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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228화 (228/1,108)

228화

장 공주가 범한에게 몇 차례 당했을 때도 모두 그런 식으로 당한 것이었다. 특히 글 종이가 황궁 밖에서 터진 일만 봐도 그녀는 지금까지도 막후 인물이 사위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더군다나 자신의 사위가 울분에 차도 참아 내고, 북제에서 자기 말에 따라 계획을 잘 이행해 주고 하여 감히 자신을 배신하지 않으리라 여기고 있었다.

범한의 신조는 하나였다.

‘화려하게 날뛰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래도 몸을 낮춘 화려함이어야 하고, 그 속에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이득을 취해야 한다.’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충분히 이용하고, 자신이 움직이지 못할 사람은 때려죽여도 이용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한데 1 황자는 현재의 범한으로서는 절대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범한이 평소 자신의 취향을 크게 거슬러 1 황자와 길을 두고 다툰 건, 모두 아무도 모르게 아버지인 황제에게만 보여 주기 위한 일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직선적인 성격의 1 황자가 범한 자신의 연극을 위한 상대역으로는 적격이었던 것이다. 범한이 이런 짓을 한 이유는 어쩌면 진평평 그 늙은 여우 정도만 조금 알아차릴 수 있으리라.

어찌 되었든 양측은 태자의 화해 조정으로 최종 타협안을 마련했다. 사절단의 앞쪽 대열과 황태자의 근위병이 함께 입성하는 방법으로 말이다. 한데 너무 규율에 맞지 않는 일이어서 예부 상서는 매우 불쾌해했고, 태상사의 임소안 소경 역시 당황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그런데 이번 의전 문제는 해결 방향을 어떻게 잡든 결국에는 큰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태자는 옆에서 답답해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범한을 바라보고 있다가 무언가 모를 통쾌함 같은 걸 느꼈다. 이에 짐짓 꾸짖듯 말했다.

“자네도 소란을 벌인 것이네. 분명 사절단이 나중에 돌아오기로 결정된 사항이거늘, 어찌하여 앞당겨 도착하고 또 조정의 조정도 거치지 않고 이런 사달을 만든 것인가?”

범한이 웃으며 대답했다.

“소신, 얼른 집에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니 태자 전하, 부디 용서해 주시옵소서. 어쩌면 내일 어사 중 누군가가 저를 탄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범한은 내심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몇 개월 동안 보지 못하는 사이 태자의 기색이 예전보다 훨씬 좋아져서였다. 예전에 보았던 살짝 비굴하고 음울한 면은 사라지고 얼굴에 환하게 광택이 돌고 있었다. 대체 그사이 무슨 좋은 일이 있었던 걸까?

당연히 범한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태자는 황후와 장 공주라는 거대한 두 개의 산에 짓눌려 지냈었다. 그런 그에게 장 공주가 황궁을 떠나 신양으로 돌아간 사건은 그를 억누르던 산 하나가 사라진 것과 같았다. 그러니 잠시라도 마음이 편할 수밖에. 더군다나 올해 들어 황제 폐하께서도 위안이 되는 말을 많이 해주고 있으니, 태자는 예전보다 훨씬 좋은 시절을 지내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신하들이 봤을 때 태자가 좋은 시절을 보내는 중이라면 분명 2 황자는 심기가 불편한 상태여야 했다. 하지만 성문 앞 막사 안에서 1 황자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는 2 황자의 고상하고 우아한 얼굴에서는 불편한 기색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이 순간 신하들의 이목을 끌고 있는 건 오히려 그 옆에 있는 어린 녀석이었다.

이 어린 녀석은 황제 폐하의 가장 어린 아들이었다. 천자는 총 네 명의 아들을 낳았고 황자들에게 순서를 붙일 때 태자는 제외하고 매기게 되니, 이 아이는 황실이 외부에 전혀 공개하지 않은 3 황자인 것이었다. 그는 올해 겨우 아홉 살이었다. 1 황자가 변방에서 돌아오게 되자 황제는 모든 황자에게 존경심을 표하는 차원에서 그를 배웅하러 나가라 명했다. 이는 대신들에게 단 한 번도 공개한 적 없는 어린 황자에게 공식 석상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낼 기회를 준 것이기도 했다.

2 황자가 어린 황자의 손을 이끌고 1 황자에게 절을 했다. 1 황자는 2 황자와 관계가 좋았는지 앞으로 나아가 아우를 끌어안았다. 그런 후 어린 녀석의 머리를 만져 주며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새 많이도 자랐구나!”

