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일단 한 가지 이유는 나왔네요. 그런데 1 황자마마께서 경도로 돌아오신 이상은 쥐고 계신 병권을 반납하셔야 하잖아요. 그리고 군 측이 어떤 의견을 내놓든 그분에게 미치는 영향이 큰 것도 아니고요.”
왜 황궁에서는 범한이 황자 셋과 동시에 결연을 맺었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걸까? 임완아는 이런 범한의 생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가 하나 더 있어요. 어쩌면 상공이 잊고 있었나 봐요. 세분 황자 오라버니 중 저와 가장 가까운 분이 바로······ 1 황자 오라버니세요. 그러니 나를 봐서라도 그분이 당신을 원수로 간주하시는 일은 없을 거예요.”
범한이 소리 내어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아는 한 임완아는 황궁에서 자랐고 대부분의 시간을 영 재인의 궁에서 지냈다. 그러니 임완아가 1 황자와 가장 친한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자신이 계산을 할 때 무심코 이 두 사람의 관계를 고의로 간과해 버린 게 문제라면 문제랄까.
어쩌면 내면 깊은 곳에서 처와 그 황자들을 한데 묶어 생각하는 걸 거부해서일지도 모른다.
임완아는 사실 범한의 걱정거리를 알고 있었다. 이에 부드럽고 작은 음성으로 말했다.
“사실 내 보기엔 상공이 걱정이 조금 많은 것 같아요. 황제 폐하께서는 아직 건강하세요. 그러니 당신이 걱정하는 일은 한참 후에야 일어날 거예요.”
범한이 한숨을 내쉬며 임완아를 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먼 앞날에 대해 걱정하지 않으면 가까운 시일 내에 일이 터지게 마련이에요. 이번에 경도로 돌아와 분위기를 보니 알겠더라고요. 내년에 내가 정말로 황실 금고를 물려받게 되면 당신의 태자 오라버니, 1 황자 오라버니, 2 황자 오라버니께서 날 놓아주려 하지 않으실 것 같더군요.”
“작년에 창산에서 내가 상공에게 했던 제안 어때요?”
임완아는 이 순간만큼은 열예닐곱 살 먹은 아가씨가 아닌 나이 많은 책사 같았다. 어찌 되었든 장 공주의 친딸이니 이 방면에는 많든 적든 유전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범한도 줄곧 그녀의 의견을 신뢰했던 것이고. 하지만 창산에서의 제안은 아직까지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범한이 살며시 고개를 숙이고 느릿하고 확고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 스스로 권한을 축소한 건 도리상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한 것입니다. 나 같은 젊은 신하가 손에 감찰원과 황실 금고를 쥐고 있다는 건 너무나 과중한 성은을 입은 것이고, 너무 큰 권력을 쥔 것입니다. 이는 원래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완아, 황실 금고는 절대 포기 못 해요.”
임완아는 왜 부군이 황실 금고만큼은 포기 못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아내 된 입장에서 묵묵히 지지를 해주어야 했다. 이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알겠어요.”
범한이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황실 금고를 포기 못 한다 했는데 감찰원은 더욱 포기 못 하겠어요.”
황실 금고가 황금 광산이라면 감찰원은 그 황금 광산을 지키는 군대였다. 그러니 황실 금고만 갖고 있다면 범한은 항상 불안에 떨어야 하는 벌거벗은 미인 꼴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는 곧 황실 사람들에게 멋대로 능욕당하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된다.
임완아가 탄식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다면 상공, 많이 힘드실 거예요.”
임완아가 갑자기 범한의 두 눈을 응시하며 말을 이어 갔다.
“자신 있어요?”
범한이 엷게 웃으며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감히 장담은 못 하겠네요.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내가 잘난 척과 자기 연민이 좀 심한 편이잖아요.”
임완아가 웃기 시작했다. 그러다 돌연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사실 내게 다른 방법이 있기는 해요.”
범한이 흥미를 보였다.
“무슨 방법이죠?”
임완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리고 대체 무슨 생각에서 그런 건지 작은 소리로 말했다.
“······해당타타 낭자를 이 집으로 들이는 거예요!”
