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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246화 (246/1,108)

246화

언씨 가문 저택은 1처 관아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우선 빗속을 걸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골목으로 꺾어 들어갔다. 그런 후 다시 그 골목에서 나와 오른쪽을 보면 언씨 가문 저택의 그리 크지 않은 대문이 눈에 들어왔다. 이 저택에 사는 부자(父子)가 조정의 대외적인 모든 간첩 활동을 책임지고 있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범한도 더 진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언약해는 감찰원 4처를 10년 동안 관리한 노신(老臣)이라 황제 폐하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고 있었고 진평평 원장으로부터도 깊이 신뢰받고 있었다. 그러니 아무리 조정 6부 대신들이라 해도 그 앞에서는 감히 허세를 부릴 수 없었다.

감찰원 관원들의 벼슬 품계는 감찰원 설립 초기부터 매우 낮게 설정되어 있었다. 이에 공무 집행의 편의성을 위해 황제가 억지로 이들의 정치적 지위를 높여 놓았고 그 방법으로 이용된 게 바로 작위 수여였다.

이에 언약해만 봐도 몇 년 전에 이미 2등급 자작(子爵)으로 봉해진 상태였다. 그런데 작년에 장 공주 때문에 언빙운이 북제에서 잡히자 황제는 감찰원에 충성을 바친 이를 위로하기 위해 언약해의 작위를 3등급 백작으로 올려 주었다. 범한의 부친인 범건의 현재 지위가 호부 상서인데도 아직까지 1등급 백작인 걸 감안하면 황제가 감찰원 관원들을 얼마나 후하게 대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언씨 가문 저택은 아직도 문 앞에 있는 편액을 바꾸지 않은 상태였다. 아래쪽에 쓰여 있는 글자는 여전히 ‘정징자부(静澄子府)’이지 ‘정징백부(静澄伯府)’가 아니었다. 글자색 역시 황금색이 아닌 검은색이다 보니 존재감이 매우 낮아 보였다.

한데 대대로 공(公)으로 봉해지는 대신들을 제외하고 고관의 저택을 나타내는 ‘부(府)’라는 글자 앞에 작위를 넣을 수 있는 건, 황제 폐하의 칙명으로 저택을 하사받은 경우뿐이란 걸 범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자부(子府)’란 글자만 봐도 언약해의 저택은 황제 폐하께 하사받은 것이었으므로 아무리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으려 해도 범한에게는 절대 그렇지 않았다.

빗줄기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는 문 앞에 범한 일행이 서 있자 집사가 일찌감치 그들을 발견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이들이 비옷을 입고 있어 금세 감찰원 관원임을 눈치챈 상태였다. 하지만 큰 어르신의 동료인지 아니면 도련님의 친구인지는 알 수 없어, 속히 계단 아래로 내려와 손으로 비를 가린 채 범한 일행을 맞았다.

범한이 쓰고 있던 비 모자를 벗고 살짝 젖은 머리카락을 드러내며 물었다.

“언빙운 공자는 있는가?”

집사는 이제 막 큰 어르신은 안 계신다고 대답하려던 차였다. 그런데 상대방이 먼저 물어 오자 도련님을 만나러 왔다는 걸 알고는 그제야 이 청초한 용모의 주인공이 뉘신지 금세 알아차렸다. 이에 집사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도련님은 안에 계십니다. 하온데 대인께서는 제사 대인이신지요?”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비옷을 벗어 어깨에 걸쳤다. 그러자 집사가 재빨리 비옷을 받아 들고 왼손으로 우산을 씌워 주었다.

“대인, 안으로 드시지요.”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네 집 도련님이 북제에서 돌아왔으며 이 범한 제사라는 사람과 잘 아는 관계란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자기가 다 안다는 듯 먼저 들어가 통보부터 한 게 아니라 직접 범한을 맞이해서 저택으로 모시고 들어가는 방법을 취했다. 범한은 이런 생각이 들자 웃으며 집사를 잠시 바라보다가 자연스럽게 먼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범한의 벼슬 등급이 언씨 부자보다 높기도 했거니와 이런 상황에서는 굳이 사양하며 따라 들어갈 필요는 없었으므로 범한은 그냥 냉큼 안으로 향했다.

범한은 이곳이 처음이었다. 그러니 저택 내부가 어찌 생겼는지 호기심이 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집사가 우산을 씌워 준 상태에서 걷다 보니 가는 내내 특별한 것은 보지 못했다. 이에 빗물로 흠뻑 적셔진 정원 내 기이하게 들어선 가짜 산이나 보며 아쉬움을 달랬다. 가짜 산 위에 자란 이끼는 빗물에 청춘이라도 되찾은 듯 파릇파릇했다.

