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언빙운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이 일 뒤에 숨어 있는 문제점들을 따져 보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한데 신하라면 누구나 조정의 향후 국정 방향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특히나 범한과 언빙운처럼 젊은 대신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대인······은 태자마마 쪽 사람입니까?”
언빙운이 갑자기 고개를 들고 과하다 싶을 정도로 범한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약간은 바보스럽고, 지나치게 단도직입적으로, 또 별다른 의도 없이 물었다. 범한은 살짝 놀랐지만 이내 서서히 장난기 어린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닌데요.”
언빙운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이내 웃기 시작했다.
“이제 보니 대인은······ 폐하의 사람이었군요.”
범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방이 자신을 도와주리란 건 확신했다. 언빙운은 반년 넘게 갇혀 있었으니 이미 좀이 쑤실 대로 쑤실 지경일 것이다. 그런데도 경도로 돌아온 후로는 요양만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범한 자신이 ‘재미’있고 ‘자극적’인 일을 해달라고 하는 이상은 그 미끼를 물지 않을 리 없었다.
* * *
언빙운이 다시 고개를 숙이고 정보가 적힌 종이를 세세히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1처의 경도 정찰 능력이 예년만 못하군요. 하지만 그런대로 아직은 괜찮습니다. 다만 이런 대략적인 윤곽을 잡는 일은 경도에 있는 정보만 가지고 착수해서는 안 됩니다. 정보는 상호 참조를 통해 얻는 것이니까요. 이 자료들은 이미 많이 알려진 것이라 가치가 없습니다. 목철이란 사람은 개별 안건에 관해서는 그만의 조사 방법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거국적인 국면을 보는 데에서는 방법을 모르고 있습니다. 만약······ 만약대인께서 저를 신뢰하신다면 몽땅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신뢰라고?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언빙운을, 그리고 자기보다 겨우 몇 살 많을 뿐인데도 희끗희끗하게 난 그의 속눈썹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당신을 신뢰합니다.”
한데 신뢰라는 건 원래 단순히 심리적인 판단만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언제까지 가능할까요?”
언빙운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담담하지만 전혀 머뭇거림 없이 자신감에 차 말했다.
“다음 달에 4처로 갑니다. 이번 달 말까지 소식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줄 건 없나요?”
언빙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이 커질 수 있습니다. 그때 희생양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염려 말아요. 나는 양이란 동물을 제일 좋아하니까요.”
범힌이 웃기 시작했다. 그가 이렇게나 기뻐하는 건 단순히 북제 상경에 있을 때처럼 서로가 묵시적 합의의 상태로 돌아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동시에 몇 가지 일을 시작하게 된 까닭도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기뻤던 건 언빙운 공자가 정말로 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하면 향후 벼슬을 하는 내내 범한 대인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2 황자와 신양 장 공주와의 관계는 반드시 조사를 거쳐야만 했다. 그런데 이는 범한이 언빙운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중요한 과정이기도 했다.
“맞다.”
언빙운이 갑자기 이맛살을 찌푸렸다.
“지금 보니······ 대인께서 병력 지원 좀 해주십시오.”
범한이 호기심에 물었다.
“지금까지 쉬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설마 아무도 몰래 무슨 조사 같은 걸 하고 있었어요? 병력 지원이라면 언빙운 대인이 맡게 될 4처에도 정예병과 맹장들이 많이 있잖아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나에게 지원 요청을 하는 건가요?”
순간 처마 밖 빗소리가 더 거세지고 빗물이 바닥 석판 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석판 위에 무수히 많은 곰보 자국을 새겨 놓으려는 심산인 듯했다. 한편 이미 물을 흠뻑 마신 정원의 나무들은 잎을 축 늘어뜨리기 시작했다. 포악하리만큼 거센 비가 무서워서였다. 언빙운의 미간에서 아주 잠깐 우울함과 걱정의 기색이 스쳤다.
“남쪽에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몇 개 주와 부에 걸쳐 일어났고 형부 13관아에서는 적지 않은 이들이 죽었는데도 진짜 범인을 잡지 못했습니다. 이에 황제 폐하께서 감찰원에게 그 사건을 처리하라 하셨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범한은 이미 이런저런 정보를 받아 보고 있었는데, 언빙운과 함께 북제 상경에 있을 때 관련 내용을 감찰원의 비밀 보고를 통해 접한 적 있어서였다. 그런데 그때는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던 정보였다.
언빙운이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이는 4처 관할 사건입니다. 하온데 4처에서 접수한 후 무려 열세 명의 밀정이 잇따라 죽었습니다. 처참한 몰골로 죽어 있었다고 하는데 범인은 흔적조차 찾지 못했지요. 보고서를 보니 범인은 매우 강한 무공 수련자인 것 같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몇 등급의 고수인지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조사에 나선 관원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정도면 아마도 9등급 상에 달하는 실력자인 것 같습니다.”