범한이 대경실색했다. 처가 내놓은 계획은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임완아가 흥분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해당타타 낭자는 9품상의 강자잖아요. 상공도 그녀가 언젠가는 대종사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고요. 우리 집안에 대종사가 있다고 생각해 봐요. 게다가 그녀에게는 고하 문파라는 뒷배가 있어요. 그러면 아무리 경국의 황자 오라버니들이라고 해도 감히 상공을 어쩌지 못할 거예요. 황제 폐하도 마찬가지고요. 당신을 구슬리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셔야 하겠지요. 섭중 가문을 봐요. 섭류운 한 분 나왔을 뿐인데 조정 관리들 사이에서는 십여 년 동안 최고 가문으로 쳐주고······.”
범한도 임완아의 말이 일리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누구든 해당타타를 처로 들인다면 그것은 곧 집안에 단서철권(丹書鐵券: 대대로 특권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문서)과 면사금패(免死金牌: 죽을죄에도 면죄부를 주는 패)를 들인 것과 같았다. 하지만 범한은 이것이 자신의 처가 던진 마지막 시험이란 건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밉살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해당타타는 생긴 게 그냥 그래요.”
임완아는 순간 깜짝 놀랐다. 그리고 이내 범한을 호되게 꾸짖었다.
“이 색마 같으니!”
범한은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그 순간 속으로는 처가 언급한 섭씨 가문에 대해 생각했다. 섭중은 경도 수비이고 섭령아는 곧 2 황자에게 시집을 가게 되어 있었다. 대체 황제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대종사? 만약 일이 정말로 그런 식으로 발전한다면 범한이 봤을 때 황궁에 있는 그들은 섭류운이란 대종사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 같았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내가 경도에 없는 동안 섭중 대인이 경도 수비에서 사직하지 않았나요?”
임완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범한이 속으로 한숨을 쉬고는 다시 물었다.
“어머니께서 편지는 보내셨어요?”
그가 어머니라고 한 이는 당연히 신양에 있는 장 공주였다. 비록 임완아와 그 절세 미녀 사이에 아무런 감정도 없다는 건 범한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처 앞에서만큼은 존경심을 표했다.
임완아는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그녀의 미간에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범한은 가엾다는 생각에 그녀의 미간을 어루만지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요즘 몸은 어떠십니까? 지금까지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느라 가장 중요한 일을 묻지 않고 있었다니 소인, 맞아야겠습니다!”
임완아가 웃었다.
“비개 대인이 자주 와줬어요. 그 환약을 계속 먹었더니 많이 좋아진 게 느껴질 정도예요.”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창산에서 요양을 잘했나 보네요. 올해도 겨울이 되면 온 가족이 창산으로 갑시다. 작년에는 온천에 몸을 담그지 못해서 조금 애석했거든요.”
두 사람의 말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이렇게 두 사람이 사랑 이야기를 나누고 사랑가를 흥얼거리고 있는데 밖에서 여종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도련님, 아씨 마님. 식사하세요. 어르신께서 이미 여러 번 재촉하셨습니다.”
범한이 괴성을 지르며 이불을 젖히고 벌떡 일어나 옷을 입기 시작했다. 원래는 뒤채에서 잠깐 있다가 곧장 아버지께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갈 생각이었다. 잠시 육체적인 놀이로 평안을 좀 얻고 가려 했을 뿐인데 도리어 이 보드라운 바닷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아버님께서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도 몽땅 잊은 채로 말이다.
범한은 아버지의 엄숙한 얼굴이 떠오르자 그분이 속으로 얼마나 화를 내고 계실지 눈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천 리 길 여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아들이 아버지께 인사는커녕 자기 아내에게 쪼르르 달려가 놀기부터 하다니. 이는 천지가 개벽한다 해도 예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완아도 범한을 원망하며 서둘러 옷을 입고 머리를 빗고 단장을 했다. 사사와 사기는 일찌감치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이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자 곧바로 들어와 전속력으로 두 주인의 의복과 머리 매무시를 정리해 주었다. 두 사람은 마치 아무것도 안 했다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등잔을 든 여종을 따라 앞채로 향했다.
