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집으로 돌아와 보니 섭령아와 유가 군주는 모두 돌아간 후였다. 범한이 방으로 돌아가 사기에게 차를 내오라 소리쳤다. 일단 사기를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서였다. 이 가을에 사기는 사사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봄 내내 집을 비웠다고 원망을 해대는 중이었다. 방 안에 잠시 자신과 처만 남게 되자 범한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최근에 황궁에서 무슨 소문이 돌고 있나요?”
임완아는 창가에 앉아 햇살을 맞으며 수를 놓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범한의 질문에 살짝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무슨 일이 있나요?”
해 질 녘이었다. 햇살이 창을 넘어 들어와 실내를 비추었지만 투명하고 맑은 빛은 아니었다. 범한이 임완아를 바라보며 이맛살을 강하게 찡그렸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임완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매끄러운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이런 햇살은 몸에 안 좋아요. 무엇 하러 여기서 수를 놓습니까?”
임완아의 얼굴이 조금 창백했다. 어쩌면 어젯밤에 잘 쉬지 못해서일 거란 생각에 고개를 숙이고 키득키득 웃고는 들고 있던 수틀을 뒤로 숨겼다.
“수는 다 놓으면 보여 줄래요.”
범한은 아내의 유약한 모습과 긴 속눈썹을 바라보고 있자니 절로 양심의 가책이 들었다. 봄부터 경도를 떠나 있느라 작년보다 아내를 덜 챙겨 주었던 터였다. 조강지처가 싫증 나서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당당한 범한 대인은 아직까지도 첩을 두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저 너무나 많은 일이 그의 마음을 구속하고 있어 집안일을 많이 돌보지 못한 것뿐이었다.
임완아는 앞서 범한의 질문이 생각나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다시 입을 뗐다.
“최근에 황궁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 특별한 건 없었답니다. 그런데 그런 건 왜 묻는 거죠?”
범한이 씁쓸하게 웃었다.
“당신의 무정한 외삼촌께서 내게 감찰원 1처를 맡기셨어요. 대체 얼마나 많은 관원에게 죄를 짓게 될는지, 원. 한데 그들이 섬기는 진짜 주인들은 모두 황궁 안에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나로서는 관심을 더 가질 수밖에요.”
임완아의 신분은 특수했다. 황태후께도 총애를 받고 있고 황제 폐하도 그녀를 볼 때면 따사로운 눈빛으로 바라봐 주시고. 그러니 황궁에서 임완아의 지위는 범한이 애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높았다. 현재 황제 폐하께 딸이 없어 경국에 진짜 공주가 없다 보니 임완아의 지위는 공주와 거의 다름이 없었다.
임완아가 생각을 해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염려 놓으셔요. 황제 폐하께서 상공을 총애하시는 거 모두가 알고 있어요. 그러니 마마님들께서도 좋은 이야기밖에 안 하세요.”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황제 폐하를 뵌 건 겨우 몇 번뿐입니다. 그러니 그 총애니 뭐니 하는 말이 어떻게 나온 건지 당최 모르겠어요. 그러니 황제 폐하께서 당신을 총애하신다면 가능성 있는 이야기이지만 나에 대해서는······ 그냥 당신을 예뻐하시니까 덩달아 나도 예뻐해 주시는 것뿐이라니까요.
임완아의 눈동자에 잠시 범한을 향한 사랑이 잠시 스치더니 그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상공은 늘 그런다니까요.”
임완아가 말을 이어 갔다.
“숙 귀비마마께서 요즘 상공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세요. 의 귀빈께서는 알잖아요, 이 집안과 친척 관계이신 거. 그러니 항상 당신 편을 들고 계시죠. 다만 황후마마께서는 여전히 평소처럼 담담하게 반응하고 계시고. 그 밖에 비로 계신 다른 마마들께서는 황궁 내에서 말을 할 자격도 없으시니 나도 그분들 말은 그냥 흘려 버리는걸요.”
범한은 아내의 판단을 믿었다. 그가 훗날 감찰원을 모두 거머쥔다 해도, 황궁이 그의 손이 닿지 않는 삼엄한 곳일지라도 임완아는 자신을 위해 가장 믿을 만한 눈과 밀정이 되어 줄 것이었다. 그리고 숙 귀비가 자신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한 건 다름 아닌 범한이 그녀에게 인정을 팔았기 때문이었다. 은전 따위는 사용할 필요도 없는 말 몇 마디로 말이다.
“영 재인께서는 무어라 말씀하셨나요?”
범한이 자기 질문에 설명을 덧붙였다.
“나와 1 황자께서 길을 두고 다툰 일이 진즉에 황궁으로 전해졌을 거 아닙니까.”
