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227화 (227/1,108)

227화

범한 뒤에 서 있던 고달이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1 황자마마 곁에 있는 저분은 호위입니다.”

범한이 눈썹을 치켜세우고 물었다.

“아는 사람인가요?”

“제가 아는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알 수 있습니다.”

고달이 소리를 낮추어 답했다. 이 순간 장도에서는 말의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범한이 물었다.

“당신도 호위인데 왜 1 황자마마께 이리도 무례하게 행동하는 겁니까?”

그러자 고달이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도련님, 폐하께서 명하신 일입니다. 소신은 도련님의 안위만 책임질 뿐입니다. 그러니 상대가 누구든 전혀 상관하지 않습니다.”

아주 작은 소리로 대화를 나누던 중 범한의 얼굴에 살짝 묘한 기색이 돌았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이어진 후 범한이 갑자기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1 황자의 말을 향해 몸을 곧게 숙여 절했다.

범한이 그러는 사이 근위병들은 혼절한 두 명의 병사들을 일찌감치 수습한 상태였다. 그리고 1 황자마마에게서 당장 사절단에게 달려들어 손보라는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한데 1 황자는 계속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다 돌연 말을 움직여 범한 곁으로 다가갔다. 그가 몸을 살짝 숙이고는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네 녀석의 성미가 마음에 드는구나. 하나 말을 죽인 건 불길한 짓이니 경도로 돌아간 후 본 왕이 좀 귀찮게 만들어 줄 것이다.”

범한이 주변 근위병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마, 소신과는 정말로 무관한 일이오니 부디 살펴 주십시오.”

1 황자가 싸늘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황자였으므로 당연히 호위의 역할과 권한을 알고 있었다. 부황께서 사절단의 안위를 위해 호위 무사를 붙여 준 것이므로 범한과는 관련 없는 일이라고 생각은 했으나 속에서는 계속해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본궁의 뜻입니다. 마마께서 기분 나쁘셨다 해도 범 대인을 난처하게 말아 주시지요.”

마차 안에서 줄곧 가만히 있던 공주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관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임소안은 범한의 손을 잡아끌었고 신기물은 1 황자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황궁 문지기들은 1 황자의 말고삐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예부 상서는 화가 나 씩씩거리며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상대를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고 있는 황자의 근위병들을 꾸짖어 제자리로 돌려 버냈다. 이밖에도 추밀원의 늙은 대신이 뒤늦게 중재에 나섰다. 이 자리에 나온 경국의 모든 관리가 1 황자와 범한을 에워싸고는 일촉즉발의 대립 상황을 최대한 평화롭게 해결하기 위해 나선 것이었다.

이리 많은 관리가 둘러싸고 말리자 사절단과 서로군의 충돌은 자연스레 흐지부지되었다. 그렇지 않고 서로 충돌했다면, 그리고 나이 든 사람 중 누구 하나 다치게 했다면 그들로서는 조정의 체면을 깎는 짓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조정이란 게 대체 무엇이길래 그런 걸까? 단순히 3원 6부 4사만을 이르는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바로 체면, 즉 모든 신하의 체면을 대표하는 게 조정이기 때문이었다.

* * *

관리들이 1 황자와 범한을 말리기 시작하자 성문 쪽에서도 저 멀리서 무언가 일이 난 걸 감지하고 드디어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성문 쪽에 있던 이들이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말을 몰고 다가왔다.

그리고 한참을 묻고 답한 후에야 전후 사정을 알게 되었다. 일찍 도착한 사절단이 길을 먼저 지나가기 위해 1 황자와 다투고 있었다니. 하지만 이들은 하급 관원이라 자신들로서는 처리할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에 서둘러 상부에 보고부터 올렸다.

양측은 다시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한데 범한이 아무리 물러나고 싶다 해도 마차에 있는 북제 큰 공주가, 사절단의 문관들이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떻게든 1 황자보다 먼저 입성하려 했다.