그러자 범한은 이 사건에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천하가 태평한 이 시점에도 9등급 이상의 무공 실력자는 어느 나라에서든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조정에서 그들을 영입하는 데 적극적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군 측에서도 일련의 이유 때문에 과거의 태도를 버리고 이들 고수를 과감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천하에 9등급 이상의 고수는 정말 몇 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서도 동이성의 경우 부유할 뿐만 아니라 그곳에 사고검이 살고 있어서 천하에서 9등급 고수를 가장 많이 보유한 지역이 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9등급 이상의 고수라면, 섭씨 집안처럼 경국을 보호하는 군사력의 한 축이 될 수도 있고, 북제의 하도인처럼 조정을 위해 일하는 외부에서 영입한 자객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모두 자신의 선호와 자유로운 선택에 달렸다. 물론 가장 쓸모없는 선택이기는 하지만, 동이성으로 가 가끔씩 동이성 상단을 돕는 막후 강자가 되거나, 사고검과 그의 제자들을 찾아가 함께 무공을 연구하는 것도 할 수 있다. 어찌 되었든 9등급 이상의 고수라면 부귀영화, 강호에서의 지위 중 자신이 원하는 걸 선택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연쇄 살인이라고? 아녀자를 겁탈하려다 그런 걸까 아니면 강도질을 하려다 그런 걸까? 무려 9등급의 고수라면 당연히 이런 짓은 할 필요 없겠지.
“어쩌면 변태 살수일 수도 있겠네요.”
범한이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어 갔다.
“그냥 살인할 때의 쾌감을 즐기기 위해.”
언빙운의 이맛살이 한껏 일그러졌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물론 ‘변태’라는 말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도 있어 다음과 같이 말할 뿐이었다.
“4처가 너무 많은 손실을 봤습니다. 그러니 조정 입장에서는 무공이 강한 자를 남쪽으로 내려보내 조사를 해야 합니다. 하오나 대인도 아시다시피 9등급 이상 고수는 몇 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경도에 계신 몇 분도 제 아버님보다 벼슬 품계가 높으셔서 4처에서는 말도 꺼내지 못했습니다. 또한 황제 폐하께서도 동의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대인께 병사를 빌려 달라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범한이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1처에도 그만한 고수가 없는데. 사가(私家)에서 데리고 있는 호위 무사도 기껏해야 7등급 고수 두 명. 그러니 이마저도 안 되겠군요.”
언빙운이 입꼬리가 위로 한껏 올라가도록 웃었다.
“제가 빌리고 싶은 이는······ 고달입니다! 그리고 그가 데리고 다니는 나머지 여섯 명의 칼잡이들까지요!”
언빙운이 수를 쓰자 범한이 정말 아쉽다는 듯, 한 손으로 허공을 내리치는 동작을 취했다. 그리고 싸늘하게 조소했다.
“이런, 우리 두 사람의 마음이 일치했네요. 나도 고달을 내 곁에 두고 싶었답니다. 그래서 곧장 아버님께 달라 했더니 어찌 된 줄 압니까?”
범한이 양손을 앞으로 쭉 펼쳤다.
“대인과 같았답니다. 모두 바보 같은 망상이었어요. 황궁에 계신 분께서는 우리에게 그들을 그렇게 쉽게 빌려주지 않으신답니다.”
“그 문제는 제가 관여할 바 아닙니다.”
언빙운이 눈이 가늘게 될 정도로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어찌 되었든 훗날 고달을 대인의 수하로 두게 된다면 그때 대인께서 4처에 며칠 빌려주시면 그만입니다.”
범한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언빙운이 거의 보여 주지 않는 웃는 모습을 바라보는데 심장이 울리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다.
‘언씨 가문이 경도에서 다른 연줄이 있다던데 설마 그 연줄에게서 뭔가를 들은 게 아닐까?’
한데 고달을 포함한 일곱 칼잡이를 정말로 자기 사람으로 만든다는 상상을 하니 생각만으로도 절로 기분이 좋아져 범한은 그냥 승낙을 해버렸다.
“그 부탁 받아들일게요. 정말로 그런 날이 오면 필요할 때마다 빌려주도록 하죠.”
진지한 이야기를 마친 범한이 조용하기만 한 방 안쪽을 노려보았다. 그런 후 갑자기 언빙운을 놀리기 시작했다.
“요즘 심 낭자와 어찌 지낸답니까?”
그러자 언빙운이 순간 얼음처럼 싸늘하게 말했다.
“대인, 부디 자중하시지요.”
“자중은 개나 줘버려요!”
범한이 계속 꾸짖기 시작했다.
“심 낭자를 쇠사슬로 묶여 놓다니 저 여인에게 억지로 자중하도록 한 것이겠죠. 하나 언빙운 대인은 아까 말했던 남쪽 살인범처럼······ 변태라구요!”
