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범한은 이번 북제행에서 주로 자신의 비밀스러운 일들을 처리했지, 조정을 위해 한 일은 사실 없었다. 언빙운의 귀국도 원래 순조롭게 끝날 일이었으므로 결코 힘들일 일도 아니었다. 이에 범한이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북제에 가 있는 동안 저는 한 게 없었습니다.”
“가끔은 아무 일도 안 한 게 잘한 것일 때가 있느니라.”
범건 상서가 서서히 눈을 떴다.
범한은 살짝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이제 경도성 밖에서 1 황자와 길을 두고 다투었던 일을 두고 부친이 훈계할 시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범건은 그 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예전에 네게 감찰원과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여러 차례 말했거늘, 내 말은 듣지 않고 오히려 진평평 그 늙은 개의 꼬임에 빠져 감찰원과 한통속이 되다니·········.”
범건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분이 좀 상한 사람처럼 이내 다시 말을 이어 갔다.
“편안하게 황실 금고나 지킬 것이지. 누가 봐도 얻기 힘든 기회이거늘!”
범한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오나 소자 생각으로는, 물론 아버님께서도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계시겠지만 신양 쪽에서는 이런 식으로 손을 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먼저 도발한 쪽은 장 공주마마이십니다. 그런데도 제가 감찰원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분과 어찌 맞설 수 있겠습니까.”
범건 상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이번 일에 대해 너무 엉성하게 따져 본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장 공주마마의 반응이 이리도 강렬할 줄이야. 이에 범건이 손을 내저었다.
“그분은 황제 폐하의 친누이니라. 황태후마마께서 가장 아끼는 딸이고 완아의 생모시지. 그러니 과거는 그냥 과거로 묻어 두어라.”
범한은 아버지의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란 사람은 단순히 재수 없다고 치부하며 그냥 넘어갈 부류는 아닌 것 같았지만 황실에 대한 충성심만은 변함이 없었다. 물론 허락된 범위 내에서 이 가문을 위해 크고 작은 이익을 챙기기는 했지만 말이다. 더군다나 아버지는 줄곧 범한 에게 감찰원을 멀리하라고 강력히 요구했었다. 경도의 이 이상하고 복잡하며 음침한 정치판 투쟁에 휘말리기를 원치 않는다며 말이다.
하지만 황실 금고의 돈과 조정에서의 정치, 이 둘은 늘 한 쌍과도 같은 사이였다. 그러니 범한이 보기에 아마도 아버지는 처음부터 이 중요한 원칙을 놓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아버지가 마음을 써준 것만큼은 그에게는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아버지, 염려 마세요. 소자, 언제나 조심하고 신중을 기하겠습니다.”
범건이 만족스러워했다.
“진정한 강자만이 약해 보일 자격이 있는 것이다. 약자는 애당초 무능한 사람이니 약해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지. 그러니 이 이치를 잘 생각해 보거라.”
아버지의 뜻을 명확히 이해한 범한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다 돌연 어떤 일이 생각나 질문을 던졌다.
“아버지, 경도에 돌아온 후에도 고달을 포함한 일곱 호위들이 계속 저와 함께 다녀도 되나요?”
범건 상서가 아들을 쓱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줄곧 엄숙함을 유지하고 있던 눈동자에 따스한 웃음을 띠었다.
“너도 알지 않느냐. 이 아비가 황실을 대신해 호위를 훈련하고 관리하고 있어도 그들을 배정할 권한은 황실에서 쥐고 있다는 걸 말이다. 네가 그들을 데리고 있고 싶다면 내 황궁에 들어가 물어봐 주마. 하나 황제 폐하께서는 윤허하지 않으실 게다.”
범한이 잠시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고달을 포함한 일곱 호위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나 과묵한 고수들이 호위 무사로 있어 준다면 자신의 안전을 최대한으로 보장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무도하강 근처 습지대에서 일곱 호위와 연합해 공격하자 해당타타도 쩔쩔매지 않았던가. 그 정도의 실력이라면 감찰원 6처에 있는 검수(劍手: 칼잡이, 검의 고수)들보다 실력이 더 높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앞서 왕계년을 통해 조직한 계년조(組)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물론 계년조는 가장 믿을 만하고 충성스러운 이들이었다. 또한 왕계년의 지도 아래 정보 수집이며 다른 일까지 두루두루 실력을 쌓아 온 이들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무공이 약한 게 흠이었다.
