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일석거의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문을 통해 들어오는 초가을 바람을 맞으며 범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진심으로 벗을 대하려 했건만 그 친구는 오히려 실망감만 안겨 주다니.
그런데 이 순간 소박한 옷을 입은 중년의 누군가가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불안한 기색으로 범한에게 황급히 예를 올려 인사했다. 범한이 살짝 몸을 비키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홍성이 이 주점 전체를 세를 놓았다고 했고 문밖에는 호위병들이 깔렸는데 이자는 대체 어떻게 들왔단 말인지!
이 낯선 이는 범한 대인이 의심에 찬 표정을 짓고 있자 서둘러 자신을 한껏 낮추며 답했다.
“소인 최청천이옵니다. 일석거의 주인이지요. 범한 대인께 인사 올립니다.”
일석거의 주인장이라고 하는 걸 보니 이 참에 아첨을 하러 온 것 같았다. 이에 범한이 무의식적으로 웃으려는 찰나 순간 성씨가 마음에 걸려 인상을 팍 썼다.
“최씨라고?”
최청천이 환심을 사기 위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사옵니다. 대인께서 북쪽에서 저희 2 공자를 교육해 주신 은혜에 인사하고자 집안 대인들이 이곳에 직접 오려 했습니다. 하오나 시재(詩才)가 뛰어나기로 유명하신 범한 대인께서 꺼리실 것 같아 대인을 잘 대접해 드리라는 집안 어르신들의 명을 받아 이렇게 소인이 대신 왔사옵니다.”
범한이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씨 일족은 경도에서도 기반이 꽤 튼튼하고 북에서도 장사를 하는 명문대가다. 북제 상경에서 비 내리는 밤, 사절단 숙소에서 목숨을 구걸하던 최 공자도 바로 이 집안사람이고. 이제 보니 최씨 가문에서 아들이 저지른 잘못을 어떻게든 원만히 매듭짓고자 이렇게 범한을 찾아온 것이었다.
최청천은 눈치가 빨라 범한에게 더는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건넸다.
“작은 산삼입니다. 몸을 보하는 데 큰 효험은 없으나 술 깨는 데는 최고입니다. 이미 깨끗이 씻어 놓았으니 생으로 씹어 드시면 됩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등자경이 옆으로 다가왔다.
길고 긴 거리를 내달리는 마차 안에서 범한이 상자를 열어 보았다. 한데 산삼은 없었다. 오히려 두툼하게 접어 놓은 은표(수표 같은 것으로 은전으로 환전할 수 있게 한 것)가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고 살펴보니 그 액수가 무려 2만 냥 가까이 되었다.
앞에 앉아 있던 등자경이 입을 떡 벌리며 한마디 했다.
“최씨 가문은 정말 통이 크군요!”
한데 범한에게서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물론 속으로는 살짝 놀란 상태기는 했다. 담박서국 몇 달 치 수익과 맞먹는 돈을 이리도 쉽게 내놓았으니 말이다. 범한은 최씨 가문이 왜 이렇게까지 나오는지 잘 알고 있었다. 황실 금고의 북쪽 사업을 최씨 가문에서 계속하고 싶다면 일단 자신에게 잘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 황궁에서 있었던 일과 선물을 연관 지어 생각해 보던 범한이 저도 모르게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범한은 전생의 기억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의지가 굳세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 이렇게 권력의 위력을 몸소 실감해 보니 은근 망연자실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최씨 가문은 헛돈을 보낸 것이었다. 범한에게는 이미 계획이 서 있었고 최씨들은 나중에 장 공주와 함께 제거될 예정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세자에게 일었던 혐오감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살아가려면 결국에는 서로가 서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것을. 그리고 범한은 단순히 이홍성이 자신을 바보 취급한 게 기분 나빴을 뿐이고. 그러니 범한은 이홍성과 계속 친구로 남아 있을 생각이었다.
등자경은 도련님의 낯빛을 살피는 중이었다. 그러다 범한의 생각을 알아채고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래도 될까요?”
범한이 등자경을 바라보며 잠시 웃었다.
“세자께서 아까 내게 이런 말을 했다네. 황궁과 저택 밖으로 나왔을 때 우리가 진정한 어르신이 된다고 말일세. 그러니 안 될 게 뭐가 있겠는가?”
