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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230화 (230/1,108)

230화

범한은 찻잔을 받아 들었다. 하지만 바로 차를 마시기보다는 그다지 예쁘지는 않지만 단정하게 생긴 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방 안은 순간 괴이한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런데도 남매는 둘 다 인내심이 강했던 터라 서로가 먼저 말을 꺼내기만을 기다렸다.

결국에는 누이를 아끼는 범한이 탄식과 함께 먼저 입을 열었다.

“많이 괴롭겠구나. 무슨 일이든 내가 돌아온 후 결정되었으면 좋았을 것을.”

범약약의 얼굴에 침울함이 스쳤다. 오라버니가 벌써 자신의 생각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이에 범약약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래서 오라버니께서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오늘까지 미뤄 뒀고요.”

범약약이 몸을 일으켜 곧장 침대로 걸어가 그 아래에서 보따리 하나를 끄집어냈다. 그런 후 침대 뒤쪽 잡동사니를 넣어 두는 장에서 자그마한 상자 하나를 꺼내고는 다시 그것의 뚜껑을 열어 탁자 위에 놓았다. 안에는 은표 몇 장이 들어 있었다.

범약약이 말했다.

“집을 떠날 것입니다. 한데 이 몇 가지만 가지고는······ 많이 부족하네요.”

범약약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소맷자락에서 호신용 비수를 꺼냈다.

* * *

범한은 화나고 기쁘고 가슴이 아파 누이를 바라보았다.

“너는 대갓집 규수야. 그러니 이 세상이 얼마나 험난하고 위험한지 아는 게 없어. 시집가기 싫어서 이렇게 집을 떠나려는 거라면 아버님께서 걱정하실 거란 걸 생각은 해본 적 없니? 그리고 내 걱정은 해본 거니? 왜 이 오라비의 마음은 생각해 보지도 않고 이런 결정을 내린 거니?”

범약약은 고개를 숙이고 양손으로 소매 끝자락을 단단히 쥔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한참 후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 저를 중히 여기셨던 때가 있는 줄 아십니까? 그리고 오라버니도······ 설마 잊으신 건가요? 어려서부터 제게 자기 운명을 움켜쥐는 법을 배우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특히 혼인과 관련해서는 집안의 결정에 무조건 따르지 말라고요.”

범한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벼슬아치들의 딸 중에 실천으로 옮기는 건 고사하고 이런 식으로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는 아가씨가 또 어디에 있을까? 범한의 누이가 이리 용감하고 심지어는 무모하게 도망갈 준비를 한 건, 범한이 어려서부터 해주었던 이야기들 때문이 아닌 서한을 통해 가르쳐 주었던 도리들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너무 많은 걸 알려 준 터라 정말로 각성하려 하는 것일까?

범한은 무언가 불안한 사람처럼 탁자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옛날에 자신이 한 행동들이 누이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정말로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어찌 되었든 이 세계와 전생 세계는 완전히 다른 세상 아니던가. 그러니 남들과 다른 생각을 지니면 그것이 비수가 되어 당사자에게 도로 날아와 꽂힐 수 있었다. 이에 범한이 느닷없이 고개를 치켜들고는 온화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이번 일이 꼭 나쁜 일이라고만은 할 수 없어. 너는 이홍성 세자님과 함께 있어 본 적이 없지 않니. 그러니 훗날 불행한 혼인 생활을 하리란 건 아직 확정된 게 아니야!”

범약약은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있었다. 하지만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세자님과는 어려서부터 알던 사이입니다. 그러니 자연스레 잘 알게 되었죠. 제가 그분을 싫어한다는 걸 말이죠.”

만약 이 말을 외부인이 들었다면 어쩌면 놀라 까무러쳤을지도 모른다. 사남 백작가의 당당한 아가씨께서 이렇게 대놓고 싫다고 말하다니. 범한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지만 그래도 여전히 무언가 해명을 하려 노력했다.

“꼭 그렇지만은 않단다. 나와 네 형수를 봐. 황제 폐하께서 정해 주신 혼사인데도 지금 매우 행복하게 살고 있잖아.”

범약약이 고개를 확 치켜들고는 결연하고 고집스럽게 말했다.

“오라버니, 세상 모든 사람에게 오라버니와 새언니에게 일어난 것 같은 행운이 따르지는 않아요.”

