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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248화 (248/1,108)

248화

범한은 일찌감치 알아채고 수신호로 옆에서 이미 칼을 빼 들고 있는 등자월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놀라 의아한 표정으로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반년이나 보지 못했는데 여전히 자신을 스승으로 기억해 주고 있어서였다.

옆 마차에 타고 있는 섭령아는 맑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마차에 타고 있는 범한과 심 낭자를 놀란 모습으로 바라보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역시 이 섭령아의 스승님답습니다. 또 어느 댁의 아가씨를 속인 것입니까?”

범한이 언짢은 기색으로 꾸짖었다.

“스승인 걸 알면서 어째 말투에는 존경이 하나도 안 담겨 있는 겁니까. 이제 곧 2 황자마마의 비가 될 분께서 이렇게나 비가 쏟아지는 날에 아직까지 밖을 쏘다니시다니요!”

최근 범한은 외양간 길 사건에서 2 황자가 맡았던 진짜 역할이 무엇일까 의심하기 시작한 터였다. 그날 연회에 자신을 초대한 건 2 황자였으니 말이다. 물론 사후 조사에서는 사리리가 내놓은 정보에 따라 장 공주와 재상 밑에 있던 모사가 임완아의 둘째 오라버니와 몰래 모의해 벌인 일로 밝혀졌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범한은 2 황자를 향한 경계심은 늦추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호숫가에서 피서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태자와 우연히 만난 일도 2 황자가 꾸민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듯 습관적으로 타인의 마음을 떠보는 사람은 어찌 되었든 광명정대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모두 장 공주가 동궁을 지지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범한도 그중 한 사람이었고 처음에는 그러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 세세히 따져 보니 장 공주의 그와 같은 변태적 권력 욕구가 정품 태자를 지지한다고 한들 그녀에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란 의구심이 들었다.

범한은 세자 이홍성과 일석거에서 식사할 때 의외의 정보를 알게 되었다. 바로 일석거의 막후 주인은 최씨 가문이었다는 점. 한데 최씨 가문의 뒷배는 신양이니 이 몇 개의 구슬을 엮어 보면 아직 증명하지는 못하지만, 심지어는 설명할 수도 없지만 범한은 자신의 직감을 믿고 있었다. 바로 2 황자가 조용히 있는 건 너무 이상한 일이며 그는 황궁 내에 강력한 지지 세력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이다.

만약 2 황자가 정말로 장 공주에게 끈을 대고 있다면 범한이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죄송합니다.”

* * *

비록 2 황자를 벌써 조사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는 낭자가 내년 봄에 2 황자비가 될 사람이기는 했지만 범한은 그녀가 대단히 거슬린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녀를 대할 때 자신의 진심이 드러나지 않도록 표정도 정말 잘 관리하는 중이었다.

섭령아와의 첫 만남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나중에는 자신의 잔재주와 그녀의 대벽관을 가지고 한판 겨루기까지 했었다. 그런데도 범한이 혼인한 후로 섭령아가 자주 범한의 집으로 찾아와 임완아와 놀고, 그렇게 몇 번을 더 마주치다 보니 범한은 이 옥처럼 맑고 깨끗한 여인을 좋아하게 되었다. 일반 대갓집 규수들과는 달리 섭령아에게는 소탈한 기질이 있어서였다.

다만 섭령아가 항상 아내 앞에서 자신을 꼬박꼬박 스승님이라고 부르고 임완아를 언니라고 부르는 건 거슬리기는 했다. 자신이 나이가 한참 더 많은 사람이 된 것만 같아서였다.

마차 안의 섭령아가 흥분한 상태로 말했다.

“스승님, 돌아오셨으면서 왜 저한테 놀러 오지 않으셨어요?”

“스승님, 지금 어디 가시는 거예요?”

“스승님······.”

범한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계속 쏟아져 나오는 그녀의 말을 들어 주었다. 그러다 쓴웃음을 지으며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오공아, 네가 또 까부는구나.”

범한이 호숫가에서 섭령아에게 잔재주를 가르쳐 준 건 실은 섭씨 가문의 대벽관을 훔쳐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 일로 섭령아는 자신을 꼬박꼬박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중이었다. 이에 범한은 웃기기도 하고 기분이 좋기도 한 상태에서 물었다.

“어디 가는 것입니까?”

섭령아가 대답했다.

“완아 언니 보러 댁으로 가는 중이에요.”

말을 마친 섭령아가 범한 옆에 있는 심 낭자를 쳐다보며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콧방귀를 뀌었다.

