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사절단들이 황궁 문 앞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의 권위가 지엄하니 누구도 의례상 무엇 하나 허투루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천 리를 쉬지 않고 달려와 피곤할지라도 말이다. 한참이 지났건만 아무런 지시가 내려오지 않자 신하들은 슬슬 불안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이번 북제행에서 사신단은 대륙과 바다에 우리의 땅이 어딘지 명확히 하였다. 그리고 범한 정사도 북제 조정에서 큰 활약을 하지 않았던가. 비록 마차 안의 오래된 서적들은 값도 안 나가는 것처럼 보이긴 해도 어찌 보면 황제 폐하의 체면을 크게 살려 주는 것임에는 분명한데. 그런데도 우리를 이렇게 문밖에 세워 두고만 있다니!’
황궁 밖에서 사신단과 함께 있던 예부 관원들도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에 임소안이 범한 곁으로 다가와 작게 이야기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분명 1 황자마마를 알현하고 계실 거네. 그러니 신하된 도리로 더 기다려야 하지 않겠나.”
범한은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북제 공주의 마차가 이미 황궁 문지기 태감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으니 중요한 일은 거의 다 처리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범한 스스로도 사절단이 왜 황성 밖에서 찬 바람을 맞고 있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황성의 금군들이 무표정하고 싸늘한 눈빛으로 궁궐 밖에서 초조하고 황당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는 관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 황궁 문을 지키는 태감들은 사절단을 제대로 한번 봐줄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범한은 남들과 신분이 다르지 않던가. 아직은 군주 신분인, 더군다나 황궁 안에서 매우 총애를 받고 자란 이의 남편이고 또한 감찰원의 고위 관리이며, 이번에는 북제에 사절단으로 다녀온 인물이니 말이다. 그리고 생각을 해보니 나중에는 작위를 받을 수도 있었다. 이에 태감이 일찌감치 범한에게는 둥근 걸상을 내다 주며 거기에 앉아 기다리도록 해주었다.
그러자 범한이 깜짝 놀라 물었다.
“이리해도 예법에 맞는 것인가?”
그러자마자 그들 중 우두머리 태감이 한껏 아첨하는 얼굴로 걸어 나와 범한을 부축해 걸상 위에 앉히며 말했다.
“범한 도련님, 소인, 황제 폐하께서 대인을 아끼신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 리 길을 다녀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걸상에 앉아 계셔야지요.”
“이런, 후 내관이 어찌 여기까지······.”
범한이 일부러 놀란 척했다. 새어머니인 유씨 부인과 범약약을 따라 처음 입궁했을 때 만났던 이였다. 범한은 후 내관과 사남 백작가가 매우 친밀한 관계인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일부러 자신을 범한 도련님이라고 부른 것도 있고 해서 그를 향해 다정한 표정을 지어 주었다. 그러자 둘 사이의 친밀감이 제대로 드러난 것 같았다.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외국에서 이제 막 돌아왔네요. 그래서 오늘은 빈궁한 처지라 딱히 뭐 드릴 것이 없군요.”
그러자 후 내관이 날카로운 소리로 웃고는 소리를 낮췄다.
“범한 도련님은 돌도 황금으로 만드시는 분이란 거 다들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나중에는 황금 광산을 허리에 두르실 분 아닙니까!”
늙은 태감이 아첨 몇 마디를 더 하려는 찰나, 황궁 문이 소리를 내며 살짝 열렸다. 이어 한 태감이 뛰어나와 폐하의 명을 전했다. 범한은 서둘러 걸상을 치우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황궁 문 앞에 꿇어앉았다.
범한의 생각대로 황제는 그를 엄하게 꾸짖었다. 내용은 다름 아닌 재능을 믿고 남을 깔본다는 둥, 안하무인이라는 둥, 세상 무서운 줄 모른다는 둥 등이었다. 이 밖에 오늘은 피곤하니 범한에게 내일 다시 입궁해 보고를 하라는 내용과 사남 백작에게 자식 교육을 제대로 하고 엄히 벌을 내리란 명도 있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가서는 사절단에게 큰 상을 내릴 것이나 일단 돌아가 푹 쉬고 다음 날 다시 칭찬과 격려를 해주겠다는 내용이 나왔다.
사절단 신하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경도로 돌아온 첫날 이런 대접을 받을 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머리가 잘 돌아가는 관리들은 심장이 방망이질 쳐대는 가운데 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말로는 엄히 꾸짖으셨지만 결국에는 사남 백작에게 아들 교육 잘 시키라는 훈계 말고는 아무런 벌도 내리시지 않았으니 이제 보니 황제 폐하의 범한 대인을 향한 총애는 정말로 남달랐던 것이다.