어린 녀석이 웃으며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답했다.

“나중에 키가 황형만큼 자라면 저도 나가서 오랑캐들을 때려잡을 것입니다.”

이 어린 황자의 생모는 사남 백작가 유씨 부인의 자매였다. 그러니 이리저리 관계를 따져 보면 범한에게도 친척이 되는 셈이었다. 범한은 이 앳된 황자가 천진하게 웃는 얼굴을 보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천진난만한 웃음 속에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긍지 같은 게 엿보여서였다. 범한의 입꼬리가 무의식적으로 올라갔다. 그렇게 살짝 웃는 얼굴을 한 채 범한은 생각했다.

‘이 몸께서는 어릴 때부터 극한의 천진난만한 가짜 미소로 사람을 홀려 왔느니라. 그런 내 앞에서 감히 이런 장난질을 하다니! 이 범한에게는 먹히지도 않는 웃음을 팔고 있는 꼴이구나!’

2 황자도 앞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에 쓴웃음을 지으며 범한에게 말했다.

“이보게, 매제. 언제쯤이면 사고를 덜 칠 셈인가? 자네 때문에 경도의 온 관원들이 심장을 졸였을 걸세.”

그러자 범한이 매우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해명에 나섰다.

“정말로 북제 공주마마의 뜻이었습니다. 고작 안위나 탐하는 소신이 어찌 그리 대담한 짓을 하겠습니까.”

태자가 보일 듯 말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2 황자와 범한 간에 나누는 말투가 맘에 들지 않는 사람처럼 담담하게 한마디 했다.

“둘째 황형, 아직 의식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관직명으로 부르시지요.”

이 말은 억지에 가까웠다. 앞서 태자도 범한을 매제라 부르며 친근감을 드러내 놓고는 이제 와서 2 황자에게는 안 된다고 하다니. 2 황자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을 한 채 껄껄 웃어넘겼다. 그러고는 범한 곁으로 다가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춘시 전에 나에 대한 호칭을 어찌해야 할지 신아에게 물어보라 했었는데 물어보았는가?”

그제야 그때의 일이 생각난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웃었.

“마마께서도 춘시에서의 일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 일 때문에 잊고 있었습니다. 오늘 집에 돌아가면 꼭 물어보겠습니다.”

그러자 2 황자는 웃으며 그와 관련해서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대신 3 황자의 손을 잡고서 앞서 성문을 향해 가고 있는 태자와 1 황자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매우 작은 소리로 대화를 나누었지만 모든 내용은 1 황자의 귀에까지 전달되고 있었다. 그동안 변방에서 있었던 1 황자는 이런저런 의심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범한의 명성이 높은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경도에 없었던 탓에 그가 대체 어떤 힘을 쥐고 있는지는 몰랐다.

한데 방금 두 사람의 대화에서 그는 무언가를 눈치채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2 황자든 태자든 그들은 모두 말을 할 때 범한을 회유하는 듯한 말투를 썼다는 점, 그리고 자신과 범한의 관계가 친밀하다는 걸 주변 관원들에게 들킬까 염려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일개 신하 따위가 황자 둘의 눈에 들었다니. 그것도 황자들이 체통도 생각 않고 회유하러 나설 정도로. 1 황자의 이맛살이 절로 일그러졌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은 탓이었다.

그런데 범한은 지금 이 순간 다른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어두컴컴한 동굴과도 같은 성문으로 함께 걸어 들어가는, 밝은 노란색과 연한 노란색의 각기 다른 의복을 입은 황자 넷의 모습에 범한은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어떤 생각을 떠올리고 만 것이었다.

‘언젠가는 나에게도 저 네 명의 황자 가운데에 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 * *

경도의 가을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맑고 아름다웠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하며 민가 주변에 흐드러지게 늘어진 이제 막 노란색이 들기 시작한 나뭇잎까지. 길옆으로 흐르는 시냇물은 급하지 않게 졸졸졸 흘러 가을의 적적한 정취까지 더해 주고 있었다. 길게 뻗은 거리, 그 끄트머리로 황궁의 처마 한 끝자락이 불쑥 솟아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파란 하늘에 걸려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위엄 그 자체였다.

1 황자의 근위병들은 노기가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사절단의 마차는 일부러 속도를 늦춘 채 홍려사와 태상사 관원을 따라 느긋하게 황궁으로 향했다. 범한 입장에서는 이왕 경도로 들어온 이상 더는 서두를 필요가 없어서였다. 어찌 되었든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먼저 황궁 문 앞으로 가 도착 사실과 그간의 경위를 아뢰어야 했으니 말이다.