범한은 제멋대로 드러내는 오만한 기질 그리고 순전히 자기 잣대로 타인을 판단하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그래서 섭령아의 행동이 거슬러 더 이상 그녀에게 말대꾸를 하지 않았다. 한데 섭령아는 범한이 스승임을 내세우면 그걸 잘 받아 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1년 동안 친하게 어울리면서 범한이 세세한 것에 신경 쓰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된 터라 섭령아가 웃으며 말했다.

“화내지 마세요. 지금 감찰원에서 제일 잘나가시는 분이니 미인은 집에 감춰 두고 이런 사람들이 많은 곳까지는 데려오지 않으시겠죠.”

그러자 범한은 잠시 웃기만 할 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섭령아의 말이 끝났을 무렵 막혀 있던 앞쪽이 서서히 뚫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섭씨 가문의 마차가 앞서 나가는가 싶더니 다시 운행을 멈추었다. 섭령아가 무슨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발견한 듯했다.

범한이 손을 내저으며 마차를 앞쪽으로 몰고 가라고 지시했다. 섭령아의 마차 옆에 도착하자 범한은 비옷을 입고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등자월을 포함한 계년조 소속 사람들이 서둘러 범한의 뒤를 쫓았다.

마차에 앉아 있는 섭령아에게 회흑색 비옷을 입고 빗속을 걸어가고 있는 그들이 보였다. 이제 보니 범한은 등시구 지역을 지나가던 중이 아니라 이곳에 일이 있어서 들른 것이었다.

* * *

등시구에 있는 검소사 대진은 매일 부하들이 성 밖에서 채소며 과일을 운반해 오면 그것의 등급을 정하고 시장에 내다 파는 일을 했다. 그리고 동시에 황궁 및 각 왕과 공의 저택에 매일 필요한 채소를 보내는 일도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경국 귀족들의 주방에서 필요로 하는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해 주고 있었다. 한데 그 자질구레한 일이라 할 수 있는 것의 단위가 조금 컸다. 예를 들어 미나리 한 포기나 닭 한 마리는 돈이 되지 않았지만, 미나리 백 포기에 닭 백 마리를 팔면 일석거에서 제법 좋은 자리 하나는 살 수 있을 정도의 액수는 되는 식이었다.

검소사는 관아 축에는 들지 못했다. 품계가 없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물품 공급처가 매우 많은데도 이곳을 직속으로 관리하는 관아 자체가 아예 없었다. 어쩌면 관원들이 경도성으로 채소를 보내 봤자 이득이 남지도 않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일 것이다. 한데 사실 범한은 이와 같은 현상이 최근 몇 년 안에 생겨난 것임을, 신정을 중도 폐기한 것과 관련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갈피를 못 잡고 계시니 아래 있는 기관들도 자연스레 어수선한 짓들을 많이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대진은 검소사의 책임자이다. 그는 몇 년 동안 닭, 달걀, 채소로 돈을 안정적으로 벌어들이고 있었다. 그래서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것들에서 적지 않은 이득을 챙기는 방법을 자기만 안다는 생각에 밤마다 이불 속에서 남몰래 웃는 중이었다. 그가 가장 아끼는 첩이 숙부님께 찾아가 제대로 된 관직을 얻으라고 날마다 부추겼지만, 그는 그때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딴생각을 했다.

‘멋지군! 채소도 나처럼 파는 이는 천 년을 통틀어 나 혼자뿐일걸!’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는 늘 자기 자신을 치켜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그는 웃지도 못했다. 가을비 속에서 감찰원 1처 관원이 그의 자그마하고 불쌍한 관아를 직접 봉쇄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통방에 있는 천막도 막아 버렸다. 대통방에는 채소를 파는 행상들이 있었고 이곳에서는 경도의 3분의 1에 달하는 채소가 공급되었다.

대진이 새파랗게 질려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악귀들을 보고는 우선 자기 얼굴을 두 대 쳐서 웃고 있는 얼굴을 더 온화해 보이게 만들었다.

“이제 보니 1처 대인들께서 오셨군요. 가을이 깊었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대통방에 희귀한 과일이 좀 많이 들어왔습죠. 언제 가져다드릴까 생각 중이었는데······.”

1처에서 오늘 조사의 대장으로 나선 이는 목풍아였다. 그는 지금 이것이 범한 제사님이 경도에서 첫 번째로 시행하는 시범 활동이란 걸 잘 알고 있는 터라 조금도 소홀히 할 생각이 없었다. 이에 대진을 바라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대진 대인, 우리와 함께 가시죠.”