대청에 들어서니 여종들이 한쪽에서 조용히 대기하고 있었다. 호부 상서 사남 백작 범건은 중앙에 엄숙하게 앉아 있었다. 유씨는 이미 정실부인이었지만 예전에 하던 게 습관으로 굳어서인지 지금도 백작 옆에 서서 잔이며 젓가락 따위를 챙기고 있었다. 범약약은 백작의 왼쪽에 앉아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범사철은 말석에 앉아 식탁 아래에 손을 숨기고 범한이 준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범한과 임완아가 들어오는 게 보이자 범약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범사철도 서둘러 물건을 소맷자락 속으로 숨기고 누나를 따라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정중앙에 앉아 있던 범건은 범한은 쳐다보지도 않고 며느리에게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며늘아기의 신분이 특수하다 보니 냉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명문가에서 식사할 때는 지켜야 할 규율이 많았다. 그동안은 범건이 공무가 바빠 가족들과 함께 정식으로 식사를 하는 경우가 매우 적었다.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범한이 먼 길에서 돌아온 날이지 않은가. 그러니 자연스레 예전보다 훨씬 더 규율을 지키는 식사 자리가 마련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식탁 위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고 함께 식사하는 시간은 그렇게 겨우겨우 끝을 맺었다. 그러자 그제야 범건이 아들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네게 작위가 내려질 것이다.”
1등급 남작, 정2품.
범한은 이 작위의 경중을 따져 보고는 이 일로 야기될 비난이 걱정되었다. 그런데 사실 범한은 지나치게 소심하고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북제 사절단으로 다녀온 일은 겉으로 봤을 때 그리 험난한 일은 아니지만 고된 임무인 건 맞았다. 초봄 조정 조회 석상에서 황제 폐하께서 임약보 재상과 범건 시랑의 체면을 깎아내린 후 범한을 경도 밖으로 억지로 내몬 거니까. 물론 그 일이 있은 후 범건이 호부 상서가 되고, 이번에 다시 범한에게 남작이란 작위가 내려지긴 했어도 세인의 눈에는 그다지 기인한 일로 비치지지는 않을 터였다. 그들이 봤을 때는 사남 백작가 가문에 단순히 두 번째 보상이 내려진 것뿐이니까 말이다.
더욱이 경도로 돌아온 후 세상 사람들은 왜 사남 백작가 아들에게 천자께서 큰 상을 내리시려 하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원인은 그의 문학적 재능 때문이었다. 문치를 장려하는 황제 폐하의 정책과 맞아떨어져서였다. 또한 범한이 이번 북제행에서 서적이 가득 든 마차까지 끌고 귀국했으니 황제 폐하께서 그에게 상을 하사하는 건 누가 봐도 당연한 일이었다.
황제가 범한에게 내린 직책이 고작 남작에 불과했어도 작위를 하사했다는 건 그만큼 그를 귀히 여긴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이는 그가 어떤 행동을 하든, 어찌 되었든 이득을 볼 것이란 뜻이기도 했다.
범한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성지는 언제쯤 도착할까요?”
이 시각 부자는 서재에서 이미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눈 뒤였다. 범한은 이번 북제행에서 숨길 필요가 없는 부분만 골라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해드렸다. 그러다 감찰원 사무와 겹치게 되는 이야기가 나오면 범건은 범한이 난색을 표하기도 전에 먼저 손을 흔들며 그 부분은 건너뛰고 말하도록 했다.
사실 범한은 아버지와 함께한 적이 거의 없었다. 어려서는 담주에서 자랐기 때문이고 경도로 들어온 후에는 함께 이야기를 나눈 적이 거의 없었다. 더군다나 둘의 대화는 대개가 이 단출하고 특별한 서재 안에서만 이루어졌다. 그러니 서로 부자의 정을 나눈다든가 하는 일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영문을 모르겠지만, 범한은 아버지의 귀 쪽으로 희끗희끗하게 난 흰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오자 북제의 풍류 가인들이 겪은 모진 풍상이 떠오르며 암담한 기분과 함께 양심의 가책이 밀려들었다.
진평평 원장 대인의 말이 맞았다. 사남 백작은 범한에게 빚진 게 없었다. 오히려 범한이 그에게 많은 빚을 졌지.
“내일 입궁하면 아마도 성지가 내려질 게다.”
호부 상서 범건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유씨가 밤마다 가져다주는 과즙을 맛있게 음미하며 말했다.
“이번에 북제에서 일을 잘했더구나. 진평평 원장이 네게 상이 내려지도록 주청을 올렸단다. 폐하께서도 아주 흡족해하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