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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235화 (235/1,108)

235화

태자와 1 황자는 예절 바른 자세로 황제가 앉아 있는 긴 의자 옆쪽에 서 있었다. 그러니 한 사람이 앉을 자리가 모자라기는 했어도 두 황자의 얼굴에 드러난 표정만으로도 이곳 규칙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었다.

원래 이곳에서 준비해 두던 의자 수는 항상 일곱 개였다. 그런 곳에 젊은 관원 하나가 더 들어와 있자 어서방의 태감은 난처해졌다. 왜냐하면 이제껏 범한을 본 적이 없어서였다. 단순히 잠시 말을 전하러 온 하급 관원인지 아니면 존귀한 신분인지 종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들은 모두 앉아 있는데 혼자 서 있다 보니 범한 혼자 튀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아버지인 범건 시랑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범한에게는 눈길을 전혀 주지 않았다. 이에 범한은 저도 모르게 자조적으로 웃으며 눈에 잘 띄지 않을 자리를 찾을 때까지 계속 뒷걸음질 쳤다.

범한이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는데 그 모습을 태자가 발견하고는 그를 향해 살그머니 웃어 주었다. 하지만 범한은 감히 눈빛으로만 응답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실수로 1 황자가 황제 폐하 옆에서 슬그머니 하품하는 걸 보고 말았다. 이에 범한은 1 황자가 어제 경도로 돌아온 후 얼마나 술을 많이 마셨으면 저렇게나 피곤해할까, 라고 생각했다.

유정강 강가 찻집에서 처음 만난 후 황제와 이렇게나 가까이 있는 건 범한에게는 처음이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았다. 이에 범한은 참지 못하고 고개를 살며시 들어 보았다. 그리고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는 못하고 재빨리 황제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전생 청나라 때 아버지인 황제의 용안을 보고 싶어 한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모천안(慕天颜: 용안을 보고 싶어 하다는 뜻도 있다)이란 관원이 있다는 기록은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마주하게 된다 할지라도 그 누구도 미녀 보듯 방자하게 감상할 수는 없는 게 황제의 용안 아니던가.

아주 빠르게 슬쩍 본 것이었지만 범한은 상대방의 용모를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하마터면 주변을 둘러보는 황제의 눈빛에 심장이 멎을 뻔했다.

황제가 범한을 잠깐 바라보았다. 하지만 범한이 자신을 본 것을 가지고 탓하지는 않았다. 범한의 얼굴에 안도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두려움을 느끼거나 한 건 아니었다. 잠시 후 태감이 흥경궁에서 어린 황자를 데리고 공부하던 2 황자를 데려왔다. 2 황자는 막내 황자의 손을 잡아 이끌며 어서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형제간의 화목한 모습에 황제가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만족감을 드러내는 것만 같았다. 태자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속으로 욕을 퍼붓는 중일 수도 있었다.

* * *

“범한에게 앉을 것을 가져다주어라.”

네 명의 황자가 긴 의자 주위에 나란히 서자 황제는 그제야 범한이 서 있는 걸 발견했다는 듯 분부를 내렸다.

범한이 살짝 놀라 답했다.

“소신, 어찌 감히 앉아 있을 수 있겠나이까.”

범한의 품계로 어서방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대단히 파격적인 일이거늘. 더군다나 황자 넷도 아직 서 있는데 어찌 그가 감히 앉을 수 있단 말인가. 나이 든 대신 여섯은 황제가 젊은 놈에게 의자를 하사하자 순간 궁둥이가 근질거려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 헛기침을 해댔다. 그들로서는 분명히 불만스러웠던 거다. 자신들은 조정에서 스무 해 동안 입도 제대로 뻥끗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이제 겨우 황제 앞에 앉을 자리가 생겼는데, 이 범한이란 놈은 어서방에 들어온 첫날 제 자리를 갖게 되었으니 말이다.

태자가 대신들을 쓱 훑어보고는 황제에게 공손히 말했다.

“아바마마, 범한은 아직 젊고 몸도 대신들보다는 튼튼하옵니다. 본인도 저리 황망해하니 그냥 서 있도록 하시옵소서.”

이곳에 평화를 가져오는 지극히 올바른 언사였다. 이에 대신들뿐만 아니라 범한도 모두 마음속으로 고마워했다.

