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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237화 (237/1,108)

237화

“범한, 이리 오너라.”

깜짝 놀란 범한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잠시 미련이 남는 듯 향긋한 탕을 슬쩍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명랑하게 웃으며 황제가 앉아 있는 의자 곁으로 잽싸게 걸어갔다. 그런 후 영웅의 기개가 듬뿍 담긴 황제의 마른 얼굴을 감격과 침울함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며 두 손을 모아 들고 절을 했다.

늙은 신하들은 황제 폐하가 왜 범한을 가까이 오게 했는지 이유를 알고 싶었다. 이에 귀를 쫑긋 세우고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황제가 웃으며 범한을 잠시 바라보았다.

“유정 강가 찻집에서 만났던 걸 기억하느냐? 그때 짐이 네게 무엇을 허락하였더냐?”

범한은 고관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황제가 자신과 우연히 만난 일을 꺼낼 줄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에 웃으며 답했다.

“소신, 그때 황제 폐하를 알아보지 못하여 황궁 통령과 겨루기까지 하였나이다. 황제 폐하께 무례한 짓을 하였으니 소신, 실로 만 번 죽어 마땅하옵나이다.”

이부 상서가 자신이 3조를 모신 원로대신이라는 체면만 믿고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거만하게 말했다.

“이제 보니 황제 폐하께서 범한 대인을 궁 밖에서 만나신 적이 있으셨군요.”

경국의 황제는 국사를 논할 때면 성은 내지 않아도 위엄만큼은 한껏 세우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황제가 편안하게 껄껄껄 웃으며 그때 있었던 일을 대신들에게 말해 주기 시작했다. 범건은 속으로 ‘이런 황당한 일이!’라고 외쳤다. 다시 한번 황제 폐하에게 ‘이 개 같은 놈이 죄를 지었나이다! 부디 용서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빌어야 할 판이기 때문이었다. 한데 나머지 조정 대신들도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한 기연이 있었기에 범한이 황제 폐하게 총애받았던 거구나. 이 녀석은 운이 너무 좋군. 황제 폐하께서 범가네 아들놈에게 대체 또 뭘 해주셨는지 궁금하군, 하고 말이다.

“짐이 그때 네 누이의 혼처를 정해 주기로 말하지 않았더냐.”

범한을 바라보는 황제의 눈빛은 따스했다. 그리고 천자에게서는 절대 볼 수 없는 허세까지 보였다.

“범 낭자는 정왕 세자와 맺어 주기로 했다. 네가 보기에 이 혼사가 어떠한 것 같으냐?”

범한의 속은 그야말로 쓰디썼다. 하지만 얼굴에 역력히 감동한 표정을 짓더니 아버지과 함께 절하며 연신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라고 외쳤다. 그러자 옆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늙은 신하들은 놀라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아첨을 떨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께서 강가에서 우연히 신하를 만난 일이 아름다운 인연으로 맺어졌다는 둥, 정말로 천고의 미담이라는 둥 하면서 말이다.

이들의 대화하는 소리는 조금 큰 편이었다. 이에 옆방에서 식사 중인 황자들의 귀에까지 그 내용이 들리고 있었다. 1 황자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반면 태자는 살며시 미소를 짓더니 자신을 위해 범씨 가문을 끌어들인 건 똘똘한 결정이었다는 생각을 하고는 무의식적으로 2 황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2 황자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요 몇 년간 그러했듯이 태연자약 그 자체였다. 한데 이상하리만치 느릿느릿하게 음식을 씹고 있기에 태자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이놈은 모든 게 다 거짓이로군!’이라며 욕을 퍼부었다.

어서방에서는 황제를 덕을 칭송하며 즐겁게 떠드는 소리가 떠나질 않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범한의 고통과 고뇌는 알지 못했다.

* * *

범한은 노을이 질 무렵 황궁 문을 나섰다. 새로 난 길 입구에 말에 타고 있는 세자가 보이자 그의 고뇌는 더욱 커져만 갔다. 하지만 정왕 세자 이홍성이 매우 기쁜 얼굴로 자신을 맞아 주자 범한도 오랜만에 상대를 만난 반가움을 얼굴에 가득 담았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진짜 속마음은 속에 꼭꼭 숨겨 버렸다.

석양은 점점 더 서쪽으로 저물어 가고 이제 곧 어둠이 몰려올 시각이었다.

황궁 밖 광장 한구석, 새로 난 길 입구에서 쭉 뻗은 거리를 따라 저 먼 하늘을 바라보니 초승달이 수줍게 걸려 있었다. 어둠이 짙어지는 가운데 이홍성이 말에서 내려 대충 두 손을 모아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자기 앞에 있는 여인처럼 아름다운 친구를 살펴보다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 얼굴에서 층층이 붉은빛이 돌고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화사함이 뿜어져 나오는 걸 보니 오늘 좋은 일이 꽤 많았나 보군.”

그러자 범한이 웃으며 맞받아쳤다.

“몇 달 만에 만난 건데 그런 식으로 저를 놀리시다니요. 당당한 정왕 세자이시자 경도에서 다섯 번째로 높으신 공자께서 어찌 저처럼 박복한 놈을 놀리시는 겁니까.”