하지만 범한도 잘 알고 있었다. 호위는 원래 황자들을 호위하려고 둔 이들이라는 걸 말이다. 그래서 서로군 근위병 내에도 몇 명 배치되어 1 황자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가 가끔씩 호위를 대신들에게 붙여 주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건 전부 특수한 경우에 한해서였다. 예를 들어 범한의 장인 임약보 재상이 사직하고 낙향할 때 황제가 그에게 네 명의 호위를 붙여 준 경우처럼 말이다. 이는 재상이 평생 국가에 공헌한 것을 치하하고 여정의 안전을 도모해 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임무를 완수한 호위는 곧장 경도로 돌아와 눈에 띄지 않는 민가로 사라져 버리도록 되어 있었다.
범한이 이리 많이 알고 있는 건 범건이 황제 폐하를 대신해 호위를 관리하고 있어서였다. 그러니 사절단이 경도로 돌아왔는데도 호위가 자신을 따라다니면, 그리고 그 사실을 황실에서 알게 되면 골치 아파질 것이 분명했다.
아들의 얼굴에 애석한 기색이 역력하자 범건 상서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이 아이가 제 어미를 많이 닮아 세인을 능가하는 능력을 지녔지만 아직 평범한 젊은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에 범건이 범한에게 무언가를 일깨워 주었다.
“네가 집을 떠나 있는 동안 사천립이란 수재가 자주 문안 인사를 왔단다. 몇 번 만나봤는데 그야말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인재더구나.”
범한은 놀라 잠시 머리가 멍했지만 이내 그 뜻을 이해했다. 자신이 감찰원을 떠나지 않기로 결심했고 또 스스로를 위해 조정에서의 앞날까지 도모하고 있다는 걸 아버지께서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니 자신에게 그들 문하생을 잊지 말라는 일깨움을 주신 것이었다.
범한은 현재 천하 문인의 마음속에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전 재상인 장인어른이 남겨 둔 문하생들을 통해 조정에서 조력을 얻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범한은 자기 사람들이 향후 조정에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만들 필요가 있었다.
아버님의 속뜻을 이해한 범한은 절로 감탄했다. 하지만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제대로 된 감정 표현법을 배우지 못한 탓에 그냥 아버지를 향해 깊이 허리를 숙여 절하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범건 상서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범한에게 거처로 돌아가도록 했다. 그 순간 범한은 잠시 어떤 일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그런데 누이의 혼사와 관련해서는 너무 일찍 거론하면 안 되고 차근차근히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이에 범한은 공손히 인사를 하고는 서재에서 나섰다.
범건 상서는 서재를 나서는 범한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뒤쪽으로 제법 꼿꼿하게 힘이 들어가 있자 그의 눈에서 만족감과 안도감이 흘러나왔다. 이런 아들을 두었는데 아비로서 뭘 더 바랄까. 범건이 그릇에 남아 있던 과즙을 마저 마셨다. 그는 이 아이가 무엇을 눈치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범한의 심성을 놓고 보자면 상대방이 직접 말하지 않는 이상 당연히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니 범씨 일족의 앞날은 이 아이에게 달린 것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범건은 어느새 이미 경국의 권력 중심에서 떠난 임약보 전 재상을 떠올리며 탄복하고 있었다. 그 늙은 여우는 참으로 운이 좋았다. 자신은 그리 많은 대가를 치르며 십여 년 동안 고생을 했는데 그는 고작 딸 하나 낳아 놓고 그리 좋은 운을 누리고 있으니 말이다.
* * *
9월은 번뇌할 것조차 없는 평범하고 무료하고 평탄한 한 달이었다.
범한은 마차에 앉아 차창의 나무살을 가볍게 때리며 기이한 절주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박자에 맞추어 옆 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입궁은 절대 다수의 신하들에게는 매우 엄숙한 일인데 범한은 온통 무료하다는 생각뿐이었다.
9월 초하루 경도로 돌아왔을 때 아내, 아버지와 함께 결심한 게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동안 조정과 경도 안팎에서는 자신을 번뇌하게 만드는 일이 전혀 없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면 황궁에서 작위를 받고 고개를 조아릴 것이고, 그런 후 다시 감찰원에 가서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긁어 오면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지금 기분은 다시 창산으로 돌아가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창살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갑자기 멈추었다. 문득 누이의 혼사에 이어 이홍성 이놈이 저녁에 유정강에서 술판을 벌여 자신의 환영회를 해주겠다는 약속이 생각나서였다. 범한의 얼굴에 잠시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이 평범하고 무료한 9월이 이제 보니 그냥 개 같은 인생 그 자체였던 것이다.