여기에 1 황자가 몇 마디 더 보탰다.

“부황께서는 저희 형제들에게 이리 말씀하셨사옵니다. 여러 대신과 국사를 논하는 걸 들을 때는 반드시 서서 들으라고 말이옵니다. 왜냐하면 소자 훗날 태자 전하를 보필해 치국평천하를 이루어야 하니 이는 수업을 듣는 자리이며, 수업을 듣는 학생은 그에 합당한 자세를 취해야 하고······.”

그가 말을 모두 마치기 전이었지만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이미 자명했다. 네놈 범한은 아직 젊고 초보 관원이고 정치적인 경험도 없는데, 어찌하여 우리 황자들이 너를 스승으로 여겨야 하느냐는 이야기였다.

몇몇 나이 든 대신들은 수염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평범해 보이는 의자에는 대단히 많은 의미가 숨어 있어서였다. 그러니 오늘 어서방에서 범한에게 앉을 자리가 생긴다면 3각(1각은 15분, 3각은 45분)도 안 되어 경도 전체에 퍼지게 될 큰 사건이 될 것이라 대신들은 확신하고 있었다.

범한은 물 들어온 김에 노 저을 생각으로 황제에게 조금 전 황명을 물려 달라는 청을 올리려 했다. 한데 자신을 향한 황제의 태연한 눈빛에 살짝 움찔해 순간 말을 삼켜 버리고 말았다.

* * *

황제가 중신들을 쓱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어 직선적이고 시원시원해서 성적이 조금 조급한 1 황자를 잠시 바라보고는 다시 입을 뗐다.

“범한에게는 그 자리가 과분하기는 하군. 하나 오늘만큼은 앉도록 해야겠다. 힘들게 서 있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상을 주기 위함이니라.”

모두 황제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황제가 입을 연 이상은 어서방에서 다른 이야기가 튀어나올 여지가 없었다. 황제가 자신의 아들들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너희들 중 누구든 장묵한의 서적을 마차 한가득 가져올 수 있다면 짐이 자리를 내줄 것이다!”

그러자 모두 잠자코 있었다. 그 마차의 의미를 명확히 알고 있어서였다. 그러니 황제 폐하가 문치를 이룬 황제가 되려고 집착한다는 걸 알면서도 마차와 관련해서는 어찌 반박해 볼 수가 없었다.

황제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고 있던 터라 싸늘하게 말을 이어 갔다.

“이게 문인들만의 일이라 생각하지 마시오. 그렇다면 문인이란 무엇이오? 이곳에 있는 대신들 모두 문인이군. 문치(文治)와 무공에 있어 짐은 무공에는 부족함이 없지. 부족한 쪽은 문치와 관련된 것이고······ 천하 강토를 통일하기란 쉬운 일이지. 하나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 통일하는 일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가장 어려운 일이라오. 그러니 문치에 힘쓰지 않고 급하다고 칼이나 들이대면 안 될 일이지.”

1 황자의 얼굴에는 찬성할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부황의 말이 아직 다 끝나지 않은 터라 감히 끼어들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황제는 느릿느릿하지만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천하는 금세 차지할 수 있어도 그 천하를 금세 통치할 수는 없는 노릇. 문학의 도는 뜬구름 같아 보이지만 천하 선비들의 마음과 연계되어 있다네. 과거 짐이 세 차례나 북벌을 진행하면서 위씨들을 산산조각 내버렸지만 결국에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소? 전씨들이 그 틈을 타 일어난 것 말이오. 하나 수년간의 노력과 수많은 인재를 모았기에 오늘날의 북제 조정도 있는 것! 천명을 받든다고? 이 말 또한 문인들이 만들어 낸 것 아니었소? 그리고 서무! 안행서! 그대들은 경국의 대신이지만 과거 북위의 과거에도 참가했었지. 그렇다면 그대들은 대체 왜 그런 것이오?”

서무 대학사와 안행서 상서가 몸 둘 바를 몰라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가 손을 내저었다.