네 명의 황자를 제외하면 이홍성은 젊은이들 중에서는 가장 신분이 높았다. 만약 평범한 사이밖에 안 되는데 범한이 그의 신분 순위를 말한 거라면 이는 경박한 짓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이와 같은 이야기는 오히려 친근감을 배가시켜 주는 효과가 있었다.

이홍성이 순간 움찔했다. 요 녀석은 원래 자신을 도발하기는커녕 오히려 따스한 미소로 깊은 고독감과 싸늘함을 숨기는 게 일이거늘. 그런데 오늘은 왜 갑자기 성향을 바꾼 거지? 이홍성에게 어떤 일 하나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것으로 이유를 알 것 같자 소리 내어 웃었다.

“자네가 박복하다고? 황제 폐하께서 그리 총애하시거늘. 조회 후에는 자네만 콕 집어 남게 하셨다면서. 그런 식의 박복한 사정이라면 경도에 있는 관원들은 모두 이를 악물고 기꺼이 버텨 내려 할 걸세.”

그러자 범한은 손을 내저으며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는 등자경도 있었다. 등자경은 줄곧 황궁 밖에서 범한을 기다리고 있다가 어느새 그를 맞이하러 와 있는 중이었다. 다만 세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끼어들지 못하고 있을 뿐. 그런데 범한이 더는 할 말 없다는 듯 손을 내젓는 걸 보고는 때는 이때다 싶어 말을 건넸다.

“도련님, 어르신께서 제게 도련님을 따라다니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홍성이 웃었다.

“뭐라 했나? 범 대인께서 내가 이 사람을 취하게 할까 봐 걱정하신다는 건가?”

범한이 옆에 서서 말했다.

“그렇다면 따라오게나.”

그사이 사남 백작가의 마차가 당도했다. 이홍성은 왕부 종자에게 말을 끌고 오도록 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며 물었다.

“뭐 하는 건가, 지금 이 상황에 마차를 타고 가겠다는 건가? 말이 아니고?”

그러자 범한이 답했다.

“급할 것도 없는데 무엇 하러 말을 탄답니까?”

이홍성이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고개를 흔들며 탄식했다.

“경도에서 자네는 문무를 겸비한 걸로 알려져 있네. 한데 자네 행동을 보면 닭 한 마리 잡을 힘도 없는 서생이라고 무시당하기 딱 좋네그려.”

경국은 무(武)를 숭상하는 나라로 젊은이들은 말을 잘 타는 걸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런데 범한은 그 반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마차가 있으면 절대 말을 타려 하지 않았다. 그의 이런 괴벽은 최근 1년 사이 경도 곳곳에 소문이 나 있었다.

범한이 웃으며 무어라 질책하고는 마차에 타며 한마디 했다.

“말에 올라타면 엉덩이가 실룩거리지 않습니까!”

정왕부의 종자와 호위병이 두 사람을 둘러쌌다. 백작가의 호위 병사와 종도 가세했다. 그러자 십여 명으로 이루어진 작은 부대가 만들어졌다. 그들은 키 큰 말 한 마리와 눈길도 안 가게 생긴 검은 마차를 호위하며 성 동쪽을 향해 느긋하게 나아갔다.

경도에는 야간 통행금지가 없었다. 그러니 해 질 무렵 저녁에, 그것도 사람이 아직 꽤 많이 오가는 때에 거리를 지나가는 호위병 대열은 금세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들 호위병 대열을 보고 있다 보면 자연스레 영민하고 잘생긴 청년과 마차 위에 그려진 둥그런 네모 표식에도 눈이 가 이 둘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경도 백성들은 사절단이 귀국했다는 소식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정왕 세자와 함께 거닐고 있으니 마차 안 인물은 분명 전기적인 인물인 사남 백작가의 서자, 그러니까 작은 범 대인일 거라 생각했다. 이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속속 발걸음을 멈추고 이들 행렬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일부 광적인 이들은 마차를 향해 “범 시선, 범 시선!” 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작년 황궁의 밤 연회 일화는 경도에서는 이미 백성들 입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번에 북제의 장묵한 대가가 서적을 증정해 준 일화도 감찰원 8처를 통해 거리 곳곳까지 널리 알려져 범한의 명예가 한층 높아져 있었다.

또한 얼마 후에는 ‘모르는가? 모르는가?’라는 재강림한 시선의 작품도 널리 퍼져 나가게 되었다. 그러자 백성들은 범한 대인이 뜻밖에도 북제 상경에서, 그것도 벌건 대낮에 무수한 북제 젊은 귀족들 앞에서 고하 대종사의 마지막 여제자를 유혹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경도 백성들은 이 일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졌고, 어느새 이 일은 장묵한이 증정해 준 책보다 더 멋진 일화가 되어 있었다. ‘봤냐, 너희들이 성녀처럼 떠받드는 해당타타가 우리 범한 대인 손아귀에서는 한낱 꺾어 버려야 할 꽃이란 말이다!’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이는 곧 범한이 경국 백성들의 체면을 세워 준 것이었다. 이에 경도 백성들도 범한의 체면을 세워 주려 했다. 이에 가는 내내 길가에서는 범한에게 예를 갖춰 인사하는 이들이 끊이지 않았다. 인사를 하는 이들 중 대다수는 공부하는 문인이었지만 가끔씩 수줍은 기색으로 살며시 인사 건네는 아가씨들도 있었다.