가짜 산을 끼고 돌자 바로 저택의 안마당이 나왔고 저 멀리 처마 밑에서 빗소리를 듣고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범한은 그들을 바라보며 살며시 웃음을 짓고는 손을 흔들어 다른 일행에게 따라오지 말라는 의사를 표시했다. 범한은 바닥 석판에 고인 빗물을 천천히 밟으며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길게 늘어선 처마 아래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빗속에 잠긴 경치 감상용 다리, 빗물에 축축이 젖은 기둥 근처 돌계단 그리고 여전히 꿈쩍할 생각도 없는 처마 밑 두 사람. 이들은 긴 의자에 앉아 가을날 비 내리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둘 중 한 사람은 당연히 얼마 전 경도로 돌아온 언빙운 공자였다. 그런데 나머지 한 사람이 의외였다. 바로 천 리 길을 도망 온 심 낭자였다. 두 사람은 함께 의자에 앉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서로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빗물만 바라보는 중이었다. 이 끝도 없이 내리는 빗줄기가 엮어 낸 주렴(珠簾: 구슬을 꿰어 만든 발)에 자신의 눈빛이 반사되어 상대방에게 전달되기만을 바라는 사람들 같았다.

범한이 씁쓸하게 웃었다. 언빙운 저 인간의 표정은 여전히 얼음처럼 싸늘했지만 눈동자만큼은 예전보다 많이 부드러워져 있어서였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심 낭자는 집안이 망한 처참한 고통에서는 이미 벗어난 듯 살며시 수줍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눈동자에서는 여전히 실의에 찬 기색이 엿보였다.

서로를 원망하는 한 쌍의 남녀가 대화를 하지도, 시선을 마주치지도 않으면서 서로 없는 사람 취급을 하고 있는, 참으로 괴이한 광경이었다.

심지어 심 낭자의 행색 때문에 범한은 더 괴이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행색을 보니 여종의 복장에 발목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족쇄의 한끝은 방 안에 들어가 있고 그녀는 이 긴 사슬을 끌고 밖에 나와 있는 중이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언빙운이 채운 게 분명했다.

* * *

범한은 다시 차분히 그 상황을 살펴보았다. 그러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언빙운의 지금 심정이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편안하지만은 않다는 걸 알아차려서였다. 그게 아니라면 범한이 뒤쪽에 그리 오래 서 있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이에 범한이 두어 번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언빙운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밉살맞을 정도로 온화하게 웃는 얼굴이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노기가 번뜩였다. 방해를 받아 분노한 건지 아니면 자신이 가둬 둔 여성 포로 때문에 범한에게 심려를 끼쳤다는 생각을 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심 낭자는 범한을 발견하고는 어떤 마음 자세로 그를 대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그러다 결국에는 어두운 낯빛으로 의자에서 일어나 조심스레 인사를 하고는 곧장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자 처마 밑에서 빗소리와 함께 쇠스랑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언빙운은 범한의 방문이 전혀 의외가 아니라는 듯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그에게 안기를 권했다. 범한은 이 저택이 이상하리만치 적적하고 썰렁한 곳이라 생각하고 있다가 심 낭자가 방금 일어난 의자에 앉으니 궁둥이에 따스함이 느껴져 가슴이 살짝 두근거렸다. 이에 이러는 건 시의적절치 않은 태도이고 신분을 생각해서 이러지 말자고 자신을 강하게 억누르며 입을 뗐다.

“천신만고 끝에 경도로 돌아왔으니 저택이 축하를 해주러 온 관원들로 붐빌 거라 생각했어요. 한데 이리 비가 내리는 날 대인과 심 낭자가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며 눈물만 흘리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자 언빙운이 제법 진지하게 해명에 나셨다.

“첫째, 저는 저 여인을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저를 경멸하고 있을 테니까요. 둘째, 울고 있던 건 하늘이지 제가 아닙니다.”

그러자 범한은 어깨를 으쓱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언빙운이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아버님께서는 조정 관원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게다가 경도에서 저는 제사 대인처럼 유명인도 아닙니다. 그러니 댁에 비하면 저희 저택은 썰렁할 수밖에요.”

그러자 범한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반박했다.

“나도 다 알고 있답니다. 북제에 가기 전에 대인은 경도에서 꽤나 유명한 공자님이셨다죠. 귀국한 후에는 관직이 오를 게 뻔한데 이참에 언빙운 대인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이들이 어찌 안 찾아오겠습니까? 감찰원 내 수장이라 조정 관리들과 계통이 다르기는 해도 이런 좋은 기회를 그냥 버릴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요?”

언빙운이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아버님께서 개를 세 마리 기르고 계십니다. 모두 문 앞을 지키고 있지요. 그러니 그 누구도 감히 저택으로 못 들어온답니다.”

