”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에요.”

범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 창가로 걸어가 서서히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정원 한쪽 귀퉁이에 있는 한 아녀자가 키 작은 나무의 가지며 잎을 관리하고 있었다.

“첫째는 매우 단순한 이유 때문이에요. 지금 조정에 은전이 모자랍니다. 남쪽의 큰 강이 오랫동안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았답니다. 올해 제방이 무너져서 몇십만 명이 수몰되어 죽었지요. 비록 직접 목도한 것은 아니나 생각만으로도······ 너무 끔찍했습니다.”

“그런데 재난 구호에 쓸 은자를 어디서 구해야 할까요? 내 아버님께서 요 며칠 그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계시답니다. 현 조정의 재정 상황은 역대 조정과는 상황이 다릅니다. 장기간 군사를 동원하느라 대량의 금전과 식량을 소모한 상태지요. 재정의 원천지가 괴이한 건 말할 필요 없다 쳐도 국고로 들어오는 1년 수입 중 상당히 많은 액수는 황실 금고에서 충당되어야 하더군요. 황실 금고는 황제 폐하의 곳간이나 대인과 나도 알다시피 실제로는 섭가 여주인의 유산이지요. 한데 그 황실 금고가 벌인 사업이 끊임없이 은전을 벌어들여야 경국도 지탱될 수 있답니다.”

범한이 고개를 돌려 눈을 가늘게 뜨더니 언빙운을 바라보았다.

“한데 장 공주마마는 권력을 이용해 장난질 치는 걸 좋아하십니다. 그동안 황실 금고의 은자가 차츰 관원들 손으로 들어갔지요. 은전은 장 공주마마와 관리들 사이에서 충성과 권력을 맞바꾸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참 역겹지 않습니까. 폐하의 은전을 쓰는 것이고 그분의 신하를 빼앗아 가는 것이니까요. 은전이 황실 내부에서 그리고 관원들에게 소모되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 세상에 은전이 필요한 곳이 있을 때 대체 어디에서 그 은전을 구해야 할까요?”

“은전은 은전일 뿐이지만 어찌 쓰느냐는 큰 문제이지요. 그리고 관리들이 집 안에 쟁여 놓고 곰팡이나 슬도록 하게 하느니 차라리 그것을 내놓도록 해 강의 제방을 보수하는 데 쓰이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니 최씨 가문과 2 황자마마에 대한 조사를 급히 진행한 거예요. 우리의 장 공주마마와 독서에만 열중 중인 척하는 2 황자마마가 우리 경국의 은전을 맘껏 다 써버리시는 걸 막기 위해서 말입니다.”

말을 마친 범한이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흡사 개탄에 빠진 사람처럼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이 사실이 폭로되어도 황제 폐하께서는 자신의 친누이를 엄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 지난번 황궁에서 쫓아내신 것처럼 물의가 이는 건 신경을 쓰시는 분이니, 황실 금고에 대해 제대로 조사를 하시고 또 2 황자마마에게도 따끔하게 훈계를 하시겠지요. 하나 나는······ 그분이 내시는 화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내가 쓸데없는 짓을 했다며 싫어하실 것이고 이내 감찰원에서 내쫓아 어디 먼 데로 보내시겠지요.”

범한이 기지개를 켜더니 얼굴에 순진무구한 웃음을 지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랍니다. 그래도 황제 폐하께서 나를 담주로 돌려보내 주시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언빙운이 경직된 표정으로 고개만 살짝 갸우뚱했다. 자기 앞에 있는 제사 대인을 마치 모르는 사람인 양. 그런 그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하오나 대인, 내년에 황실 금고를 맡게 되시지 않습니까. 그때 다시 조사하시면 명분도 얻고 일도 더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지 않을까요?”

범한이 잠시 웃고는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듯이 대답했다.

“우리 경국에 남아 있는 양식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황실 금고에서 밖으로 새어 나가는 은전을 막아야 해요. 그래야 재난을 당한 남쪽 백성에게 죽이라도 몇 그릇 더 먹일 수 있지요. 일이란 건 그냥 기다릴 수는 있습니다. 하나 밥은 한 끼라도 먹지 못하면 허기가 밀려오기 마련이지요.”

언빙운이 범한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자기 앞에 있는 이분이 대체 원래 알던 음험한 권신인지, 아니면 대자대비하여 타인의 평가와 상관없이 기꺼이 자기희생하는 큰 성인인지 똑똑히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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