1 황자는 오늘 쓸데없이 말만 두 마리 죽이고 체면을 잔뜩 구긴 상태였다. 더군다나 아무리 신하일지라도 자신도 명령을 내릴 수 없는 부황의 측근, 즉 호위가 없었다면 진즉에 창과 칼을 들어 길을 열도록 하라고 명령을 내렸을 터였다. 이에 1 황자도 드디어 슬슬 오기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그까짓 공주고 뭐고 절대 사절단부터 입성하게 할 수는 없지! 나중에는 결국 본 왕의 발이나 닦아 주는 계집이 될 것이거늘!’

1 황자와 사절단, 관원들의 줄다리기는 계속되었다. 관원 중 일부는 황자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고 또 일부는 말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쯤 되면 힘으로 밀어붙이며 싸울 수는 없는 상황. 결국에는 서로 간에 이러쿵저러쿵 입씨름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서로군 병사들은 힘으로 싸울 때나 치명적일 뿐 말싸움에서는 젬병이었다. 특히나 궤변술에 통달한 사절단 외교관들에게는 적수가 될 리 만무했다. 결국 사절단에서 조정의 규율이니, 양국 간의 우의니, 황제 폐하의 성심이니, 관리들의 체면이니 하는 것들을 들먹이기 시작하자 1 황자 쪽은 점점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1 황자 쪽은 계속해서 길을 막아선 채 사절단이 먼저 지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는 와중이었다. 개국 이래 조정 대신들이 가장 시끄럽게 싸우고 있는 이 도떼기시장 같은 곳으로 밝은 노란색을 띤 천자의 마차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순간 누군가가 마차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이 순간 범한은 뒤로 물러나 있는 중이었다. 그는 일찌감치 언빙운의 마차 옆으로 가 그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그러다 언빙운이 주의를 받고 나서야 그제야 마차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맞이하러 나섰다. 범한이 의관을 정제하고 주변 관원들과 함께 절을 올렸다.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태자는 황제의 성지를 들고 1 황자를 맞이하기 위해 성문 앞에 와 있는 중이었다. 한데 뜻밖에도 이런 큰 소란이 일자 어쩔 수 없이 체면을 잃을 것을 무릅쓰고 직접 화해를 조정하러 온 것이었다.

태자가 나타나자 1 황자도 감히 꾸짖고 욕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서둘러 말에서 내려 갑옷을 입은 상태 그대로 태자가 탄 마차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절했다. 그러자 이미 마차에서 내려와 있던 태자는 서둘러 1 황자의 행동을 저지하며 그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황형(皇兄), 지금 갑옷을 입고 계시니 이리 예를 차리실 필요 없습니다. 게다가 제 황형 아니십니까. 그러니 어찌 제가 절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1 황자는 직선적인 사람이었다. 태자가 절을 하지 말라고 하자 그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투구부터 벗었다. 그러자 이 광경을 옆에서 보고 있던 태상사와 예부 관원들이 속으로 구시렁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형제간의 일이고 황제 폐하께서도 이 정도 일 가지고는 신경도 쓰지 않으실 테니, 신하 된 입장인 이들은 그냥 가만히 있기로 결심했다.

태자가 형의 얼굴을 보며 살짝 감성적으로 말했다.

“황형, 오랫동안 열사의 변방에서 거친 바람을 맞으며 전투를 치르시느라 많이 마르셨군요.”

1 황자가 웃으며 대꾸했다.

“그게 뭐 별거라고요! 변방에서 말을 내달리고 있는 게 오히려 기분이 상쾌하고 좋습니다. 태자께서도 아시잖습니까. 이 형이 저택 안에서 가만히 있는 걸 제일 싫어하고 좀이 쑤셔 죽으려 하는 걸 말입니다. 이번에 할마마마께서 제 귀환을 원치 않으셨다면 그곳에서 며칠 더 있다가 왔을 것입니다.”

그러자 태자가 꾸짖었다.

“할마마마뿐만이 아닙니다. 부황, 황후마마, 영비마마 그리고 우리 형제들까지 모두 황형께서 일찌감치 돌아오시길 바라고 있었습니다.”

1 황자가 범한을 게슴츠레 흘겨보며 말했다.