범한이 깜짝 놀라 축축한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해다.

“들어올 때 그런 건 보지 못했는데요!”

그러자 언빙운이 말했다.

“오늘은 비가 손님 방문을 막아 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덩치 큰 흑구들을 요 며칠 쉬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 * *

“대인, 무슨 중요한 일이 있기에 방문해 주신 것입니까?”

일부러 거리 두기를 하려는 것 같은 말투였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어쩌면 집안 교육 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범한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곧장 품에서 원통을 꺼냈다. 그리고 바로 종이 두루마리를 꺼내 언빙운의 품을 향해 툭 던졌다.

언빙운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대충 훑어보았다. 낯빛이 살짝 불편해진 그가 말했다.

“대인께서는 수하를 너무 믿으시는군요. 이건 1처에서 할 일입니다. 제게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규정을 위반하신 것입니다.”

범한이 미소 지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곧 부친께서 하시던 일을 이어받는다고 나를 계속 피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말고. 그리고 매번 나를 대인께서라고 높여 부르는 이상 답은 간단한 겁니다. 내가 아무리 1처에, 대인이 4처에 있어도 어찌어찌해도 나는 제사인 거죠. 그러니 내가 정말로 급해지면 명령을 내려 언빙운 대인을 곧장 1처로 데려올 수 있다는 뜻입니다. 직위를 낮추어서라도 말입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을 테니 그런 헛소리는 그만하고 이 정보들이 제대로 된 건지나 좀 봐줘요.”

그러자 언빙운이 불쑥 화를 냈다.

“대인의 말도 안 되는 이치를 가지고 저를 끌어들이지 마십시오! 대인께서 직위를 이용해 저를 찍어 누르려 하신다면 직접 원장 대인께 찾아가 말씀드릴 것입니다!”

범한이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처마 밖에서 떨어지는 빗줄기를 보며 조소하듯 말했다.

“그리 말했으니 결국에는 1처 주부로 오게 될 거예요.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말아요.”

언빙운은 가슴이 답답해지는 걸 억지로 참으며 종이에 적힌 정보를 가리키며 싸늘하게 말했다.

“무엇이 알고 싶으신 겁니까?”

“큰 거 딱 하나요.”

범한이 자그마하게 말을 뱉어 놓고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언빙운 앞에 가서 섰다. 그리고 찬바람이 쌩쌩 도는 언빙운의 날렵하고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며 단어 하나하나를 똑똑히 말했다.

“조사 좀 해줘야겠어요. 2 황자마마와 최씨 가문 사이에 대체 관계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말이죠.”

처마 아래 공기가 순간 침묵과 함께 가라앉았다.

언빙운은 놀라거나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이 종이를 가리켰다.

“북제 상경에 있을 때부터 대인이 최씨 가문을 어찌하실 거란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 점만큼은 저를 속이지 못하셨지요. 하오나 2 황자마마라니요? 그분과 신양 쪽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은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언빙운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범한이 최씨 가문을 손봐 주려는 이유는 장 공주 때문임을. 그리고 범한이 최씨 가문과 2 황자와의 관계를 조사하려는 것 역시 장 공주를 겨냥해서라는 걸. 그래서 2 황자가 연루되자 그로서는 살짝 생뚱맞다는 기분이 들었다.

“직감이에요.”

범한이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신양 쪽과 맞서는 일은 언빙운 대인에게는 처음부터 숨기는 게 없었어요. 왜냐하면 이 일과 관련해서 당신과 나는 자연스레 동맹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2 황자마마께 의심이 생긴 건 내가 북제에 반년 있는 동안 그분이 너무 조용히 계셨기 때문이에요. 더군다나 요즘 1처에 있으면서 조금씩 알아 가고 있는데 이무런 내색도 안 하는 2 황자마마께서 뜻밖에도 조정에서 매우 큰 세력을 형성하고 계시더군요. 대단히 많은 관원이 그분과 열심히 왕래하고 있어요.”

조용히 지내는 2 황자를 범한이 심상치 않게 여긴 이유는 전생에 키워 둔 안목 때문이었다. 황권 경쟁에서 선천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태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다. 그리고 최근 1년 동안 보이지 않던 장 공주의 영향력이 사라지자 태자는 앞서 말한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2 황자는 달라야 했다. 만약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를 생각이라면 분명 무언가를 했어야 한다. 아무리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지만 조용히 지내는 황자는 절대 대권을 손에 쥘 수 없기 때문이다.

언빙운이 조금 이상하다는 듯 범한을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대인께서 황자마마님들의 싸움에 개입하기로 결심하셨나 보군요.”

범한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였다.

“아니에요. 준비를 하려는 것뿐입니다. 그분들 싸움에 살 집조차 사라질까 두려워서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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