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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242화 (242/1,108)

242화

목철이 침울한 얼굴로 느릿느릿 복도로 들어섰다. 그리고 편청에 앉아 있는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어느 대인께서 이 목 아무개를 만나러 오신 겁니까? 으스대는 걸 보니 1처 사무가 바쁘다는 걸 모르는 분인가 보오.”

소문무가 과거 동료를 보고는 조심하라는 눈치를 보냈다. 목철은 사실 누가 와 있는지 알고 있는 듯 연기를 하는 중이었다. 이에 목철이 소문무의 눈치에 반응하는 척하며 의심스러운 듯 고개를 휙 돌렸다. 뒤쪽에는 젊은이가 있었다.

“그쪽은?”

목철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한 발짝 더 다가가더니 놀라 까무러쳤다. 그리고 탁탁, 하는 두 번의 소리와 함께 즉시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하관 목철, 제사 대인을 뵈옵니다!”

범한이 아무 표정 없이 목철을 바라보았다. 그의 연기에 장단을 맞춰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목철은 여전히 놀라워하는 얼굴로 기뻐했다.

“대인, 말씀도 안 하시고 어찌 1처에 오신 겁니까? 대인을 밖에서 한참 기다리시게 했으니 하관,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범한은 계속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입가에 웃음을 지어 보였다. 목철은 범한의 웃는 얼굴에 순간 마음이 얼어붙어 버렸다. 범한 대인이 가장 달콤한 웃음을 날릴 때는 바로 그의 속에서 열불이 나고 있을 때란 건 모두 다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목철의 목소리가 절로 기어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게······ 대인, 저기······ 하관.”

범한은 여전히 미소 지은 얼굴로 묵묵히 목철을 바라보기만 했다.

시커먼 목철의 얼굴에 어느새 두려움과 후회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리고 더 이상 말대꾸를 할 수 없기에 이번에는 두 무릎을 모두 바닥에 대고 꿇어 버렸다.

* * *

범한도 더 이상은 목철의 추한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목철은 1처의 주부(主簿)이고 이곳 사무는 기본적으로 그가 맡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편청이 너무 더럽군요. 손님을 맞기에 적합하지도 않고요.”

목철이 깜짝 놀랐다. 하지만 속으로는 순간 기뻤다. 이에 옆에 있는 풍아에게 화를 내며 꾸짖었다.

“얼른들 나와서 청소하라고 해!”

“사건 관련 문서를 이렇게 편청에 두다니 이것도 규칙에 어긋나는 거예요.”

범한이 미소를 지었다.

목철이 팔짝 뛰며 뒤쪽에 있는 1처 관원들에게 나오라고 소리쳤다. 그러고는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는 문서를 뒤쪽 암실로 옮겨 놓았다. 그사이 나머지 관원들은 귀찮아하며 무력하게 터벅터벅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들어온 건 목철 대인이 한 젊은이 곁에 온순하게 서 있는 광경이었다. 1처의 나머지 관원들은 범한을 몰랐지만 모두 정보 수집과 정탐 업무를 수행했던 터라 머리 회전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이 젊은이에 대한 신분 예측이 얼추 끝나자 모두 후다닥 튀어가 각자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편청이 깨끗하게 청소가 되었다. 사건 관련 문서도 가지런하게 정리를 마쳤다. 감찰원 1처가 지녀야 필수 능력 중 하나가 재빠른 반응 속도인데 이제 보니 이 능력은 아직 잘 유지되고 있는 것 같았다.

* * *

“반 시진(한 시간이며 한 시진이 두 시간) 주겠습니다. 오늘 각 부(部), 각 사(司), 각 부(府)에 가 있는 인원과 신분 노출을 하면 안 되는 사람만 빼고 나머지 1처 소속 관원들은 모두 만나 봐야겠어요.”

범한이 장삼을 뒤로 젖히며 의자에 앉아 손을 내밀었다. 목철이 아부를 하듯 찻잔을 그의 손 앞까지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살짝 풀이 죽어 말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목철은 이 젊은 도련님은 속이기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자기 앞길은 모두 그의 손에 달려 있지 않은가. 그러니 시킨 일은 진지하게 하는 수밖에. 그리고 지금은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을 향한 상대방의 혐오감을 조금이나마 줄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별것 아닌 일로 직접 가지는 말아요.”

범한이 차를 마시는데 차가 식어 저도 모르게 불만스러운 듯 입을 벌렸다. 그러자 목철이 서둘러 따뜻한 차로 바꿔 주려 했다. 한데 범한은 그런 그를 잠시 노려보다가 찻잔을 자기 옆에 있는 깨끗한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나와 함께 들어갑시다. 할 말이 있습니다.”