* * *
마차가 으슥하고 외진 골목에 와 있을 때였다. 달은 이미 중천에 떠 은은히 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범한이 마차에서 내리더니 정왕부 사람들을 먼저 돌려 버냈다. 그런데도 등자경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감찰원 관원들이 안 보이는 곳에서 자신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범한이 그림자 진 곳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감찰원 밀정 하나가 쥐도 새도 모르게 조용히 다가와 있었다. 계년조에 첫 번째로 합류한 사람으로 범한의 심복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범한이 말했다.
“등자월, 내일 감찰원에 다음의 밀령을 전해 줘요. 이부 상서, 흠천감 감정, 좌부 도어사가 최씨 가문이 이끌고 있는 사업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조사해 달라고요.”
등자월이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고 크고 부리부리한 눈을 번쩍였다.
“제사 대인, 황실은 성지 없이는 조사할 수 없습니다.”
그는 감찰원 내에서도 품계가 매우 높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세 대신의 배후에 모두 2 황자가 있음을 은연중에 다 알고 있었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대신 몇 명을 암암리에 조사하는 것뿐인데 뭘 그리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등자월은 자신의 대답이 제사 대인의 심기를 건드렸음을 알아차리고 즉각 입장을 바꿔 그러겠노라 답했다.
그러자 범한이 그를 바라보며 몇 마디 덧붙였다.
“왕계년은 물어야 할 것과 묻지 말아야 할 걸 가릴 줄 알았습니다. 그의 임무를 이어받았으니 이 점만은 명심해 둬요.”
등자월이 겁에 질려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그런 후 자기 눈앞에 불쑥 나타난 상자를 잠시 바라보기만 하다가 감히 열어 보지는 못하고 품에 품고는 뒷짐을 지며 걸어가는 범한 대인의 뒤를 따랐다. 그러다 겨우 용기를 내어 질문을 던졌다.
“대인, 감찰원과 연락을 취할 때 소인은 이제 어떤 식으로 해야 합니까?”
그는 이게 물어도 될 말인지 아닌지조차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범한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웃었다.
“공식 경로로 가면 안 되지요. 그러면 기록으로 남으니까요. 곧장 1처의 목철이란 자를 찾아가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범한은 성큼성큼 걸으며 오랜만에 밤이 무르익은 경도를 만끽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몇 마디만 더 하고 입을 닫아 버렸다.
“그 상자는 등자월 한 사람이 아닌 여러분에게 준 것입니다.”
경도의 밤은 북제의 밤보다 조금은 덜 북적북적했다. 경국 사람들은 이른바 태평성대란 것을 즐기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밤이 되면 대개 집에 틀어박혀서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 물론 유정강의 꽃놀이 배나 성 서쪽의 유곽이나 기생집은 이와는 완전히 딴판이기는 했다.
범한은 뒷짐을 지고 밤이 깊은 거리를 느긋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등자월도 상자를 품에 안고는 몇 발자국 뒤에서 범한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범한이 멈춰 서더니 여기저기 으슥한 곳을 향해 손짓을 했다. 그러자 범한의 안전을 위해 어두운 곳에 숨어 있던 감찰원 하급 관원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경도 사람이라면 내 곁에 그대들이 있다는 걸 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왜 굳이 어두운 곳으로만 다니는 거죠?”
범한이 웃으며 말하자 등자월이 씁쓸하게 웃으며 설명했다.
“감찰원 밀정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면 조정 관리들이 좋아하지 않아서입니다. 백성에게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그러다 대인께 나쁜 영향이라도 끼치면 안 되어서입니다.”
그의 말뜻을 이해한 범한이 웃었다.
“그렇다면 항상 민가 지붕 위로 다니던데 자는 사람 방해하는 건 신경이 안 쓰였나요?”
그러자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보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다가 결국에는 모두 제사 대인이 시키는 대로 거리로 나왔다. 이들은 원래 감찰원에서 인정받던 관원은 아니었다. 그런데 범한의 명령으로 왕계년이 ‘계년조’를 꾸릴 때 다방면으로 활용하기 좋은 이들로 신경 써서 찾아 모은 게 바로 이들이었다. 그렇게 계년조에 편입된 이들은 모두 범한 제사를 따르게 되었고 그 후로 감찰원 내에서 그야말로 순풍에 돛 단 인생을 살게 되었다. 감찰원 여덟 부처와 공무를 수행할 때면 그들로부터 매우 공손한 대우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매월 녹봉 외에도 거액의 수당을 받았다. 이와 같은 변화가 있자 이들은 범한 제사 대인을 따르게 된 것 자체를 행운으로 여기고 있었다.
