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236화 (236/1,108)

236화

“경들도 모두 알 것이오. 황실 금고가 이름만 황실 금고지 여러 중요 사항과 맞물려 있음을 말이오.”

황제가 회한의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요 몇 년간 황실의 금고는 참으로 힘들었소. 신력 3년 때 남쪽에 물길을 만들고 북쪽에서는 추위를 막아 내야 했지. 이에 짐이 황실 금고에서 국고로 은자를 넣어 두라 했는데, 한데······ 광혜고(廣惠庫)가 은자도 꺼내 올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있더군!”

광혜고는 황실 금고 열 개 중 전표(錢票: 수표처럼 지폐로 된 돈)와 동전만을 보관하는 곳이고 금과 은은 승운고(承運庫)에서 보관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니 황제가 화를 내긴 했지만 화낼 대상을 잘못 짚은 것이었다. 그래도 어찌 되었든 승운고와 광혜고는 모두 장 공주와 호부에서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이에 호부 상서 범건은 호부가 10년 동안 광혜고와 승운고에 대해 전혀 관여할 수 없었는데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사죄했다.

한데 황제는 범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어 갔다.

“결국 신정은 흐지부지 끝났지 않았소. 그러니 짐은 황실 금고만은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 10년 전 재정이 풍부했던 때로 돌아가는 건 바라지도 않아. 단 적어도 조정에 다시 은전은 대줄 수 있을 정도는 되도록 만들어야겠소.”

황제는 그다지 크지 않은 음성과 격정적이지 않은 어조로 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위세에 눌려 대신들은 감히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누이가 신양으로 돌아갔으니 그 일을 관리할 만한 신하가 있어야겠지. 그러니 경들, 짐에게 적임자를 추천해 보시오.”

어서방의 몇몇 대신들과 황자들은 이게 막간극 같은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뒤쪽에 가만히 앉아 있는 범한이 폐하가 점찍어 둔 적임자란 건 경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앞서 황제 폐하가 연극을 해가며 범한을 치켜세운 건 다 이유가 있었던 것. 즉 신하들에게 잠시 후 황실 금고를 관리할 사람을 선발할 때 엇나가는 행동을 하지 말라며 미리 자신의 뜻을 밝힌 것이었다.

하지만 황실 금고의 상황이 황제 폐하가 말한 것처럼 그리 엉망이 아니란 것 정도는 이들도 알고 있었다. 매년 강남 지역에서 북쪽으로 오는 화물을 보면, 조정으로 들어오는 금액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은전으로 몇백만 냥 정도. 만약 황실 금고가 매우 은밀한 사업을 통해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면 경국에게는 사방으로 영토를 넓힐 재정적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한데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대신들은 순간 사남 백작가를 향해 은근히 시기심이 발동되었다.

그런데 황제 폐하가 이렇게나 불만을 표출하는 걸 보니,훗날 황실 금고를 누가 맡든 매년 상납하는 은전 양 때문에 골치깨나 썩어야 할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이 들자 대신들의 시기심은 순간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지금은 그 누구도 범한을 추천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건 체면 문제이자 경제적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황실 금고가 아무리 관리하기 어렵다고는 해도 책임자가 매년 받게 되는 이익은 적지 않을 터. 그리고 이들 대신은 매년 신양 쪽으로부터 적지 않은 보상을 받아야 했으니 이미 계산은 다 끝난 것이었다.

중신들은 입을 꾹 닫고 있고 범건은 관계 때문에 자기 아들의 이름을 말할 수 없고. 어서방에는 난처한 침묵만 흘렀다. 황제도 별말 없이 찻잔만 들고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한데 표정 변화가 없어서인지 그의 눈에 담긴 싸늘함을 발견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 * *

“소자가 추천하고자 하는······.”

“소자가 추천하고자 하는······.”

어서방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동시에 두 사람이 침묵을 깼는데 하필 그 두 사람이 태자와 2 황자였던 것이다. 상황이 흥미롭게 급반전되는 순간이었다.

황제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거라.”

2 황자가 태자를 슬쩍 바라보고는 조금 미안한 듯 웃었다.

“태자께서 추천인이 있다 하시니 소신은 경청하겠습니다.”

황제는 2 황자에게 잠시 눈길만 주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2 황자가 양보를 해주자 태자는 동궁의 주인이고 장래 경국의 황제가 될 자신이 적극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부황을 향해 예를 올렸다.

“부황, 소자는 범한을 추천하옵니다.”