1처 관원들은 너무나도 익숙하게 문이며 길을 모두 봉쇄하고 명부에 있는 인명을 보며 대통방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내 밖에 세워 둔 마차 안에 가두었다.

가을비는 아직도 내리는 중이었다. 대진은 갈수록 오싹한 기분이 들었지만 웃는 낯으로 그들을 대했다.

“제가 어찌 대인이라 불릴 수 있겠습니까. 목 대인, 무언가 오해가 있으셨나 봅니다.”

그가 평소 하던 대로 목풍아의 소맷자락을 잡더니 은표 몇 장을 그 안에 찔러 넣었다.

목풍아가 대진이 안쓰럽다는 생각을 하며 그를 슬쩍 쳐다보았다. 범한 제사께서 1처에서 어떤 일을 벌였는지 아직 못 들어 본 건가? 그러자 줄곧 옆에서 싸늘하게 지켜보고 있던 감찰원 관원 둘이 다가와 대진의 무릎을 걷어차 바닥에 무릎을 꿇렸다. 그런 후 비밀 제조법으로 만들어진 포승줄을 꺼내 대진의 양손을 단단히 묶었다. 능숙하고 깔끔하게 처리하는 걸 보니 과거에 여러 번 해본 솜씨였다.

대진은 땅바닥으로 엎어졌다. 가슴은 미친 듯이 뛰고 손목에는 극심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수치스럽고 화가 나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야!”

목풍아가 품에 있는 것을 만져 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해보다가 그냥 포기하고 말했다.

“명령에 따라 사건 처리 중입니다. 그러니 대진 대인, 협조해 주십시오.”

대진은 너무나도 황당했다. 그가 눈을 굴려 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사람 살려! 감찰원이 돈이 탐나 사람을 죽인다!”

감찰원 1처 소대(小隊)가 폭우를 뚫고 검소사로 밀고 들어갈 때였다. 구경하기 좋아하는 경국 사람들이 이미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구경꾼들도 검은 기운이 짙은 감찰원이 무서웠는지 현장에 바짝 다가가지는 않았다. 그리고 평소 우쭐거리기 좋아하는 대진 대인이 무기력하게 체포당하는 모습을 겁에 질린 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한편 대진이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데리고 있던 부하들이 어느새 몰려왔다. 이들은 사람들로 붐비는 상황을 이용해 감찰원의 앞길을 막고 있었다.

대진은 손이 결박당하자 속히 생각을 바꿨다. 감찰원이 나섰으니 중간에 관두지는 않을 터. 필사적으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감찰원이 돈 욕심에 사람 잡네!”

사실 그는 공황 상태에 빠져 순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겨우 생각해 낸 게 “돈 욕심에 사람 잡네!”라는 말뿐이라 그 말만 외쳐 댔다. 그리고 황궁에 계신 숙부님께 얼른 이 말이 들어가기만을 바랐다. 무섭다는 감찰원 감옥에 갇히기 전에 숙부님께서 어떻게든 자신을 구해 주기만을 바라며 말이다.

목풍아는 대진의 선동에 몰려든 사람들을 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에 품에서 문서를 꺼내 읽으며 사람들에게 대진의 죄상을 낱낱이 알렸다.

경도 백성 중 하층민 노동자들은 관아에 대한 신뢰가 깊었다. 더군다나 대진은 깨끗한 놈이 아니니 이들이 믿고 있는 쪽은 실은 감찰원이었다. 하지만 일단 에워싼 이상은 뒤로 물러나기 쉽지 않은 법. 그러니 오늘따라 적은 인원수만 온 1처 관원들이 명부와 증인들을 데리고 현장을 떠나기란 조금 힘에 부쳐 보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목풍아는 속에서 열불이 치솟았다. 그런데 몰려 있는 구경꾼 너머로 마차 두 대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빗속에서 낯이 익지 않은 감찰원 동료들이 비옷을 입은 채 제사 대인을 호위하며 이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순간 당황한 목풍아가 소리쳤다.

“가자!”

이미 두 손을 결박당한 대진은 감찰원 감옥이야말로 관원으로서는 절대 갈 만한 곳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이에 계단을 내려가지 않으려 아이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도록 고래고래 소리치며 버텼다.

그러자 대진의 심복들도 시끌시끌하게 주변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들은 감히 감찰원에게 손을 대지는 못했지만 목풍아가 대진을 데려가려 하는 건 막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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