“이게 천하 선비들의 모습이란 말이지. 여전히 이렇게나 케케묵은 행동을 한단 말이야. 짐이 그대들을 탓하는 건 아닐세. 그러니 그대들도 괘념치 마시오. 그냥 짐은 그대들에게 말해 주고 싶었을 뿐이라오. 천하를 다시 세우고 선비들의 마음을 얻는 게 장점이 많다는 걸 말이오. 즉 각 군에서 어진 인재와 현명한 벼슬아치를 두면 여론도 더 좋아질 것이란 뜻이오.”

황제가 1 황자를 싸늘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짐도 네 생각을 다 아느니라. 하지만 출병했을 때 적이 덜 저항하면 네가 이끄는 병졸들이 덜 죽을 것 아니냐. 그런데도 싫다 하겠느냐?”

1 황자는 할 말이 없어 그냥 잠자코 있었다.

황제가 다시 차갑게 말을 이어 갔다.

“마차 한가득 실린 낡은 서적은 짐에게 더 많은 천하 인재들을 모을 수 있게 해주고, 짐에서 무수히 많은 병사의 목숨을 살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니라. 그러니 짐이 범한을 의자에 앉도록 상을 내리는 게 무엇이 안 될 일이란 것이냐.”

사람들에게는 황제의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황제가 일부러 천하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 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왜 범건 상서는 아들에게 내려진 의자를 직접 나서서 사양하지 않는 걸까? 물론 경국이 아직 전란 중이고 그런 까닭에 백성들은 천하 통일이라는 열정과 사명감에 압도되어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니 범한이 이번 사절단 행에서 가져온 서적을 황제가 천하 통일이라는 커다란 대의와 연계시켜 말한 이상은 그 누구도 감히 말참견을 할 수 없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 폐하, 영명하시옵니다.”라고 말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 * *

마차와 천하가 대체 왜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거지? 어찌 되었든 범한은 의자를 내준 황제 폐하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평온한 얼굴로 거만하지도 급하지도 않게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진중히 앉아 있으면서 속으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황제 아버지께서 대체 왜 자신을 불구덩이 속에 집어넣어 구워 버리려 하는 건지, 원!

* * *

붉은색 융이 활짝 펴졌다. 그러자 안쪽에 있던 넓은 지도가 나타났다. 새로운 지도가 제작된 것이었다. 노란색으로 칠해진 경국의 영토가 계속해서 동북쪽을 향해 확장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황무지 말고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보였다. 경국의 영토 확장세는 너무나 맹렬했다. 동북쪽에 있는 북제가 아직까지는 거대한 영토를 지니고 있다지만 경국이라는 야수 앞에서는 그저 자그마한 혹에 불과했다. 북제는 신흥 국가였지만 과거 위나라의 대부분 영토를 계승한 상태였다. 한데 그것뿐만 아니라 위나라의 부패한 관료와 정부 기관 그리고 풍습까지도 계승하고 있었다.

범한도 지도를 바라보며 토론 내용을 듣고 있었다. 그에게는 난생처음으로 경국의 권력 중심에서 이 나라의 강인한 품격과 거친 야망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에 범한은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제 조정에게는 아직 싸울 여력이 있고 해당타타와 북제 황제의 생각을 봤을 때 천하에 다시 한번 전란이 일어날 수 있어서였다. 그러면 천하 백성들은 다시 재난에 희생될 것이고 세상이 언제 다시 회복될지는 기약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범한이 인간에게 연민을 가진 평화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냥 전쟁에 대해서는 정말로 흥미가 없을 뿐이었다.

황제는 또 대신들과 주요 국사를 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중간중간 큰 강의 제방과 관련된 일, 작은 제후국들의 세공(歲貢: 해마다 제후국에서 받아들이는 공물) 문제 등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범한은 이러한 일들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어 감히 끼어들 수 없었다. 설령 어떤 의견이 있어도 ‘바늘방석’에 앉아 있었기에 단 한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사람들은 어느새 범한이 어서방 한구석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이에 한가로워진 범한은 새로 만들어진 지도나 보며 계속 멍하니 있다가 침묵의 탄식이나 해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어떤 단어가 그의 귀에 내리꽂혔다. 황실 금고! 범한은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고 주의력을 점점 강화해 나갔다. 황제가 자신을 이 자리로 데려온 건 역시나 의자나 내주면서 체면이나 세워 주기 위한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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