어서방 사람들은 태자가 범한을 끌어들이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는 중인 걸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이 정도의 인심은 충분히 쓸 수 있는 것이었다. 한데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황제는 태자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2 황자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를 추천하려 하였느냐?”

그러자 2 황자가 수줍게 웃었다.

“소자가 추천할 이도······ 범한, 범 대인이옵니다.”

어서방은 여전히 조용했다. 그런데 황제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범한을 쓱 훑어보았다. 범한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무언가 대답을 하려 했다. 그런데 황제는 범한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담담히 입을 열었다.

“황자들이 범한을 추천했으니 그로 하지. 가을이 지난 후 결정을 내릴 것이오. 그러니 각 지역에 이 내용을 전달할 필요는 없겠지.”

황제의 말이 떨어지고 모든 게 정해졌다. 원래 이 일은 범한과 임완아의 혼사를 결정할 때 이미 황실에서 정해 놓은 사항이었다. 하지만 오늘 어서방에서 제의되어 통과되고 또 기록으로까지 남게 되었으니 이제는 절대 바뀔 수 없는 일이 된 것이었다. 그리고 아비인 범건이 국고를 장악했는데 아들인 범한마저 황실 금고를 장악하게 된 것이니, 어서방에 있는 이들은 찜찜하니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그들이 봤을 때 이 정도로 성은과 총애를 받는 가문은 경도에서 더는 없었다. 그리고 태자와 2 황자 모두 서로 나서서 범한을 추천했으니, 향후 몇 년 동안 사남 백작가는 지위가 상승하면 상승했지 떨어질 일은 없어 보였다. 이것이야말로 불난 데 제대로 기름 붓는 격 아닐까.

범건과 범한 부자가 서둘러 일어나 황제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연달아 “황공하옵나이다.”라고 외쳤다.

황제는 그들의 행동에 별 관심은 없었지만 그래도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왕 정해진 거 짐이 너희들에게 묻겠다. 왜 두 사람 모두 동시에 범한에게 관심을 가진 것이냐?”

그러자 태자가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웃으며 답했다.

“소자, 그저 대략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뿐이옵니다. 범건 상서 대인이 국가의 재정을 책임지고 있고 성과도 탁월하지 않습니까. 범한은 그러한 집안의 공자이니 그쪽으로 재능이 있을 거라 생각했사옵니다.”

2 황자 역시 웃으며 대답했다.

“소자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사옵니다. 황실 금고는 금과 은 같은 것을 취급하지 않사옵니까. 그러니 청렴하고 자부심을 지닌 대신이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나이다. 소자, 망언을 좀 하자면 요즘 조정에서는 부정부패가 기승을 부리고 있사옵니다. 지역마다 유명한 청백리가 있기는 하오나 대부분은 지방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일이옵니다. 범한 대인이 재주가 비상하고 학식이 높으며 청렴한 문인인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요. 그러니 그런 그가 황실 금고를 맡기에는 적격자라 생각하였사옵니다.”

“그래?”

황제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이치상으로는 겨우겨우 맞는 것 같구나. 한데 다른 이유는 없었느냐?”

태자와 2 황자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설마 황제 폐하께서 이번 기회에 자신들을 시험해 보려 하시는 건가? 둘 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활시위는 당겨진 상태니 쏠 수밖에 없었다. 이에 태자가 체면 따위 생각하지 않았다.

“둘째 황형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하옵니다. 황실 금고를 감찰하는 일은 줄곧 감찰원에서 하고 있사옵니다. 이에 범한 대인이 감찰원 제사이니 일을 처리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으로 생각하였나이다.”

2 황자와 함께 들어온 3 황자는 서 있는데 이미 한계가 와 다리가 저리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허옇게 수염이 난 대신들과 부황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는 터라 머리가 멍해져 있는 상태였다. 이에 조금 이상하게 웃으며 아이답게 한마디 하고 말았다.

“태자 형님, 형님 말씀대로라면 범한이 자신을 감찰하게 되는 거 아닙니까?”

그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그래서 언사가 조금 방자하기는 해도 사람들은 그냥 천진난만한 아이의 말로만 받아들였다. 하지만 무심코 툭 던진 말이 의외로 태자가 한 말의 허점을 정확히 짚어 내고 있었다. 대신들은 감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태자의 얼굴에는 살짝 화가 드리워졌다.

운 좋게도 2 황자는 고뇌하는 듯 말하며 넘어갔다.

“부황, 소신은 더 이상은 도무지 모르겠사옵니다.”