누이가 자신의 말에 찬성하지 않다니. 범한은 처음 있는 일이라 순간 깜짝 놀랐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범약약은 자신을 볼 때마다 숭배하듯 좋아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던가. 그런 범약약이 처음으로 자신의 의견에 직접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하자 범한은 저도 모르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누이에게 어떤 변화가 생긴 거지?’

한동안 침묵을 거치면서 딱딱하게 굳어 있던 범한의 표정도 서서히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범한은 낭랑한 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 속에 담긴 시원함에는 한 치도 거짓이 없었다. 정말로 마음이 놓였다. ‘과거 그 꼬맹이가 이렇게나 자랐다니! 드디어 자기 생각을 고수하는 방법을 배웠다니!’라며 안도감이 들었다.

“약약아, 날 믿니?”

범한이 응원의 미소를 범약약에게 보이며 물었다.

범약약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예전처럼 평온하게 웃는 얼굴을 내보이며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범한이 탁자 위의 물건들을 잠깐 보고는 웃는 얼굴로 살며시 고개를 내저었다.

“날 믿겠다면 이런 장난은 그만하자. 내가 제대로 해결을 해줄게.”

황궁에서 혼처를 지정해 준 후 범약약은 줄곧 침묵 속에서 살았다. 그녀도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대역무도한 것인지, 황명에 항명하면 어떤 재앙이 닥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오라버니의 서한을 통해 교육받은 것 때문에 범약약은 이미 변한 상태였다. 그녀의 영혼 깊은 곳에 일찌감치 자유의 씨앗이 미약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누구에게도 이러한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심지어 내면 깊은 곳에서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오라버니가 자신의 결정을 반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런데 범한이 승낙하자, 그녀가 지난 한 달여 동안 품고 있던 불안은 가을날의 미풍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한 달 가까이 강하게 다잡고 신경 써왔던 것들을 한순간에 놓아 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 오라버니께서 돌아오셨잖아. 그러니 분명히 이 일을 해결해 주실 거야.’

* * *

남매가 수개월 동안 떨어져 있었으니 그만큼 할 말도 많을 터. 하지만 범약약은 오라버니의 얼굴빛이 조금 이상한 걸 보고는 문득 그가 왜 자기 처소에 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지금 이 시간에는 아버지와 대화하기 위해 서재에 있거나, 아니면 새언니와 함께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러다가 번뜩 무언가가 생각난 범약약은 저도 모르게 입을 가리고 살며시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오라버니, 조금 전 제게 그러셨잖아요. 새언니와는 폐하께서 정해 주신 혼사임에도 지금 행복하게 잘 살고 계시다고요. 그런데 지금 왜 이렇게 우울해하시는 거죠?”

범한은 순간 정신이 번쩍 났다. 누이는 아내와 사이가 좋으니 임완아가 왜 문을 걸어 닫고 있는지 알고 있을 거란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이에 서둘러 누이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니?”

그러자 범약약이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장난 섞인 웃음을 지었다.

“그 일은 이 누이가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직접 새언니께 가서 매달려 보세요.”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자신은 처신을 똑바르게 했는데 완아에게 매달려야 할 게 대체 무엇이란 말인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밖에서 여종이 소리치는 게 들려왔다.

“도련님, 아씨 마님께서 일어나셨습니다.”

범한이 여러 차례 머리를 가로로 내저었다. 아무리 봐도 아내가 투정을 부리는 듯했다. 그런데 본디 임완아는 완곡하고 함축적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모범적인 여인이 아니었던가. 어째서 세간의 뒷방 여인네들처럼 이리도 앞뒤 안 가리는 행동을 하는 거지? 자신이 힘들게 집에 돌아온 걸 알 텐데. 마중 나오지 않은 건 그렇다 쳐도 문전박대라니!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침소로 걸어가고 있던 범한의 마음은 점점 분노로 차올랐다. 하지만 문 앞에 당도했을 때 안에서 들려오는 시 낭송 소리를 듣는 순간, 분노는 사그라지고 얼굴에는 다채로운 표정이 떠올랐다.

참으로 맑고 달콤한 목소리다. 임완아의 목소리가 아니라면 누구의 것일까. 그리고 그 시 역시 무척 귀에 익은 것이었다.

