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사기는 완아가 시집올 때 따라온 몸종이었다. 그리고 사사와 지위가 같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 죽이 잘 맞았다. 그런 사사가 붙잡고 못 들어가게 하자 사기는 안에서 주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금세 알아차리고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이내 들고 온 음식을 바라보면서 볼멘소리로 말했다.
“도련님께서 막 돌아오셨잖아. 그러니 뭐 좀 드시게 해야 하는데.”
그러자 사사가 웃으며 말했다.
“그냥 요기만 하는 간식이잖아. 앞채 저택에서 지금 제대로 된 밥상을 준비하고 있지 않아? 그러니까 다시 말해, 우리 도련님께서는······ 우선 뭐든 먹기만 하면 되는 거지.”
사기가 듣기에는 조금 거북스러울 정도로 경망스러운 말이었다. 특히나 자신들 같은 아랫사람이 아가씨를 음식 취급하며 농담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에 사기가 기분 나쁜 표정으로 사사를 노려보며 콧방귀를 뀌고는 쟁반을 들고 곁채로 들어갔다.
사사 입장에서는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다 이내 조금 전 자기 언사가 매우 불경했다는 게 생각나 혀를 내밀고는 얼른 사기를 따라 자리를 피했다. 잠시 후 곁방에서 한동안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다가 이따금 작게 웃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여종 둘이 이미 예전처럼 재미나게 지내는 모양이었다.
* * *
침소에 놓여 있는 커다란 침대 위. 그리고 그 위를 덮고 있는 이불 아래에서 범한의 오른손이 밖으로 불쑥 솟더니 빗 모양의 비녀를 집어 들었다. 집 안에 있는 동안에는 머리를 땋고 시원하게 있는 걸 좋아해서였다. 갈증이 난 범한이 침대 옆에 놓인 작은 탁자에서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그런 후 잠시 생각을 해보더니 찻잔을 완아의 입가로 가져가 반 잔 정도를 마시도록 했다.
두 뺨이 살짝 발그레해진 채 부드러운 눈길로 범한을 보고 있던 임완아가 따뜻한 차를 받아 마셨다. 그러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수줍게 화내며 범한의 왼쪽 팔뚝을 깨물며 말했다.
“상공처럼 안달이 나 있는 이도 없을 거예요! 더군다나 밤이 되자마자 이러면 종들도 몽땅 알아챘을 거 아니에요! 이제 무슨 낯으로 집 안 사람들을 대하란 겁니까!”
그러자 범한이 히죽히죽 웃으며 모로 누워 아내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매끄러운 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문질렀다. 범한이 매우 만족감을 느끼며 말했다.
“잠시 떨어졌다 다시 만나면 신혼 때보다 더 친밀해진다 하지 않습니까. 우리 꽤 오래 떨어져 있었어요. 그러니 애정 표현 좀 했기로서니 누가 감히 이러쿵저러쿵할 수 있겠어요?”
그런 후 눈동자를 살짝 굴리며 임완아를 놀리는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니까 내 말은, 조금 전에 이렇게 조바심 내지 않았으면 내가 밖에서 무슨 이상한 짓을 하고 다녔다고 의심했을 거 아니냐고요!”
임완아는 그제야 오늘 상공을 시험해 보려 했던 게 생각났다. 상공이 방으로 들어온 후 겨우 차 한 잔 마시는 정도의 시간 동안 상공에게 정신없이 굴욕을 당했기로서니 준비했던 말들을 몽땅 잊을 뻔하다니. 설마 상공은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 무슨 술수라도 부리는 걸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임완아는 살짝 부끄럽고 굴욕적인 생각이 들어 범한을 가볍게 때리며 준비한 말을 꺼냈다.
“상공이 말해 주지 않았다면 잊을 뻔했네요. 아까 당신 들으라고 시를 읊었는데 뭐 느끼는 거 없어요?”
범한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 준수한 얼굴에 이러한 행동을 더하니 외설적이라기보다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못된 남자처럼 보였다. 부부 관계에서 범한은 줄곧 행동파였다. 임완아의 생각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다짜고짜 침대에 눕혀 놓고 사랑부터 나눈 후 다시 이야기하자는 식이었다. 한데 자고로 여자란 이러한 친밀한 접촉을 한 후에는 정을 준 낭군을 더없이 좋아하게 되고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불평도 누그러지는 법. 그렇다 할지라도 이 일에 대해서는 언젠가는 말을 꺼내야 했기에 범한은 이번 기회에 과감히 내질러 버렸다.
“이런, 감히 날 안 들여보내 주다니 볼기짝을 쳐줘야겠군!”