범한이 고개를 조아리며 황제의 명을 받들었다. 힘들어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은근슬쩍 기뻐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범한이 궁둥이를 털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아는 이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작금의 궁중 금군 대통령인 궁전이었다.
궁전은 범한을 보자 기쁜 기색으로 다가가 몇 마디 건네려 했다. 하지만 범한은 지금은 부득이하게 시간이 안 된다는 듯 두 손을 모아 인사하고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는 훌쩍 말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양발로 박차를 가하고 채찍까지 휘둘렀다. 그러자 범한이 타고 있던 말은 황궁의 드넓은 광장을 나는 듯이 달려 어느새 먼지만 남기고 종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궁전은 깜짝 놀라 수하인 호위병들과 함께 저 멀리 피어나고 있는 연기를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속으로는 황궁 안에서는 허락 없이 말을 몰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은데 이처럼 재빨리 사라진 대신은 그도 이번에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 * *
가을은 아직 무르익지 않았건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범한의 마음은 터질 듯이 무르익어 있었다. 감찰원의 일도 이미 다 안배를 해둔 터였고 고달을 포함한 호위 일곱 명은 알아서 관련자들을 만나러 갈 터였다. 그러니 범한은 길게 뻗은 거리에서 말을 바람처럼 내달렸다. 그리고 얼마나 달렸을지 모를 무렵, 드디어 성 남쪽으로 들어선 말발굽 소리가 사남 백작가 문 앞 사자 석상이 있는 길 위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밤이 되고 거리 위로 늘어선 왕족, 대신들의 저택 앞에 등불이 내걸리기 시작했다. 흐릿한 등불만이 수없이 밝혀진 가운데 오직 사남 백작가 문 앞의 등불만 훤하니 밝혀져 있었다. 정문은 열려 있었고 종자, 호위병, 식객 모두 문밖에 서서 고개를 치켜들고는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문 안쪽에서는 유씨 부인이 직접 나서서 여종들과 어멈에게 차와 탕을 끓이도록 분부하고는 사남 백작가 가문의 제일 큰 도령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절단이 경국 외곽에 도착했다는 소식은 일찌감치 성안에도 전해진 터였다. 그래서 가족들은 의례적인 일정도 있고 해서 약 이틀 후에나 사절단이 입성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뒤채에 있는 젊은 아씨 마님은 오히려 싸늘하게 한마디 내뱉었다.
“오늘 반드시 돌아올 거네!”
모두 범한의 부인이 보통내기가 아닌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그렇게 말한 이상은 오늘 필시 도착하게 되어 있었다. 이에 모두 이런저런 준비를 하며 범한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집에서는 1 황자와 길을 두고 다툰 일은 모르고 있었다. 만약 알았다면 이곳 사람들 모두 깊이 걱정만 하고 있었을 터.
“오셨습니다, 오셨어요!”
눈이 좋은 종이 저 멀리서 달려오고 있는 말을 발견하고 말했다. 그러자 종들이 속속 돌계단 아래로 내려가 양쪽으로 서서 범한을 맞을 준비를 했다.
말발굽 소리가 울리고 범한이 도착했다. 범한이 말에서 내려오다가 등자(鐙子: 말을 타고 내릴 때 발 디딤 용으로 쓰는 것) 노릇을 하려던 등자경의 궁둥이를 가볍게 발로 차고 말았다. 이에 웃으며 한마디 해주었다.
“다리도 성치 않은 사람이 그런 일은 배우는 거 아니네.”
“도련님, 돌아오셨습니까!”
양쪽으로 늘어서 있던 종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범한은 아무런 말 없이 웃기만 하고는 돌계단을 두 걸음 걸어 올라갔다. 그러자 여종이 따뜻한 물수건을 건넸고 그는 그것으로 대충 얼굴을 닦았다. 이어 적당히 따뜻한 차를 받아 들고 입을 헹궜다. 필수적으로 거치는 과정이었으므로 범한은 이런 것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대신 집으로 돌아와 눈에 익은 종들을 보게 되자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다. 심지어는 문 뒤에서 웃는 얼굴로 있는 새어머니 유씨를 발견했을 때는 그녀의 웃음이 과거처럼 계산적인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진심이 담긴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버님은 서재에 계신단다.”
유씨가 범한의 손에서 수건을 받아 들고는 가벼운 목소리로 일러 주었다.
범한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돌연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자······.”
범한은 순간 작은어머니라고 말하려다가 말을 삼키고 미소 지은 얼굴로 말했다.
“먼저 누이와 완아부터 보고 오겠습니다. 아버지는 곧 가서 뵐게요.”