* * *
오늘은 아침 일찍 조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이에 아침 댓바람부터 많은 대신이 황궁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듣자 하니 여러 해 전에는 일부 나이 든 대신들이 근면함과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한밤중에 관복으로 갈아입고 여명이 뜨기도 전에 황궁 문 앞으로 나와 기다렸다고 한다. 황궁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날 때를 기다리기 위해서라고. 그래서 그 늙은 신하들이 고령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밤중이면 유달리 귀에 거슬렸던 소리가 꽤 오랫동안 안 들리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황제는 명예를 탐하는 자를 가장 혐오했다. 이에 대신들은 황궁 문 앞에 너무 일찍이도, 그렇다고 너무 늦게도 도착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자 누가 낸 묘수인지는 모르겠지만 몇몇 대인들은 새로 난 길에 위치한 찻집에 자리를 하나 예약해 놓기 시작했다. 그들은 먼동이 터올 때쯤 저택을 나와 찻집, 예약해 둔 자리로 가 기다렸다. 그사이 그들은 종자들을 궁문 앞으로 보내 동정을 살피도록 했고 종자들이 정보를 보내오면 적절한 때에 가서 줄을 서는 방법을 활용했다.
감찰원 제사는 품계가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잊힌 신비한 존재에 불과했다. 그런데 범한이 바로 이 제사였다. 그것도 경국이 개국한 이래 첫 번째 제사. 그러니 지금 범한의 품계는 태학 4품 관원에 불과했다. 황제 폐하가 사절단에게 경과 보고를 듣지 않는다면 범한은 조회에 참석할 자격조차 없는 것이었다. 이에 범한은 관복을 차려입는 데 반나절씩이나 소모할 필요가 없었고 동이 트자 느긋하게 백작가에서 출발해 황궁으로 향했다. 그 결과 그는 황궁 문이 열리기 전에 도착했는데도 대다수 대신보다 훨씬 늦게 도착한 상태였다.
한데 사람은 잘나갈수록 타인에게 질시를 받는 법. 더군다나 경도로 들어온 지 불과 1년 반밖에 안 되는, 잘나가도 너무 잘나가는 젊은 후배라면 더더욱 그렇게 되는 법. 그리고 그 후배란 자가 대부분 대신들의 체면을 손상시켰고, 상서 하나는 죽게 만들었으며, 다른 상서 하나는 쫓아낸 놈이라면 더더욱 질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을 터. 이른바 큰 자라가 울면 일반 자라도 따라 울고, 토끼가 죽으면 여우가 슬퍼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이에 잘생긴 감찰원 제사가 하품을 하며 말에서 내리자 대신들은 그를 경계심과 혐오의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범한이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이 자리에 모인 대신들은 각 부의 상서들과 각 사(寺)의 정경(正卿)들이었다. 2품 이상이 되는 관리들은 모두 황제로부터 봉호를 받은 아내가 있었고, 황제로부터 받은 하사품을 집에 몇 개씩은 두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이도 어린 범한이 이들 대신보다 늦게 오다니······. 만약 범한 뒤에 범건 상서가 없었다면, 특히 그 절름발이가 없었다면 이들 경국의 진짜 고위 관리들은 일찌감치 범한에게 욕을 퍼부었을 것이다.
이렇듯 상황이 여의치 않자 대신들은 범한을 고깝지 않은 싸늘한 눈으로 잠시 흘겨보고는 거만하게 고개를 돌렸다. 군신들 중에는 과거에 임약보가 발탁한 인물 몇몇이 섞여 있었다. 그들은 위로와 격려의 말을 몇 마디 해주려 서 있던 줄에서 벗어나 범한에게 가려 했다. 하지만 동료들이 멸시의 눈빛을 따갑게 쏟아 내고 있는 걸 알고는 순간 머리가 지끈거려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대신 따스한 눈길로 범한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대신들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자신을 훑고 지나가자 범한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얼굴에 평온한 미소를 띠고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은 자세로 두 손을 모아 대신들을 향해 문안 인사를 올렸다. 그런데 이때 뒤쪽에서 누군가가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범건 상서가 오늘따라 늦게 온 것이었다. 그는 아들과 함께 온 게 아니었다. 이에 범한은 서둘러 아버지를 맞이하러 갔다. 그리고 마차에서 내리는 아버지를 조심스레 부축했다.
범건 상서가 범한을 잠시 쳐다보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 아비가 그 정도로 늙지는 않았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