목철이 서둘러 부하에게 밖에서 놀고 있는 1처 직원들을 모조리 불러오라고 시켰다. 그리고 자신은 얼른 범한 제사를 따라 후원으로 갔다. 그런데 조금 전 자신이 나왔던 방으로 범한이 들어가자 또 긴장감이 밀려들었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문지방 아래 있는 비취옥 마작 패를 보았다.

“역시 감찰원은 최고의 권력을 지닌 관아였군요. 마작 패조차 비취옥으로 만든 걸 쓰다니.”

목철이 등줄기에 식은땀을 흘리며 해명했다.

“가짜 비취옥입니다. 그건 감히 대인을 속일 수 없지요. 재작년에 황실 금고에서 만든 물건입니다. 비취옥처럼 보이지만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지요. 예전에 8대 처에서 1처에게 나눠 준 것입니다. 1처에서는 저걸 줄곧 관아 안에 두었고요. 그 누구도 사적으로 취해 집으로 가져가지 않아서입니다. 그러다 평소에······ 감찰원에 일이 없으면 가끔 한 번씩······. 소인, 부끄럽습니다. 부디 대인, 중벌을 내려 주십시오.”

그러자 범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일은 잠시 후에 다시 이야기하죠. 그냥 실망했습니다. 당당한 감찰원 1처가 흔적 지우기 기술도 이리 형편없다니요. 아까 여기에서 마작하고 있었지요? 몽땅 치웠을 텐데 왜 문지방에 하나가 남아 있는 겁니까?”

목철이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아 냈다. 아까 조카를 혼내려고 던진 마작 패였다. 눈썰미 없는 녀석들이 방 안을 치울 때 놓친 게 분명했다.

범한이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대체 관직을 어떻게 수행하고 있는 겁니까? 감찰원 업무를 날림으로 한 건 그렇다 치죠. 일이 없어 마작을 한 것도 대죄는 아니고······.”

목철의 가슴이 살짝 두근두근했다. 전부 큰 죄가 아니었다니. 이렇게 마음을 놓으려 하는데 느닷없이 팍! 큰 소리가 났다. 순간 크게 움찔한 목철은 몸을 웅크리고 범한 제사를 바라보았다.

범한이 탁자를 세게 내리친 것이었다. 지금 그가 지닌 패도의 공력이면 이 탁자를 단 한 번만 내리쳐 산산조각 내기란 식은 죽 먹기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냥 커다랗게 소리만 내는 선에서 그치고 말았다. 이어 범한이 노기 섞인 싸늘한 목소리로 목철을 혼냈다.

“아까 광주리에 담긴 물고기를 봤을 때부터 당신들이 다른 부에서 이득을 편취하고 다닌다는 걸 알았습니다. 죽고 싶은 것입니까! 감찰원에서 알았다면 당신부터 능지처참했을 것입니다!”

목철이 얼른 바닥에 꿇어앉았다. 그리고 한동안 제대로 된 말을 하지 못하고 입만 우물거렸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깟 별것도 아닌 광주리 속 물고기로 왜 이러느냐고 생각했다.

범한이 싸늘하게 질책했다.

“그깟 광주리 속 물고기가 뭐 그리 대수냐고 생각했습니까? 감찰원의 불변의 규율은 지켜야 할 거 아닙니까! 특히 경도 백관을 감찰하는 1처가 저들 조정 대신들과 형님, 아우 하며 친하게 지내면 나중에 감찰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범한은 언제나 부드러운 사람의 모습만 보여 왔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화를 내니 싸늘한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실린 압박감이 실로 대단해 목철은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

* * *

범한은 자기 앞에 꿇어앉은 관원을 보고 있었다. 범한으로서는 실망하고 뜻밖이란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이제 막 맡게 된 1처뿐만 아니라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이 사람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일어나요!”

범한의 말이 떨어지자 목철이 그제야 몸을 일으켜 세웠다. 원래 감찰원 내부 조례에 따르면 상하 간에는 이렇게나 엄격하게 예를 따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금 이 상황은 목철이 자기 필요에 의해 범한의 말을 따른 것뿐이었다. 즉 그로서는 지금만큼은 조금 더 바르게 처신해야 했고 범한에게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얇은 철판 같은 입술과 시커먼 얼굴. 범한은 이 인상 깊게 생긴 얼굴을 향해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경도에서 내 진짜 신분을 처음으로 안 사람이 당신이니······.”