이에 범한은 여유를 갖고 주변 풍경을 둘러보았다. 경도에서 지낸 기간은 모두 합쳐 봐야 1년 정도에 불과하니 그에게 경도는 아직 담주보다 많이 낯선 곳이었다. 하지만 이유는 모르겠지만 경도성 안으로 들어서서 주변 민가를 둘러보는 순간, 이곳에서만 나는 특유의 냄새 때문에 범한은 기분이 상쾌해졌다.

“대인이 급히 돌아온 걸 보니 필시 집에 무슨 일이 있어서 그런가 보오.”

준마 옆에 있는 마차에서 북제 공주마마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전해져 왔다.

범한은 살며시 웃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평범해 보이지만 실은 매우 중요한 신하였던 자신과 북제 공주가 일부러 친분을 더 쌓아 두려는 게 빤히 보여서였다. 그런데 두 사람은 경국으로 오는 내내 이미 충분히 교류를 한 상태 아니던가. 그러니 경국 도읍으로 입성한 이상 주변 이목도 있고 하니 범한은 혹시나 모를 일에 대비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더욱이 상대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도 있어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 까닭도 있었다.

범씨 가문은 현재 경도에서 가장 잘나가는 집안으로 가내 평안한 상태였다. 그러니 옆에 있는 사람들은 범한이 왜 이리 조급증을 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범한이 박차를 가해 수 장(丈) 앞에 있는 언빙운의 마차로 다가갔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꼭 그녀를 데려가야 합니다. 나를 곤란하게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마차에 있는 언빙운 공자가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그러고는 자신에게 꽉 붙들려서 눈만 드러내고 있는 누군가의 익숙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 누군가는 바로 심 낭자로, 독기를 가득 품은 그녀의 눈동자는 언빙운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한편 언빙운은 범한 대인이 대체 언제부터 중매쟁이 노릇을 하는 데 취미를 들인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언빙운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화제를 돌렸다.

“대인, 오늘 길을 두고 다툰 일은 정말 현명치 못한 행동이셨습니다. 감찰원은 황자들 간의 다툼에 시종일관 중립을 유지해 왔습니다. 대인께 들은 내용과 앞서 들은 내용을 모두 살펴보니 태자 전하와 2 황자마마 모두 대인을 바라고 있습니다. 이왕 그렇다면, 그리고 균형을 유지하실 목적이라면 1 황자마마를 건드려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래야 감찰원의 취지와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범한은 그냥 잠자코 있었다. 상대방의 말이 일리가 있어서였다. 경국의 신하로서, 특히 감찰원 제사로서 이들 황자들과 평생 교류하지 않거나 또는 교류하려면 늘 공정함을 유지해야 했다. 그래야 감찰원이 어느 황자의 편도 들지 않는다고 황궁 쪽에 확신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범한은 그게 안 되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신분이 단순한 신하 그 이상이란 걸 알고 있어서였다. 그러니 특정 황자에게 편향되게 행동하면 황제는 기껏해야 자신이 부귀와 권력을 탐하고 진평평만큼 순수하게 충정을 바칠 인물이 아니란 정도의 의심만 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반대로 자신이 정말로 공정하게 행동한다면 범한에게는 감찰원과 황실 금고가 있으니 황제가 자신을 다른 식으로 의심할 수 있었다. 바로 신하 하려는 생각이 없다고 말이다.

이는 범한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였다.

마차 행렬이 흥도방(興道坊) 구역에 도달하자 이제 더 이상 질서 유지를 위한 경도부의 도움은 필요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제 비교적 정갈하고 안전한 관아들과 관원들 저택이 밀집된 지대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러니 거리에 서서 행렬 구경을 하는 백성도 없었다. 그 순간 마차 한 대가 대열에서 벗어나 아무도 모르게 옆쪽 샛길로 빠져나갔다. 그 골목 안쪽에는 이 마차를 몰래 맞이하러 온 누군가가 있었다.

물론 마차가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가기는 했지만 관리들의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한데 사절단은 워낙 복잡한 곳 아니던가. 이에 관리들은 아마도 감찰원 사무 때문에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앞쪽에 있는 제사 대인의 표정이 자못 엄숙하기도 해서 감히 끼어들어 말을 걸며 알리지 못했다.

범한의 표정은 당연히 엄숙할 수밖에 없었다. 주홍색의 황궁 담벼락이 눈앞에 나타났으니 이제 곧 황성에 당도할 일만 남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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