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호우가 내리는 가운데 범한은 돌계단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목풍아에 대해 심한 비평을 쏟아 내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뒤쪽에서 호기심 어린 섭령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승님, 감찰원에서 일하는 걸 보니 조금 황당합니다. 벌건 대낮에 저리도 별 볼 일 없는 직급의 관원과 줄다리기라니요. 저리 체통 없는 행동을 백성들에게 보이면 조정의 체면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범한의 비 모자 가장자리로 빗물이 내리치고 있었다. 이에 모자 가장자리는 아래로 꺾여 범한의 얼굴을 반쯤 가린 상태였다.
“관리 스스로가 체면을 차리지 않으면 조정도 저들의 체면을 세워 줄 필요가 없습니다.”
범한이 평온히 말을 이어 갔다.
“령아 아가씨, 저자를 하급 관원 정도로 취급하면 안 돼요. 1년에 황궁에서 지출하는 비용 중 5천 냥이 넘는 은자를 빼낸 자입니다. 그동안 대통방에서 많은 이득을 봐왔지요. 그것도 액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요.”
섭령아는 마차 창가에 몸을 반쯤 기대고 있던 터라 이마 부분의 머리카락이 빗물에 젖어 있었다. 그런 그녀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오늘 범한의 저택으로 가서 놀 생각이었는데 길 위에서 범한과 마주치고 거기에다가 이런 구경까지 하게 되었다. 그리고 별거 아닌 것 같은 하급 관원이 그리도 많은 은전을 챙겼다는 걸 알게 되다니.
이때 목풍아 일행이 겨우겨우 검소사에서 빠져나와 범한 앞까지 와 있었다. 그사이 대진은 빗물이 고인 바닥에 드러누운 채 목풍아 일행에 의해 억지로 질질 끌려 나왔다. 참으로 처량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자 대진의 심복들이 다시 그들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두 대의 마차가 지닌 힘과 권세를 알아차렸는지 감히 경솔한 행동까지는 저지르지 못했다. 한편 경도 백성들은 범한과 등자월의 차림새를 보고는 이들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그리고 비옷을 입은 이들이 뿜어내는 싸늘한 기운을 느꼈는지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대진은 매우 억척스러운 사람이었다. 입고 있는 관복이 물에 흠뻑 젖고 산발이 되어 머리카락이 얼굴에 감겨 버린 꼴이 말이 아닌 상태인데도 아까보다 더 크게 소리를 질러 댔다.
“야, 이 감찰원 놈들아! 이 몸 돈을 그리 처먹고도 아직도 모자라느냐! 본관을 꼭 형부로 끌고 가서 은전을 탈탈 떨어내야 성이 차냔 말이다!”
주변에 몰려 있던 속사정을 모르는 백성들은 그의 말만 듣고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 줄 알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한데 범한은 눈을 반쯤 뜨고 빗속에 엎어져 두 다리를 굴러 대며 도살되기 직전 돼지처럼 막판 몸부림을 치는 관리를 바라만 볼 뿐 급히 그자의 입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감찰원은 천하 백성들에게 어두침침한 존재다. 대진이 자신들을 향해 욕설을 내뱉는다 한들 더 나빠질 평판도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고작 작은 고양이 한 마리 잡으러 온 것뿐이었다. 그러니 중요한 건 이번에 부하들의 일 처리 능력이나 확인하면 되는 것이었다.
부끄러움과 분노가 섞여 있는 목풍아의 얼굴을 보며 범한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물었다.
“왜 한밤중에 저자의 집으로 가서 잡아 오지 않은 건가? 오늘 비가 내리기는 해도 대통방에는 사람이 많으니 쉬이 소란이 일 수 있다는 걸 알았을 텐데.”
목풍아는 순간 깜짝 놀라 얼른 새로 만들어진 규칙부터 세세히 곱씹어 보았다. 분명 범한 대인이 다음부터 사건 처리를 할 때는 가급적 광명정대하게 할 것을 주문했고 그래서 검소사로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물론 이번에 멋지게 처리해 이름도 좀 날릴 생각이었다. 만약 과거 방법대로 했다면 자신도 한밤중에 급습해 체포해 왔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번에 자신이 잘못한 거라고?
범한이 목풍아에게 변명할 여지도 주지 않고 할 말을 이어서 했다.
“대낮에 와도 물론 천막을 폐쇄하고 사람을 데려갈 수 있겠지만 이런 식으로 하면 대진을 감찰원까지 조용히 데려갈 수 있을 것 같은가? 게다가 공문에 적힌 죄목까지 읽다니 자신을 무슨 대리사 관리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일이 있을 때마다 내가 일일이 따라다니며 가르쳐 줘야 하는 것인가?”