목철은 마음이 암담했다. 작년 외양간 길 사건을 조사할 때 주제넘게 백작가로 찾아가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의 사남 백작가는 지금처럼 잘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자기 앞에 있는 젊은 대인이 신분을 밝혔고 그래서 그가 감찰원에서 전설로만 존재하는 제사임을 알게 되었다. 정말 천재일우의 기회여서 이제는 조금 덜 치열하게 살아도 되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재미를 본 건 왕계년이란 반늙은이였다.

“당신도 1년 동안 내 일을 도운 사람입니다.”

범한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어 갔다.

“이치대로라면 당신도 내 연줄을 이용했어야 해요. 하나 그러지 않더군요. 그래서 좋은 사람인 것 같아 기뻤습니다. 한데 1년 동안 이렇게나 많이 변하다니요. 처음에는 상사에게 아첨하는 것도 어색해하던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수시로 낯을 바꿔 가며 유들유들하게 처세나 하며 막 사는 관리가 되어 있다니······ 정말 실망입니다.”

정말 실망했다는 한마디에 목철은 자기 자신에게 더 실망하고 말았다. 목철은 자신이 왕계년처럼 제사 대인과 가까운 것도 아니고 해서 혼자서 큰일을 책임지게 되리란 희망을 갖지 않았다. 그런데도 1년이란 시간 동안 7품 첨사에서 5품 주부로 승진할 수 있었던 건, 머리 대신 궁둥짝으로 생각해 봐도 지금 여기 있는 제사 대인의 체면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목철이 깊이 숨을 내쉬고는 더 이상 변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낮게 깔린 목소리로 몇 마디만 했다.

“대인, 하관이 이후 어찌해야 하는지 부디 알려 주십시오.”

범한은 목철이 아까는 자신을 ‘소인’이라고 칭하던 것을 ‘하관’이라고 바꾼 게 인상적이었다. 이에 허리를 곧게 펴고 눈에 은근히 칭찬해 주는 것 같은 기미를 띠었다.

“그러면 됐습니다. 누구나 다 만담꾼 보조가 될 천부적 소질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왕계년이 거들먹거리는 건 마음에 담아 두지 말아요. 예전처럼 사건 조사에 몰두하는 자신으로 돌아오면 됩니다. 그러면 본관도 당신의 앞길이 잘못되도록 하지 않을 거예요.”

* * *

비바람이 몰아치고 나면 다시 맑은 날이 오기 마련이고, 또 맑은 날이 있은 후에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이 오기 마련이다. 목철은 앞에 있는 제사 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속으로는 이 어르신의 속마음이 이제 막 여름이 지나간 경도의 날씨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범한의 낮게 깔린 음성을 듣고 있었다.

“이제 좀 들어 볼까요? 1처가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된 겁니까? 감찰원의 다른 몇몇 처를 가봤는데 여기와는 비교도 안 되었어요. 다른 처의 관원들은 모두 신중하고 맡은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마작 같은 건 말할 거리도 안 되죠. 심지어 변소에 다녀올 때도 서두르고 길을 걸을 때도 바람이 일지 않도록 신중하던데······. 그런데 여기를 좀 봐요! 여기가 무슨 도떼기시장입니까!”

목철은 일찌감치 모든 걸 다 내려놨다.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려면 범한 대인의 다리라도 꽉 잡고 늘어져야만 했기에 모든 걸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제사 대인, 1처가 이리 변한 데에는 하관도 잘못이 있습니다. 한데 최근 1년 동안 수장께서 부임하지 않으셔서 제대로 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자 제 아랫사람들도 하관의 말은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기강이 해이해진 것입니다.”

범한은 왜 그런지 잘 알고 있었다. 원래 1처 수장이었던 주격이 신양 쪽에 빌붙어 언빙운 관련 정보를 유출했고 이는 언빙운이 북제에 붙잡히는 사건으로 이어졌다. 훗날 감찰원 자체 조사로 주격은 실패했고,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감찰원 연석회의에서 자살했다. 이는 감찰원이 건립된 이래 가장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날로 1처는 수장을 잃게 되었다.

그러자 진평평 원장은 언빙운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계속 후임자 선발을 미뤘다. 감찰원 1처 수장은 매우 민감한 자리이다. 경도 백관을 은밀히 감찰하는 권한을 쥐고 있어서였다. 그러니 이 권력을 남용하면 많은 이득을 챙길 수도 있을 터. 한데 당시 감찰원에서는 적당한 후임자를 찾지 못해 수장 자리는 계속 공석으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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