한밤중이 가까워 오자 기온이 많이 떨어졌다. 그러자 등자월이 서둘러 몇 발자국 앞으로 나가 얇은 검은색 바람막이 옷을 범한에게 걸쳐 주고는 다시 원위치로 돌아갔다. 일고여덟에 달하는 사람은 모두 감찰원에서 특별 제작한 단벌로 된 검정 옷을 입고 걷고 있었다. 그런데 무릎 아래쪽은 빛을 반사하는 재질의 옷감으로 되어 있다 보니 얼핏 보면 공중에 떠다니는 것 같은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달빛 아래에서 일행은 아주 재밌는 방식으로 서로 간의 거리를 유지하며 걷고 있었다. 모두 침묵한 채로 범한을 가운데 두고 같은 보폭과 박자로 앞을 향해 나아갔다. 은빛 달빛은 눈처럼 뽀얗게 내려앉건만 검은 옷은 그냥 새카맣게 검을 뿐이었다.
* * *
다음 날, 범한은 천하대도 옆에 위치한 건물, 즉 감찰원으로 갔다. 감찰원에 도착한 범한은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가는 곳마다 감찰원 관원들이 무표정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제사 대인, 나오셨습니까.”
“범 제사 대인, 나오셨군요.”
범한은 일일이 웃는 얼굴로 응대하며 감찰원의 그 방을 향해 쉼 없이 나아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미 도착해 있는 감찰원 여덟 부처의 일곱 수장이 눈에 들어왔다.
범한이 살짝 허리를 굽히고 양손을 가슴팍까지 모으며 그들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그러자 감히 거만하게 있을 수 없는 일곱 수장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답례를 했다. 특히 4처 언약해는 살짝 상기된 기쁜 낯으로 범한을 맞아 주었다. 부자가 상봉해 한 이틀간 잘 지낸 터라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한편 진평평은 긴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웃는 것도 안 웃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범한이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진평평의 오른쪽 좌석에 앉았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상하게도 스승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범한의 생각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진평평이 양손으로 무릎을 문지르며 살짝 날카로운 소리로 자그마하게 말했다.
“지금 강남에 가서 즐겁게 지내고 있으니 그냥 놔두거라.”
범한이 잠시 웃다가 앞을 응시한 채 소리를 죽이고 물었다.
“대인께서는 언제 놀러 가실 것입니까?”
그러자 진평평이 범한을 잠시 쓱 보았다.
“그거야 네가 언제 이 자리를 물려받을 만한 능력을 갖추느냐에 달렸지.”
* * *
감찰원에서 이런 회의는 자주 열리는 게 아니었다. 한데 하필이면 범한이 올 때마다 회의라니. 물론 그 두 차례의 회의에서 범한은 빠질 수 없는 존재였다. 오늘은 범한이 북제행과 관련해 보고하는 자리였다. 범한의 보고를 들은 이들은 모두 마음을 놓았다. 북제에 깔아 둔 밀정 첩보망이 치명적으로 손상되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참으로 다행이라고 여겼다.
왕계년에게 잠시 북방 일을 맡겼다는 것과 관련해서는 모두 이견을 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첫째, 제사인 범한에게는 그럴 만한 권한이 있었다. 둘째, 왕계년은 감찰원에서 충분히 경력을 많이 쌓은 인물이었다. 왕계년은 옛날에 무기력하게 지내지만 않았다면 지금쯤 수장 중 한 명이 됐을지도 모를 사람이었다. 그러니 운이 좋게 범한 제사를 만나고 또 범한이 자기 사람인 그를 한 계급 승진시킨 일은 파격적인 인사 축에도 못 들었다. 셋째, 북제에서 노점을 활용한 활동은 정말 위험한 거래다. 이는 4처 언약해의 아들이 당한 일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어 진행된 감찰원 인사 발표에서 여러 사람의 예상을 뒤집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1처 수장 자리는 주격이 자살한 후 계속 공석이었다. 그리고 진평평 원장 대인이 곧장 인사를 하지 않아 관찰원 관원들은 언빙운이 귀국하면 그 자리에 앉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번 진평평 원장 대인이 발표한 임명안에 따르면 언빙운은 4처 수장이었다. 언빙운이 4처 수장이 되었다면 1처는 누가 관할하게 되는 거지? 언약해 대인인가?
진평평이 맥없이 눈을 떴다.
“언약해가 그동안 감찰원에 너무 오래 있어서 질렸다고 하더군. 그래서 감찰원 4처 수장 자리에서 사임을 했다네. 내일 문서가 작성되는 대로 이부(吏部)로 보낼 걸세. 경도에서 제일 한직인 곳에서 늙은 몸이나 쉬며 지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