황제는 태자가 한 말에 대해 책망은 하지 않고 담담하게 몇 마디 더 던졌다.

“모르겠다고? 그렇다면 아까는 무엇을 믿고 범한을 추천한 것이냐?”

어서방에 있는 대신들은 황제가 이랬다저랬다 한다고 생각했다. 분명 범한을 의중에 두고 있으면서 왜 아들들을 못살게 구는 건지. 이에 황제 폐하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대신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입을 뻥끗했다가는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 같아서였다.

당사자인 범한은 지금 이 자리가 바늘방석을 넘어 불구덩이 같았다. 그리고 2 황자는 살짝 불안한 기세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사옵니다. 바로······ 소신이······ 범한 대인과 친한 사이라 그리했사옵니다.”

* * *

황제는 차분히 아들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잠시 후 갑자기 시원스레 웃기 시작했다.

“천 가지, 만 가지 이유는 필요 없느니라. 딱 하나면 되는 것을······. 황실 금고는 무엇이더냐? 바로 황실의 것이다. 범한이 황실 금고를 관리한다면 황실과 충분히 가까이 지내야 할 터. 범한은 태상사에서도 있었으니 황실과 친분 문제는 이미 충분히 해결된 것이었다.”

당연히 충분했다. 범한을 두고 어쩌고저쩌고해도 그는 부마 아니던가. 어찌 되었든 태자와 2 황자에게 그는 매제인 것이고. 옆에서 듣고 있던 태자는 어느새 속으로 탄식하고 있었다. 부황이 원하는 답을 찾아낸 둘째 황형은 역시 대단한 사람이라고, 자기는 왜 한발 늦었을까 하고 말이다.

* * *

대군(大軍)도 돌아왔고 국경도 처음으로 확정되어서 오늘 회의는 평소보다 훨씬 오래 진행된 것 같았다. 그런데 정말로 오찬 먹을 때를 훌쩍 넘긴 상태였다. 황제가 시각을 확인하더니 태감들에게 대신들과 황자들이 함께 먹을 수 있도록 식사를 준비시켰다. 범한은 오늘 처음으로 어선방에서 만든 음식을 먹는 것이었다. 채소와 생선, 닭고기로 차려진 식탁이어서 그런지 조금도 낯설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황제와의 식사는 상상했던 것처럼 괴롭지 않았고, 식사 전에 머리를 조아리거나 할 필요가 없어서 범한은 마음 편히 식사할 수 있었다.

아까 태자와 2 황자가 말할 때 범한은 그 말들을 전부 다 들어야만 했다. 그래서인지 긴 의자에 앉아 있는 중년 남자를 다시 보았을 때는 저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경계심이 일었다. 이에 범한은 황제가 자신을 총애하는 건 어떤 황당한 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제왕에게는 가족 간의 정 같은 게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범한이 이런 생각을 한 건 그가 통제하기 쉬운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물론 범한도 무릎을 꿇어야 할 때는 꿇고, 참아야 할 때는 참고, 들어야 할 때는 들었다. 하지만 참을 수 없을 만큼 궁지에 몰리면 미소 짓는 얼굴로 자기 왼쪽 종아리를 만지며 꿇지도, 참지도, 듣지도 않고 상대에게 엿을 먹여 버리는 게 범한의 진짜 모습이었다.

태자와 황자들은 황제가 첫술을 뜰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다가 옆방으로 가 식사를 했다. 식사를 시작한 황제는 대신들과 함께 한담을 나누기도 했다. 밥 먹는 자리다 보니 자연스레 국사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대신 누구네 집 우물물로 차를 끓여야 가장 맛있는지, 어느 지역의 수박이 거대한 바위만큼 크다든지 등등이 주제로 등장했다. 그렇게 세상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히 장묵한의 별세까지 언급되자 모두 목소리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서무 대학사와 안행서를 제외한 경국의 고위 관료들은, 심지어 황제 폐하까지 경국의 계몽 시기에 장묵한의 정책을 외운 적이 있어서였다.

어찌 되었든 이번 식사는 사남 백작가의 가족 식사 때보다는 한결 편안했다. 범한은 배가 많이 고팠다. 그래서 귀를 쫑긋 세우고 황제와 대신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가 젓가락을 들고 콩 싹을 넣어 맑게 끓여 낸 탕에서 기다란 콩 싹을 집어 입에 넣었을 때다. 갑자기 황제 폐하가 자신을 가리키며 하는 말이 들려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