범한이 날카롭게 쏘아 대자 목풍아는 그때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고통스럽게 앓는 소리를 냈다. 일단 대진은 튼튼한 뒷배를 가진 자니 함부로 손을 댔다가는 후환이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제사 대인은 재주가 많은 사람이니 그들이 하는 행동이 눈에 차지 않았을 것이다.
범한이 날카롭게 지적하자 목풍아는 이제야 무언가 알 것 같았다. 제사 대인은 시선이라 불리고는 있었어도 감찰원의 은밀한 수단들에 대해서까지 거부감을 느끼는 건 아니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자기보다 훨씬 더 그런 방법에 열중하는 것 같았다.
이때 대진은 빗물 속에 엎어져 울부짖으며 흙탕물이 묻은 눈으로 목풍아가 누군가에게 보고하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감찰원에서 대인이 나타났다는 걸 알고는 저도 모르게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물론 대진은 범한을 알아보지는 못했다. 대신 그 뒤에 있는 마차에 타고 있는 사람은 알아보았다. 경도 수비 섭중의 무남독녀 외동딸 섭령아. 섭령아는 어려서부터 워낙 경도 거리에서 말을 달리는 걸 좋아해 경도 사람이라면 거의 다 그녀를 알아볼 정도였다.
대진이 즉시 마차에 있는 여인을 향해 울고 불며 애원했다.
“섭씨 가문의 아가씨, 하관의 억울함을 풀어 주소서!”
그러자 너무나도 평온해서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지는 범한을 섭령아가 바라보았다. 하지만 감히 무슨 말을 꺼내기가 뭐해 그녀는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대진은 오늘 자신이 끝장나는 날이란 생각에 하는 수 없이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큰소리로 욕을 하며 대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내 숙부님께서 어떤 분인지 아느냐! 감히 나를 잡아가려 하다니! 내 숙부님께서는 바로······ 웁!”
범한의 눈치를 보고 있던 등자월이 대인께서 대(戴) 내관이란 이름이 거론되는 걸 원치 않으심을 눈치채고는 대진의 입 위에 칼을 들이댔다.
목풍아는 이제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차렸다. 이에 살짝 뻘쭘하게 품에서 줄로 연결된 치도곤을 꺼냈다. 그러고는 매우 우악스럽게 그의 입 앞에 들이댔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그냥 한 대 쳐버렸다. 치도곤은 매우 단단한 재질로 되어 있던지라 대진은 입술이 터져 양쪽 입가에서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니 그는 자연스레 말도 못 하게 되었다.
주변에 있던 백성들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범한은 그 반응들을 못 본 척하며 목풍아에게 말했다.
“저자의 숙부가 누구인지는 내 알 바 아니다. 하나 네 숙부가 누군지는 상관있다. 조금 더 힘써 일하고 목철의 체면은 깎아 먹지 말거라.”
목풍아는 부끄럽게 그러겠노라 답하고는 얼굴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대진을 마차 위로 집어 던지듯 밀어 넣었다. 그런 후 부하들과 함께 구경꾼들 사이에 숨어 있는 대진의 심복들을 잡으러 나섰다. 목철 일행은 이들에게 반항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곧바로 감찰원 관원이 지니고 다니는, 겉을 감싼 쇠몽둥이로 이들을 바닥에 때려눕혀 버렸다.
폭력이 행사되기 시작되자 구경꾼들은 두려움에 비명을 지르며 여기저기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길 한쪽 구석에서 자리를 잡고는 신기한 듯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보았다.
폭우 사이로 보이는 건 비옷을 입은 감찰원들이 몽둥이를 휘둘러 대는 광경이었다. 그들은 흉측한 표정으로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장정들을 계속해서 구타했다. 그런데도 장정들은 감히 반격조차 하지 못했다. 어쩌면 최근 몇 년 동안 감찰원이 쌓아 온 위엄에 기가 죽어서일 수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그야말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장면이었다.
* * *
범한이 저 멀리서 구경하고 있는 백성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고는 뜬금없이 비 모자를 휙 벗더니 자기 마차가 아닌 섭령아의 마차에 올라탔다.
섭령아는 순간 깜짝 놀랐다. 그리고 속으로 ‘다 큰 남자가 무엇 하러 갑자기 내 마차로 뛰어든 거지?’라고 생각했다.
범한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기 위해 섭령아의 살짝 젖은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깜짝 놀라는 척했다. 그리고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섭령아가 손수건을 받아 들고는 머리에 묻은 물기를 닦아 냈다. 그러고는 손수건에서 나는 담담한 향을 맡으며 임완아가 쓰던 것이라 생각하고 잠시 웃었다. 이어 그녀는 조금 전에 왜 그런 일이 일어난 건지 묻기 시작했다.