“한데 누군가는 내가 조금 일찍 돌아가는 걸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태자가 불편한 낯빛으로 1 황자를 바라보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세히 물었다. 그러더니 이상하게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소리는 조금 이상하게 들릴 정도였다. 대신들은 태자의 뜬금없는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태자가 다시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범한을 자기 앞으로 불러들이더니 문책하기 시작했다.

“자네가 황형과 길을 두고 다투었는가? 그건 중죄이니라.”

그러자 범한이 웃으며 해명했다.

“소신이 어찌 그리 담이 크겠습니까? 사실 북제 공주마마가 먼 길을 오는 도중 고뿔에 걸리셨사옵니다. 그리하여 성 밖에서 더는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태자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1 황자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자신의 마차 옆으로 다가가 작은 소리로 안부 인사부터 건넸다. 그런 후 몸을 돌리더니 웃는 얼굴로 1 황자에게 말했다.

“황형께서도 신하들과 일일이 논쟁하지 마십시오. 경도에 안 계신 두 해 동안 무슨 일들이 있는지 모르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범한이란 자도 모르실 것입니다. 이리 오십시오. 본궁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범한은 사실 태자와 제대로 만나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온화한 인상의 태자를 보며 그가 여러 관리 앞에서 자신과 친밀한 관계임을 드러내려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에 범한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는 앞으로 나아가 1 황자에게 절을 올렸다.

“소신, 태학 봉정 범한이옵니다. 1 황자마마를 뵈옵니다.”

“자네는 4품 거중랑일세.”

태자가 책망하며 말을 이어 갔다.

“어찌하여 자신의 관직마저 잊고 있는 것인가?”

범한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북쪽에서 남으로 내려오는 동안 제가 바보가 되었나 봅니다. 부디 태자 전하께서는 용서해 주시옵소서.”

태자가 작은 소리로 1 황자에게 말했다.

“범한은 지금 원장 대인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는 바입니다. 감찰원 제사라니 참으로 대단한 위세를 지녔군요.”

1 황자가 냉소적으로 한마디 했다. 그러자 태자가 웃으며 중재에 나섰다.

“됐습니다, 됐어요. 제 체면은 그렇다 쳐도 신아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저이를 타박하시면 안 되죠. 어릴 때만 해도 황형과 신아 관계가 무척이나 좋았으니까. 이리 말하니 범한도 우리의 매제가 되는군요. 모두 한 가족인데 왜 화를 내시는 것입니까?”

1 황자가 싸늘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조금 어색해하는 범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녀석에게 화를 내는 것이지요. 신아가 황궁에 있을 때는 그야말로 모두의 금지옥엽이었습니다. 그런 신아가 이런 계집처럼 생긴 놈에게 시집을 갔다니 보고만 있어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군요. 혼인한 지 반년도 안 되었건만 아직 신혼 중인 아내는 집에 놔둔 채 감히 자청해 사절단으로 나가지를 않나. 이런 권세와 돈만 밝히는 녀석이 어째서 우리 신아의 배필이 되었단 말입니까!”

범한은 씁쓸하게 웃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자신이 엉뚱한 데서 삽질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서였다. 이제 보니 길을 두고 다투게 된 건 집안일 때문이었다. 하지만 1 황자와 장래 황자비 간의 집안일이 아닌, 1 황자와 매제인 자신 사이의 집안일 때문이었다.

이 시끄러운 상황이 막바지에 이를 때까지 어찌 되었든 범한은 계속 웃고 있었다. 조금도 오만방자하지 않은 매우 성실한 모습만 보여 주면서 매제로서, 신하로서 본분을 지켰다. 그렇게 함으로써 길을 두고 다툰 잘못된 행동이 범한 자신의 머릿속에서 나왔음을 주변 관원들이 생각해 내지 못하도록 했다.

범한에게는 타고난 장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겉과 속이 다르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그가 음험하고 잔인한 성격을 지녔다고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범한은 속으로는 남을 속이고 업신여기는 일일수록 더 하고 싶어 안달이었지만, 겉으로는 매우 사려 깊은 사람인 척했다. 그야말로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가식 덩어리 그 자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