그러자 임완아가 범한의 품으로 엎어지며 그윽한 음성으로 말했다.
“쳐보려면 치시지요! 그래 봤자 날 무시하는 그것밖에 할 줄 모르잖아요!”
“어찌 그런 말을 하는 거요?”
범한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설마 북제에서 닭 날개를 가져다주지 않았다고 화내는 건 아니겠죠?”
임완아가 몸을 일으켜 한쪽 무릎만 꿇고 앉았다. 그러자 잠옷이 스르륵 흘러내려 한쪽 어깨가 살짝 드러났다. 임완아가 범한의 눈을 주시만 하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입을 뗐다.
“아까는 기분이 나빴어요.”
이 세상 여자들도 질투는 하겠지만 임완아처럼 이렇게 대놓고 하지 않을 터. 범한은 순간 당황해 대체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몇 마디 건넸다.
“대체 어디서 온 식초를 먹었을까?(중국에서 ‘식초를 먹다’는 ‘질투’를 의미한다.) 그 시는 내가 쓴 게 맞긴 하나 당신이 상상하는 그런 게 아니에요.”
“갑자기 식초를 먹다니, 무슨 뜻이죠?”
임완아는 선뜻 범한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범한도 이제야 생각이 났다. 이 세상에는 ‘방 부인이 식초를 먹고 자살하려 해 자신의 뜻을 알렸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범한은 웃으며 관련 이야기를 해주었다. 물론 옛사람의 기록에서 봤다는 가짜 근거를 대며 말이다.
임완아는 이야기를 듣고는 방 현령 부인의 기개에 감탄했다. 하지만 분명 상공이 꾸며 낸 이야기고 어쩌면 자기 들으라고 일부러 꾸며 낸 것일 거란 생각에 울컥 화가 치밀었다.
“나는 그 여자처럼 당신을 독점할 생각에 속 좁게 굴 사람이 아니에요. 사사와 사기도 언젠가는 첩으로 들여야 하잖아요. 그러니 일부러 그런 이야기까지 들먹이며 나에 대해 재단할 필요는 없어요.”
범한은 처가 뜻을 오해하자 껄껄 웃었다.
“날 ‘독점’하고 싶어 하지 않다면 그거야말로 안 될 일인데.”
임완아는 어려서부터 황궁에서만 자란 여인이었다. 그러니 상공의 말 속에 숨은 독점욕이란 것에 대해 알지 못했다. 이에 그냥 이어지는 범한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질투가 아니었다면 아까는 왜 방 안으로 못 들어오게 한 거지요?”
임완아는 여전히 침대 위에서 한쪽 무릎만 꿇은 채로 있었다. 그리고 불만이 있는 사람처럼 두 뺨을 볼록하게 부풀리고 한참 있다가 입을 뗐다.
“이제는 이 시가 천하에 다 퍼졌다는 걸 알았겠네요. 경도 사람이라면 시선 범한이 시를 짓지 않겠다고 맹세한 걸 모두 알고 있어요. 한데 북제에 사신으로 가서 어떤 한 여인을 위해 그 맹세를 깨다니요!”
“그냥 짧은 시일 뿐입니다. 당신도 듣고 싶다면 매일 당신을 위해 시를 지어 줄 수 있습니다.”
범한이 눈이 가늘어지도록 웃으며 말하자 임완아가 가녀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짧은 시라고요? 듣자 하니 상공이 북제 상경성에서 지낼 때 날마다 그 해당타타인가 하는 여인과 나돌아다녔다더군요. 같이 술도 마시고 비 내리는 거리도 함께 걷고. 이미 미담이 되어 있더라고요.”
범한은 화도 나고 씁쓸했다. 북제 황제가 일부러 퍼트린 소문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니 임완아의 처지가 난처했을 건 자명했다. 이에 범한이 해명을 하려는데 아내가 질문을 하기에 잠자코 듣기만 했다.
“상공, 말해 봐요. 그······ 해당타타라는 여인은 대체 어떻게 생겼어요?”
범한은 깜짝 놀랐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우선 해당타타를 한껏 치켜세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내에게 사실을 왜곡해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시 말해 해당타타를 깎아내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비록 모든 남자가 아내와 잠자리를 할 때 다른 여자를 깎아내리는 염치없는 짓을 당연하게 하기는 해도 말이다. 이에 범한은 잠시 생각을 좀 해본 후 말하기 시작했다.
“해당타타는 북제 국사 고하의 마지막 제자이자 가장 총애를 받는 제자예요. 북제 황궁에서도 대단히 높은 지위에 있지요. 이번에 내가 북제에 사신으로 간 건 우리 경국의 이익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 해당타타 같은 중요한 인물과는 당연히 더 많이 친해져야 했답니다.”