범한이 소리 내어 잠시 씁쓸히 웃고는 대진이 한 짓을 그녀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섭령아가 호기심에 물었다.
“별것도 아닌 일인데 왜 직접 와서 살펴보신 거죠?”
그러자 범한이 또 소리 내어 잠시 싸늘하게 웃고는 말했다.
“경도는 수심이 깊은 곳이에요. 그러니 저 대진이란 자를 단순히 채소나 파는 관원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저자가 적잖이 탐욕을 부린 건 대담하기 때문이지 든든한 뒷배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저자의 친숙부가 황궁의 대 내관입니다. 내가 여기까지 온 건 부하들이 일을 너무 늦게 처리하게 되면 대 내관에게 이 소식이 전해질 수 있어서였습니다. 만약 황궁에 있는 사람이 직접 나서면 1처 관원들도 어쩌지를 못하니 내가 직접 나선 것이지요.”
섭령아가 맑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버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곳이 황궁이라 그러셨어요. 그래서 우리 형제들에게도 최대한 황궁과는 얽히지 말라 하셨죠. 그런 걸 보면 스승님은 정말 담력이 크시네요.”
“상대가 단순히 태감이니까요.”
범한이 잠시 웃었다. 태감은 원래 인권 자체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러자 섭령아가 반대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황궁에 있는 태감들을 얕잡아 보시면 안 돼요. 저들에게는 주인이 다 있거든요. 만약 스승님이 저들의 체면을 깎는 일을 한다면 이는 곧 황궁에 계신 마마님들의 체면을 깎는 일이거든요.”
범한은 아차 싶었다. 이제야 그 문제가 생각난 거 같았다. 그러다 잠시 후 다시 햇살처럼 찬란한 웃음을 지었다.
“뭐 그런 걸로 겁먹겠습니까! 완아가 황궁에서 중재인 노릇 하는 거 보고 싶지 않습니다. 만약 마마님들께서 문제를 삼으신다면 나 같은 가짜 부마는 황궁으로 불려가 규율에 따라 그냥 곤장이나 맞으면 그만입니다.”
그러자 섭령아가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생각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이 녀석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마차가 사남 백작가 대문 앞에 도착하고 두 사람 모두 마차에서 내렸다. 등자경은 일찌감치 나와 기다리고 있었고 범한은 그에게 분부를 내렸다. 모두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아내에게 심 낭자를 뒷길 쪽에 있는 집에 데려다줄 것을 부탁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다른 하나는 섭령아를 뒤채로 안내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범한은 직접 섭령아에게 손수건을 돌려 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대 내관은 숙 귀비가 아끼는 태감이었다. 그리고 섭령아는 곧 2 황자비가 될 사람이었으니 숙 귀비는 섭령아의 장래 시어머니였다. 섭령아 역시 절반 정도는 대 내관의 주인이 된 거나 다름없었다. 범한은 앞서 섭령아와 한담을 나눌 때 이와 같은 말을 언급했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관계가 얽혀 있으므로 손수건은 줄 수 없으니 돌려 달라고 말했었다. 물론 그때는 쓸 곳이 있었으므로 손수건은 일단 다 쓰고 돌려 달라고 했다.
* * *
이날 경도에는 비가 종일 내리다 해 질 녘이 되어서야 조금 잦아들기 시작했다. 소식을 들은 대 내관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 황궁을 서둘러 나섰다.
그는 황궁 내에서도 매우 잘나가는 사람이었다. 숙 귀비는 글을 쓰는 재주가 상당했는데 황제 앞에서 글을 쓸 때마다 항상 이 대 내관을 곁에 두고 시중을 들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황친과 대신들의 저택에 성지를 전할 때에도 주로 그가 갔기 때문이다. 범한이 생애 첫 성지를 받고 태상사 협률랑으로 봉해졌을 때에도 바로 이 대 내관이 성지를 전하러 왔었다. 황친과 대신들의 저택에 성지를 전달하러 가는 건 정말 많은 장점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 그가 규율을 어기고 출궁했음에도 감히 무어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대 내관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검소사 문 앞에 섰다. 그리고 엉망진창이 되어 있는 내부를 바라보며 그곳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뱉어 내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오른 그가 조카의 수하들에게 삿대질하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내 말하지 않았더냐! 경도에 있는 다른 관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만 감찰원만큼은 비위를 잘 맞추라고 말이다!”
그러자 누군가가 잔뜩 부은 한쪽 얼굴을 감싸 쥐고 울먹였다.
“어르신, 평소에도 홀대하지 않았습니다요. 오늘은 주인님이 은표까지 건넸고 1처 관원도 그 돈을 받았습니다요. 하온데 그들이 꿈쩍도 안 할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