“모르는가. 모르는가. 푸른 잎만 짙어지고 붉은 꽃은 시들었을 거란 걸.”

범한이 살짝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해당타타가 자신에게 속은 걸 알리기 위해 읊은 이청조의 문장이었다. 한데 분명 북제 해당타타와 자신 두 사람만 아는 구절이거늘 어찌하여 경국의 경도까지 전해진 걸까?

범한은 주먹 쥔 손을 입에 가져다 대고 두어 번 헛기침부터 했다. 그리고 발을 앞으로 내디뎌 손으로 문을 밀었다. 방문이 아주 부드럽게 미는 즉시 열렸다. 범한은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제대로 한판 붙을 예정이었다. 그러니 대결장의 문을 닫아걸고 상대를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법. 조금 전 범한이 헛기침을 한 것도 방 안에 있는 아내를 향한 사전 경고였다. ‘내가 왔소. 할 말 있으면방에서 합시다’라는.

이 시대의 사회에서는 남자를 더 귀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니 임완아는 아무리 출신이 범한보다 존귀해도 범씨 가문으로 시집온 이상 이치대로라면 이런 식으로 자신의 불만을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한데 이들 부부에게 적용되는 예법은 일반 벼슬아치 집안과는 다른 건 있었다. 그리고 범한은 비록 골수부터 남성 호르몬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존재이기는 했어도 정신적으로는 여성을 지극히 존중하고 있던 터였다.

더군다나 이렇게 저렇게 말해도 이번 일은 모두 범한 스스로가 자처한 일 아니던가. 누이는 집에서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고 마누라는 질투를 하고 있고. 하지만 만약 이 모든 게 범한 자신 때문에 비롯된 일이 아니었다면, 또 만약에 다른 집에서 일어난 일이었다면 벌써 대판 소란이 일었을지도 모른다.

* * *

“도련님.”

여종 사사가 입을 가리고 웃으며 방으로 들어오는 범한을 맞았다. 그녀가 범한의 외투를 벗기고 수건을 건네자 범한이 손을 내저으며 이미 닦았다는 의사 표시를 했다. 여종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며 범한은 속으로 또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누이와 완아에서 끝날 일이 아니었군. 범한에게 있어 사사라는 여종은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고 자신이 신분에 귀천을 두지 않고 예뻐하던 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족 막장극이 상연되자 여유롭게 구경하고 용감하게 자신을 비웃기까지 하다니!

그 순간 임완아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얇은 이불을 가슴팍까지 덮고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어깨에 흐트러뜨려 놓고 있었다. 딱 봐도 이제 막 잠에서 깬 사람 같았다. 그녀는 커다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돌아온 상공을 신기하면서도 달콤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범한의 노기를 받아 줄 준비는 전혀 없었는지 작고 앙증맞은 코끝으로 살며시 잉잉 소리를 내며 말하기 시작했다.

“상공, 마중 안 나갔다고 너무 나무라지 말아 줘용.”

범한이 그녀의 입술 사이로 드러난 도자기 같이 반들거리는 치아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리고 냉큼 침대로 가서 앉더니 아무런 해명도, 변명도 않고 대뜸 이불 속으로 손부터 쑥 집어넣었다. 범한은 그녀의 살짝 차가운 손을 덥석 쥐고는 주물럭거렸다. 요 몇 달 동안 뼈가 없는 것처럼 말랑거리는 완아의 손이 얼마나 그리웠던지.

사사는 아직 방 안에 있었다. 이에 임완아가 부끄러워하며 다급하게 사사 쪽으로 슬쩍 눈짓을 했다. 범한이 고개를 돌려 보니 사사가 탁자 위 약상자를 정리하는 척하면서 눈은 자기네 쪽을 향한 채 보고 있었다. 웃음이 터진 범한이 사사를 나무랐다.

“이런, 나쁜 버릇이 들었군. 보지 말아야 할 걸 함부로 보다니. 얼른 나가요!”

그러자 사사가 키득키득 웃고는 도련님과 아씨 마님께 인사를 올리고 문을 열고 나갔다. 사사가 손을 뒤로 한 채로 문을 닫을 때였다. 때마침 앞채에서 음식이 든 쟁반을 들고 오던 사기와 마주쳤고 사사는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서둘러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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