유씨는 이 집 큰아들을 ‘효(孝)’라는 명분을 가지고 구속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범한이 저택으로 들어선 순간 갑자기 검고 뚱뚱한 무언가가 뛰어나왔다. 범한은 화들짝 놀랐다. 그런 후 속으로 ‘몇 달 못 본 새 회계 신동이 어찌하여 검고 작은 철탑으로 변했을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까지 물어볼 여유는 없어서 단도직입적으로 몇 가지만 일러두었다.
“이따가 결산 보고 받을 거야. 내가 할 일이 있거든.”
깜짝 놀란 범사철이 발걸음을 멈추고는 범한을 나무랐다.
“이 도련님께서 오늘은 기분이 좋다고요. 그런데도 상대하지 않으시겠다면 형님은 읽지도 못하는 장부에 대해 저 역시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을 겁니다!”
범한은 깜짝 놀랐지만 이내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무의식적으로 성문 밖에서 본 황자 네 사람이 떠올라 품속에서 물건 하나를 꺼내 범사철에게 건넸다. 그리고 웃으며 꾸짖었다.
“장부는 무슨! 아무리 봐도 엉터리인데. 일단 너 혼자서 놀고 있어. 그리고 일단 우리 주인장 형제끼리 오랜만에 만났으니 정을 나눈다는 둥 하는 건 생략하자.”
그러자 범사철도 ‘이 도련님께서도 당신과 형제 간의 정을 나눌 생각 따위는 없어!’라며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범사철은 이런 생각을 하며 뒤채로 들어가는 범한을 한동안 노려보았다. 한데 왜 이렇게 매우 불편한 기분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 * *
혼례를 치른 범한은 백작가 뒤편에 자신의 저택을 마련했다. 그리고 이는 본래 사남 백작가에서 앞뒤로 통하는 두 채 가운데 뒤채를 쓰는 것이었다. 범한과 범약약과 매우 사이가 좋았고 임완아도 범약약과 서로 의기투합한 터라 범약약은 대부분 시간을 바로 이 뒤채에서 보내는 중이었다.
자신이 돌아왔는데도 아버지께서 서재에 계신 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아내 임완아와 누이 범약약이 마중을 나오지 않은 건 그에게는 너무나도 이상한 일이었다. 이에 범한은 더 속도를 내며 걸었다. 그러자 옆에서 따르던 어린 여종이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아가씨는 안에 계십니다. 아씨 마님께서도 아직 안에 계십니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여종의 말이 너무 불길하게 다가와서이기도 하거니와 누가 그렇게 말하도록 시킨 건지 알 수 없어서였다.
침소 앞에 도착한 범한이 조심스레 문을 열어 보았다. 한데 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다. 범한은 깜짝 놀랐다. 이에 순간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아 그냥 안쪽을 향해서 몇 차례 소리를 질러 보았다.
그런데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자 이상하다는 생각에 힘을 실어 문을 몇 차례 두드려 보았다. 만약 이 순간 그에게 아내를 존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곧장 문을 박살 내고 안으로 쳐들어갔을 것이다.
잠시 후 안쪽에서 여종 사사가 불안하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아씨 마님께서는 잠드셨습니다. 그러니 그만 두드리셔요.”
범한이 이맛살을 더 강하게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천 리 길을 마다않고 서둘러 왔건만 완아가 문을 걸어 잠그고 자신을 만나려 하지 않다니.
범한은 실내를 어두컴컴하게 밝힌 등불을 잠시 바라보고는 별다른 말 없이 소맷자락을 휘날리며 다른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두드리지 않고 곧장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방 안에 있는 여인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데 방에 들어온 이가 범한인 걸 확인하자 여인은 미간에 담았던 쌀쌀함과 경계심을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에서는 잠시 진심으로 기뻐하는 기색이 스치기까지 했다. 그런 그녀가 이내 무릎을 굽히고 나지막한 소리로 인사말을 건넸다.
“오라버니, 돌아오셨군요.”
범약약을 보는 순간 범한은 앞서 일었던 불쾌감이 모두 사라졌다. 이에 온화하게 웃으며 물었다.
“왜 그러니? 내가 돌아온 걸 보고서도 왜 기뻐하지 않는 거야?”
범약약이 살짝 웃더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오라비의 소맷자락을 잡아끌며 자리에 앉히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대단히 오랜만에 본 것도 아니잖아요. 제가 소리를 질러 대며 소란을 피우면 그제야 만족하실 겁니까?”
범한이 졌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꾸했다.
“넌 말이다, 어쩜 이렇게 항상 담담하니. 이 오라비 앞에서만이라도 고치면 안 되겠니?”
그러자 범약약이 웃으며 대답했다.
“고치면 약약이가 아니겠죠?”
말을 하면서 범약약은 차를 따랐다. 그리고 그것을 오라비에게 조심스레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