그러자 임완아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해당타타란 낭자는 여기 남쪽에서는 명성도 없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모두 다 알게 되었잖아요. 그녀의 북쪽에서의 지위가. 상공에게 딱 하나만 더 물을게요. 해당타타 같은 신분의 여인도 첩으로 둘 수 있어요?”
대체 어떻게 이런 기상천외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 범한이 깜짝 놀라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임완아가 탄식하며 말을 이어 갔다.
“그 정도 여자라면 눈이 무척 높겠군요. 상공 정도가 아니면 그녀 눈에 차지 않을 거 같아요. 다만 그녀 신분으로는 여기에서 알맞은 자리를 찾기란 힘들겠죠. 그래서 내가 오늘 화가 났던 거예요. 분명 나중에 어떤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는데도 상공은 그런 거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일을 벌여서요.”
범한이 웃기 시작했다.
“그 해당타타란 여인을 취할 계획이 없는데 무슨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었겠습니까? 완아, 방금 그 말은 좀 웃겼어요.”
임완아가 대경실색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그 해당타타란 여인을 향해 동정심이 일어서였다. 이에 임완아가 범한을 꾸짖었다.
“상공, 설마 그녀를 이용만 하고 버릴 생각인 건가요?”
범한이 연신 손을 내저으며 꾹 참고 웃었다.
“이용하지도 않았는데 버리긴 뭘 버리겠습니까.”
* * *
잠시 후 임완아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요? 그렇다면 상공은 왜 시로 상대방의 마음을 얻으려 한 거죠?”
“마음을 얻는다고요?”
범한은 정말 어안이 벙벙했다. 그래서 한참을 생각해 보다가 경도를 떠나기 전 자신의 계획과 상경성에서의 여러 일에 대해 아내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고는 어느덧 의기양양하게 머리를 흔들어 대며 말했다.
“해당타타는 무공이 대단히 높답니다. 4대 종사를 제외하면 그녀도 몇 안 되는 최강자 중 한 명이에요. 그녀와 왕래하게 된 이상은 나도 이기(利器: 예리한 무기)를 준비해야 했어요.”
임와아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게 바로 상공이 말했던 마음 공략법인 건가요?”
“그렇지요.”
범한이 헤헤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양국이 교전하려면 심리적으로 상대방의 의지를 떨어뜨리는 게 우선이니까요.”
한참 후 임완아가 한숨을 내쉬며 한마디 했다.
“상공, 그 계획은······ 조금 파렴치해 보이네요.”
* * *
집안 내 풍파는 이렇게 일기도 전에 평정되었다. 범한은 잠시 생각을 해보다가 오늘 1 황자와 길을 먼저 쓰는 문제를 두고 다투었던 걸 처에게 말해 주었다. 완아는 황궁 안에서 자라 조정 일과 관련해서는 범한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다. 이에 혼인한 후부터 범한은 계획을 세울 때는 아내와 상의하는 게 점점 습관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임완아가 범한의 말을 들으며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언빙운과 같은 판단을 내렸다. 그가 1 황자에게 밉보이는 짓을 할 필요가 없었거니와 괜히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말이다. 범한은 비밀로 하고 있는 걱정거리까지 처에게 말해 줄 수는 없었다. 이에 따스하게 웃으며 말했다.
“완아, 당분간은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말아 줘요. 대신 그 일로 황실에서 나와 1 황자마마 사이가 훗날 적이 되었다고 믿으실지 아닐지에 대해서만 당신의 의견을 듣고 싶군요.”
임완아가 우습다는 듯 범한을 잠깐 쳐다보며 말했다.
“절대 불가능합니다.”
범한이 깜짝 놀라 물었다.
“왜요?”
임완아가 한숨을 푹 내쉰 후 답을 해주었다.
“사실 상공은 한 가지를 놓치고 있었어요. 네, 그래요. 대신들과 백성들에게 감찰원은 모두 음험하고 무서운 관청이에요. 6부 관원들 전부 뒤에서 감찰원을 검둥개라고 부르며 욕하고 있죠. 하지만 모두가 감찰원은 싫어하는 건 아니에요. 군 측, 추밀원, 서로군 같은 곳은 원래 감찰원에 대해 좋게 생각하고 있어요.”
범한은 금방 이해를 했다. 군대가 전쟁에 나서려면 가장 먼저 정보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감찰원이 천하에 깔아 둔 밀정의 첩보망은 군 측에게는 매우 튼튼한 지원군 같은 것이었다. 병사들의 피를 덜 희생하게 만들어 주는. 그러니 군 측은 감찰원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