민심을 후하게 얻은 건 범한이다 보니 정왕 세자는 자연스레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아무리 그가 경도에서 가장 고귀한 분일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정왕 세자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전혀 드러나 있지 않았다. 오히려 즐겁게 웃고 있었다. 마치 범한이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게 자신에게도 영광스러운 일인 것처럼 보였다.

마차 밖에서 나는 토론하는 소리, 문안 인사 하는 소리를 범한은 모두 듣고 있었다. 그렇다면 범한은 어딘가의 우두머리라도 되는 듯 창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손이라도 흔들어 감사 인사를 해주거나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만족감에 찬 웃는 모습 정도는 보여 주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마차 안에 콕 박혀서 아무도 모르게 입가에 자포자기한 듯한 쓴웃음만 띠고 있었다.

* * *

세자가 귀국 환영회 장소로 잡은 곳은 일석거였다. 범한이 경도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웅건하고 힘 있는 풍격이 있다고 평한 그 주점이었다. 이곳은 경도에서 호화롭고 사치스럽기로 유명했다. 그런데 조용한 곳도 아니었고 대단히 훌륭한 요릿집은 더더욱 아니어서 범한은 왜 이홍성이 이런 곳을 골랐는지 의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곳이 싫은 건 아니었다.

마차에서 내려서 보니 오늘따라 일석거는 유난히 조용했다. 건물 앞으로 난 길에도 행인이 많지 않았고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이던 주점 안쪽도 오늘따라 너무나도 조용했다. 한데 다행히도 내부에 불빛만은 밝게 켜져 있었다. 불빛이 꺼져 있었다면 자신이 사절단으로 나갔다 온 수개월 안에 이 황금 알을 낳던 굴지의 주점이 장사가 안 되어 문을 닫은 줄로만 여겼을 것이다.

범한이 의심 어린 눈으로 보고 있자 이홍성은 일부러 장난 따위는 치지 않고 바로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오늘 내가 세를 내었다네.”

그러자 범한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위세 당당한 세자이시라 해도 이건 너무 과합니다. 매일 일석거를 드나드는 고관대작들이 많은데 고작 저와 밥 한 끼 드시자고 주변의 뒷말을 감당하시다니요. 시기와 질투를 사게 되실 수도 있습니다. 조용한 곳을 원하셨다면 성 서쪽에도 갈 곳이 많습니다. 이곳 음식을 좋아하셔서 이리하신 거라면 그냥 한 개 층만 세를 내시면 될 것을요. 주점 전체가 우리 둘만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니 너무 과시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정왕께서는 그냥 넘어가신다 해도 이 일이 황궁에 전해진다면 좋을 게 없지 않겠습니까.”

범한이 진지하게 말하자 이홍성은 그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그러다 살짝 감동받아 웃으며 말했다.

“뭐가 무섭단 말인가? 천하 사람 모두 부왕께서는 꽃을 기르는 걸 좋아하시고 나는 꽃을 따는 걸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다네. 지금껏 맹랑하게 행동해 ‘방탕 세자’라는 별명은 절대 못 벗을 것 같은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이 정도는 세자의 신분으로 충분히 부릴 수 있는 허세였다. 그래도 범한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런, 이제 곧 혼인하실 분 아닙니까. 자중 좀 하시지요.”

혼인이란 말에 이홍성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옅게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쑥스러워했다.

“자네야말로 너무 소심하게 이러지 말게. 자네가 쥔 권력이 작지 않다는 걸 알아야 하지 않는가. 게다가 자네 아내의 신분은······ 내 툭 까놓고 이야기함세. 황궁과 저택에 있을 때는 우리 같은 젊은 사람은 어떻게든 분수를 지킬 수밖에 없다네. 한데 일단 황궁과 저택 밖으로 나오면 우리는 진정한 어르신으로 거듭난다네. 그러니 옆에서 뭐라 하든 그냥 내버려 두게!”

너무나 맹랑하고 과장되고 오만한 말이었다. 그런데 이홍성이 말하니 이상하게도 반감이 일지 않았다.

범한은 황궁에 있을 때부터 화를 꾹 참고 억누르고 있던 중이라 이번에도 그냥 웃어넘겼다.

세자 이홍성을 따라 주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래쪽으로 갔을 때 그곳 편액에 반령 대인의 친필로 써진 황금색의 ‘일석거’란 세 글자가 보였다. 이홍성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나와 자네가 어디서 처음 만났는지 기억하는가?”

그러자 범한이 웃기 시작했다.

“바로 이곳이지요.”

“그렇다네. 고작 1년이 흘렀을 뿐이라니. 그때의 자네는 당찬 불굴의 기개로 이른바 인재라고 불리던 이들을 냉혹하게 평하며 얕보던 놈이었지. 한데 이제는 천하에서 가장 유명한 인재가 되어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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