* * *
비가 끊임없이 내리는 가운데 분위기는 화목한 편은 아니었다. 같은 처마 아래 있었지만 범한은 득의양양하게 이를 드러내고 발톱을 치켜세우고 있었고, 언빙운은 화가 나 말문이 막혀 있었다. 언빙운은 변태가 결코 좋은 뜻은 아닐 거란 생각에 화가 머리끝까지 나, 이를 악물고 의자를 쳤다.
“애당초 대인이 저 여인을 사절단에 남겨 두지 않으셨다면 저도 이러지 않았겠죠!”
“심 낭자에게 여종 옷을 입힌 건 장기적 계획은 아닌 것 같군요. 그러니 쇠사슬까지 채울 필요는 없어 보이는데요. 언빙운 대인이 이 저택에 있는 이상 심 낭자는 이곳을 떠나려 하지 않을 테니까요.”
범한이 웃는 얼굴로 계속해서 언빙운을 자극했다.
“그렇다면 대인께는 무슨 방법이랄 게 있습니까?”
언빙운이 냉랭하게 말을 이어 갔다.
“북제 공주마마께서도 굉장하시더군요. 경도에 계신 지 얼마나 되셨다고 세상에, 1 황자마마께서 제 집까지 왕림하시도록 해 심 낭자에게 잘해 주라 압력을 넣으셨습니다. 그녀가 아무리 심중의 여식이고 북제에서 수배 중인 중범이라 해도 이제는 죽이지도, 풀어 주지도 못하게 되었으니 이를 어찌해야 할까요?”
그러자 방 안에서 들릴 듯 말 듯 우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범한이 방문 쪽을 보고 있던 시선을 거두었다. 1 황자께서 이번 일에 대해 알고 계셨다니.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정색했다.
“그렇게나 불편하면 내가 심 낭자를 우리 집으로 데려가겠습니다.”
언빙운이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었다. 범한은 사나운 표정만 짓고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참 후, 언빙운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범한 일행이 언씨 가문 저택에서 나왔다. 밖에는 어느새 사남 백작가의 마차가 한 대 와 있었다. 범한에게는 빗속을 산책하는 우아한 흥취 따위는 없었다. 범한이 마차 안으로 들어가 앉아 고개를 한쪽으로 갸우뚱하며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잔뜩 겁에 질려 불안해하고 있는 심 낭자였다. 범한이 미소 지으며 그녀를 진정시켜 주기 위해 말을 건넸다.
“심 낭자, 염려 말아요. 며칠 지나고 이번 일이 가물가물해지게 되면, 내가 그대를 다시 언씨 가문 저택으로 돌려보내 드리리다.”
범한이 2 황자에 관해 조사하는 데에는 자신과 장 공주 사이의 원한이라는 공명정대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또한 자신이 영원히 외부로는 발설할 수 없는 숨은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너무 큰 사안이다 보니 언빙운을 온전히 신뢰하려면 범한으로서는 그의 무언가를 쥐고 있어야 했다. 신뢰라는 것은 직감과 심리적 판단에 의거한 것이므로 신뢰가 충분하지 않으면 이익을 둘러싸고 갈등이 일어나니 말이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범한의 마음을 놓이게 해줄 수 있는 방책이 바로 심 낭자를 자기 저택에 데려다 놓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언빙운이 자주 자신의 집으로 찾아와 함께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할 것이라 믿은 것이었다.
언빙운은 감찰원의 기풍 속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범한이 심 낭자를 데려간 일로 마음이 조금 우울하고 찜찜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어딘가 불편한 느낌은 없었다. 심 낭자는 그에게 있어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다. 비록 아직까지는 터지지 않았지만 이미 그들 부자를 날마다 싸우도록 만드는 원인이었다. 그러니 언빙운의 입장에서는 범한이 그녀를 데려간 건, 한편으로는 양측이 서로 신뢰와 관련한 균형 상태를 이룬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잠시 평온을 되찾은 것이었다.
범한이 창을 통해 비 내리는 거리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1년 전 비 내리는 밤에 그 검은 상자를 열었던 일, 미친 사람처럼 굴었던 일, 그리고 다시 지금의 음울하고 무미건조한 자신이 연달아 생각나서였다. 그런데 범한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자신에게 아직 이 세상을 변화시킬 시간이 남아 있음을 말이다. 그리고 이 세계가 이미 자신을 속속들이 바꾸어 놓았음을 말이다.
마차가 등시구에 왔을 무렵이다. 비가 잦아들기 시작하고 사람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에 마차도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앞쪽이 사람들로 붐비는지 마차는 잠시 이동할 수 없었다. 이때 마차 세 대가 나란히 지나갈 수 있는 넓이의 거리에 마차 한 대가 나타나 범한이 타고 있는 마차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사남 백작가 마차 옆에 나란히 섰다. 노란색 옷소매 속 통통한 팔이 마차 안에서 불쑥 튀어나오더니 범한의 마차 창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사람이 깜짝 놀라도록 소리쳤다.
“스승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