그러자 임완아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영 재인마마께서는 상공은 거들떠도 안 보실걸요. 어려서부터 나를 가장 아껴 주셨으니까요. 그래도 상공과 1 황자마마를 놓고 토끼 두 마리가 소란을 피웠다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한쪽에게 곤장 50대를 치실 거란 말은 하셨답니다.”
그러자 범한이 깜짝 놀란 척하며 말했다.
“부인, 황궁에서 맞는 곤장은 정말 견딜 수 없게 아프답니다! 부디 이 남편을 위해 말 좀 잘해 주구려.”
임완아는 범한의 장난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한마디 꾸짖고는 말을 이어 갔다.
“남들에게 미움 살 행동은 자기가 다 해놓고는 그 뒤처리는 나한테 해달라니!”
범한이 아내의 자그마한 손을 잡으려 하다가 답답하고 괴로워하며 말했다.
“대체 뭐가 그리 급한 일인데 그럴까?”
범한은 말을 마치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 한데 문득 자신이 아까부터 잊고 있었던 큰 인물이 생각나 살짝 근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황태후마마는 알현했었나요?”
임완아가 손을 머뭇거리다가 잠시 후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눈빛에 이해가 안 된다는 기색과 암담함을 담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알현했습니다. 할마마마께서는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요.”
줄곧 황궁에만 있는 황태후는 그야말로 황실 내 진짜 권력자였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범한은 몇 차례 입궁했었지만 공교롭게도 단 한 번도 황태후를 알현할 기회가 없었다. 심지어 부부가 함께 두 번이나 입궁을 했는데도 황태후마마께서는 병환을 이유로 만나 주지 않았다. 임완아 혼자 입궁을 하면 그 황태후란 노인은 무척이나 좋아했다. 임완아를 품에 안고는 “우리 보배!” 하고 불러 대면서 말이다. 그래서 황태후가 눈에 띄게 범한만 소원하게 대하자 임완아는 무언가 모르게 불안하고 답답했다.
범한이 속으로 싸늘하게 웃었다. 그 노인에 대해 드디어 무언가를 알아챘기 때문이다. 하나 그렇다 해도 범한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임완아가 그의 두 눈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번 령아가 입궁한 일에 대해 오늘 말해 줬어요. 상공, 당신이 요즘 공무를 보는 데 어려움이 많다는 거 다 알고 있어요. 한데 당신은 사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있어요. 그녀를 이용하는 것처럼 보이던데 오히려 그녀의 마음을 기억해 두기 위한 구실로 삼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요. 어젯밤에 내게 말해 준 거 사실은 너무 무서웠어요. 2 황자 오라버니······께서는 부드럽고 상냥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지독하게 뒤틀린성격을 지니셨거든요. 어쩔 수 없이 그분을 조사하는 거겠지만 지금처럼 망설임이 너무 많으면 안 될 것 같아요.”
범한은 걱정 어린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당신이 어렸을 때 2 황자마마께 ‘돌머리’라는 이상한 별명을 지어 줬을 줄은 몰랐어요.”
“2 황자 오라버니는 상냥해 보이셔도 자신이 확신해 버린 것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세요.”
임완아가 다시 걱정스럽게 말했다.
범한은 부부 사이에서는 항상 신의와 성실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사는 인생, 한 이불을 덮고 사는 사람에게조차 조심하고 경계하며 살아야 한다면 그런 삶은 어찌 되었든 처량한 거라 생각했다. 이에 범한은 자신이 2 황자를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내에게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임완아가 걱정하기 시작하자 그녀를 안심시켰다.
“실은 이건 다 2 황자마마를 위해서 하는 일이예요. 지금 상황을 보니 조정의 일부 신하들에게 그분이 현혹되셔서 현 상황을 제대로 못 보고 계신 것 같아요. 황제 폐하께서는 지금의 태자 전하께 보위를 물려주기로 결심하셨는데 말이죠. 그러니 지금 누구라도 2 황자마마를 위해 나서야 합니다. 그분이 정말로 호랑이 등에 올라타시게 된다면 그때는 스스로 내려오려 해도 못 내려오시니까요.”
그러자 임완아가 달콤하리만치 사랑스럽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어쩌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가요? 분명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수를 냈을 텐데 말이죠.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 가면서요.”
참으로 총명한 사람이야. 범한은 하마터면 이 말을 내뱉을 뻔했다. 그는 자신이 연기파 배우일 뿐임을 잘 알고 있었다. 유치한 수준의 정치력을 오로지 냉혈함, 무정한 마음 그리고 겉으로만 따스한 사람인 척하는 것으로 보완하고 있는 중이었다. 범한이 두 손을 가슴팍까지 모으더니 아내를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여 절했다.
“임완아 대(大)책사님을 제 어찌 따라가겠나이까. 지상 최대의 암투가 벌어지는 곳에서 자라셨으나 그곳에서 도망 나온 선녀셨군요.”
임완아가 화를 내며 범한을 꾸짖었다.
“왜 황궁을 그런 식으로만 보는 거죠?”
그러자 범한이 웃었다.
“성현께서 말씀하시길 이 세상은 기루 아니면 황궁이라 했습니다. 온통 어둠에 잠긴, 그야말로 사람 살 곳이 아닌 곳이라고 말이지요.”
임완아는 순간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리고 기분도 조금 나쁘고 해서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그제야 범한은 황궁에서 자란 자기 아내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음을 알아차리고 그녀에게 웃으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두 사람 사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임완아가 속으로 무언가를 꼼꼼히 따져 보기 시작해서였다. 잠시 후 그녀는 감동 같은 걸 받은 상태였다. 비록 자신의 생모가 장 공주이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 출가한 여자 중에서 남편에게 이리 존중받는 여자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더군다나 남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들은 여자가 있다는 이야기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터였다.
임완아가 따스한 음성으로 말했다.
“황궁은 상공의 생각과 같은 그런 곳이 아니에요. 외삼촌인 황제 폐하께서도 여색을 탐하지 않는 명군이시랍니다. 황궁에 계신 황족들은 체면을 깎는 꺼림칙한 일은 하지 않으세요. 그러니 예전에 상공이 언급했던 소설 속 수단 같은 건 감히 쓰지 않으셔요. 또 할마마마의 눈이 항상 지켜보고 계시니까 누구든 천자의 혈통을 해치려 한다면 그분께서 절대 용서치 않으실 거예요.”
범한은 그녀의 말에 마음의 동요가 일었지만 마음은 오히려 더 편해졌다.
임완아가 웃으며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매우 엄한 분이세요. 그런데 마마님들께서 총애를 더 받으려 다투신다고요? 편애하지 않으시는데 어찌 싸움이 나겠습니까? 황후마마께서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으시니 다른 마마님들은 그저 마작에나 열중하시는 수밖에요. 서로 지지 않으려 하시고요. 그러니 실은 일반 황족들과 별반 차이가 없어요.”
범한은 깜짝 놀랐다. 황궁 안에서 이런 화목한 풍경이 벌어지고 있다니. 자신이 전생에 보았던 황궁 내 여인들의 원망 서린 글들은 이제는 전혀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이에 범한이 살짝 자조적인 느낌으로 고개를 내젓고는 웃었다.
“그러니 완아, 당신의 마작 실력이 그렇게나 좋은 거였군요. 그래서 사철이, 저 괴물 녀석이 당신과 겨루면 겨우겨우 비기는 거였고요.”
마작 이야기가 나오자 임완아의 얼굴에 잠시 이채가 흐르더니 범한이 깜짝 놀랄 정도로 펄쩍 뛰었다. 범한이 앞으로 나아가 그 이채를 세세하게 살펴보니 은은하고 매끄러운 빛이 속으로 수렴되고 있는 것이 영롱한 옥과 같았다. 이름하여 ‘소박하고 진실한 고수의 빛’이었다.
* * *
임완아가 촉촉한 눈동자를 쓱 굴려 불경한 상공을 째려보았다.
“그냥 손이 근지러웠을 뿐입니다. 상공에게 시집을 왔는데 상공은 얼굴 보기 힘들 정도로 매일 바쁘기만 하니. 하나 운이 좋아 도련님과 같은 마작의 천재를 만나게 된 거지요.”
임완아가 이를 악물고 빠드득 갈았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고 소맷자락을 걷어붙인 후 다른 한 손으로 주먹을 매만지며 말했다.
“사철이 고 녀석은 요즘 대체 어디에 가 있는 거랍니까! 마작판에는 나타나지도 않고! 감히 제 어머니를 내게 붙여서 사람 벌받는 기분이나 느끼게 하고 말이야! 어머니께서 나를 너무 공손히 대하시는 바람에 꼭 내가 시어머니가 된 기분이라니까요!”
범한이 그녀의 작고 오뚝한 코를 비틀며 한마디 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범한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 갔다.
“새어머니인 유씨께서는 당연히 당신 시어머니가 아니지요. 당신이 너무 앞서 나가서 생각한 거예요.”
그러자 임완아가 잔뜩 원망 섞인 표정을 하고는 말했다.
“날 왜 그런 사람 취급해요!”
그러고는 갑자기 화제를 바꾸어 말을 이어 갔다.
“며칠 뒤에 국화를 감상하러 갈 거예요. 예년처럼 규칙에 따라 황궁에 계신 마마님들께서 서산에 가실 거예요. 하나 올해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고 하실지는 나도 아직 몰라요. 가는 건 확실한데 어찌 가야 하는지를 모르는 거죠. 아마도 며칠 뒤 황궁에서 내관이 나와 말을 전해 줄 거예요. 그러니 잊지 말고 기억해 줘요.”
“국화 감상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