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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226화 (226/1,108)

226화

1 황자는 출정하여 오랫동안 변방에서 지낸 사람이었다. 비록 서쪽 오랑캐가 옛날처럼 난폭하게 날뛰지는 않는다지만 그는 오랑캐를 상대로 몇 년 동안 사막에서 가혹한 시련을 거치며 칼에 수없이 피를 묻혀 왔다. 이러한 이유로 1 황자는 다른 황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겉치레라 할 수 있는 행동은 잘하지 않은는 반면, 군에서 볼 수 있는 난폭한 기질은 좀 많이 지닌 편이었다.

이번에 경도로 돌아올 때 1 황자는 자신의 군사 지휘권을 이용해 적게는 2백, 많게는 5백 명까지 근위병을 이끌고 올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최종적으로 2백 명만 데리고 돌아왔다. 경도에 있는 관리들과 황실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추측을 하도록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이들은 하나같이 매우 용맹한 자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사절단과 길을 두고 다투게 되자 살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일찌감치 폭발하기 일보 직전까지 와버렸다. 말에 올라타 있는 사막에서 온 2백 명의 근위병들은 오만하게 얕보는 기색으로 문관들을 꼴사납다는 눈빛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수백 개의 눈이 순식간에 어느 마차로 쏠리더니 그들은 이내 그 안에 있는 사람의 신분을 알아차리고는 감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마차 안에 있는 사람은 장래의 황자비였다. 그러니 저들은 아무리 서군(西軍) 소속의 흉포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자신들의 여주인 될 사람에게 죄를 지을 수는 없었다. 즉 그냥 멍하니 있을지언정 길을 두고 다투는 멍청한 짓은 할 수 없었다.

이 시각, 예부 상서는 성 밖 십 리까지 나와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는 마중 나온 관리들 중에서는 가장 경험이 많고 지위가 높았다. 모두 당황스러워하며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 예부 상서가 참을 수 없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일을 수습할 준비를 하기 위해 잠시 무어라 몇 마디 꺼냈다. 그런데 그 순간, 말들이 한꺼번에 울어 대서 관원들 중 그의 말을 제대로 들은 이는 몇 안 되었다.

갑자기 말들 우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 말을 타고 있는 서군 근위병이 마치 강물이 갈라지듯 대열을 이루어 양쪽으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수십 필의 준마가 한 몸처럼 똑같이 움직이니 넓지 않은 길 위에 어느새 커다란 공터가 생겨났다. 이어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검은색과 흰색으로 이루어진 전투용 갑옷을 온몸에 두른 대장이 말을 타고 앞으로 나왔다.

북제 큰 공주가 탄 마차 옆에 서 있던 범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들을 피하려 하고 있었다. 1 황자의 근위병들이 말을 돌려 길을 비키는 척하면서 곧장 자신을 향해 밀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들 군인은 줄곧 변방에 있던 자들이니 범한이 누구인지 알아볼 리 없었다. 그저 앞쪽에 있는 예쁘장한 공자가 무어라 말을 내뱉자 그냥 화가 잔뜩 치밀었을 뿐이고, 그에게 바닥에 고꾸라지도록 만드는 굴욕만을 선사하고픈 생각뿐이었다. 이에 앞쪽에 있던 키가 큰 말들은 움직일 때마다 누가 봐도 매우 위험해 보일 정도로 일부러 범한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와중에도 범한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을 탄 대장을 향해 살짝 몸을 굽혀 절했다. 그리고 바로 옆에서 준마가 울며 발을 구르고 도발하는데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소신 범한, 1 황자마마를 뵈옵니다.”

말고삐를 늦추며 달려온 이는 당연히 경국의 1 황자였다. 번뜩이고 활기차 보이는 눈에는 타고난 살기가 담겨 있었다. 곧게 뻗은 눈썹과 쭉 뻗어 코, 광대는 살짝 솟아 있었지만 못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오히려 영민하고 용맹한 사람처럼 보였다. 게다가 온몸에 두른 투구와 갑옷이 빛을 발하고 있는 상태에서 말까지 타고 있으니 마치 천신이 땅에 내려온 것 같아 감히 똑바로 쳐다보면 안 될 존재 같았다.

이에 범한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고 얄밉고 가증스러워 보이는 부끄러운 미소를 흘리며 살며시 고개를 숙여 절한 것이었다.

1 황자는 조심스럽고 비굴한 모습으로 자기 말 앞에 서 있는 이 문신이 지금 경도에서 가장 유명인인 범한이란 걸 알게 되자,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 한마디 내뱉고 말았다.

“이렇게나 잘생겼다고? 한데 웃는 모습이 어찌 이리도 계집 같을꼬?”

1 황자는 원래 이 말을 내뱉을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순간 실수로, 그것도 옆에 있는 근위병에게 들릴 정도로 크게 말로 하고 말았다. 그는 원래 호쾌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에 근위병들은 주인님이 길을 두고 다투는 이 문신을 일부러 모욕하려고 한 말이라 생각해, 다들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그것도 경도성 밖 하늘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도록 말이다. 부하들의 웃음소리에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경멸감이 담겨 있자, 1 황자는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하지만 딱히 그들의 행동을 저지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 자신의 입가에도 살며시 조롱기를 담아 버렸다.

당당한 체구의 말들은 어느새 콧바람 소리가 들릴 정도로 범한에게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말 여러 마리의 커다란 머리가 범한을 직접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즉 1 황자의 근위병들이 말을 몰아 사절단을 길에서 밀어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1 황자가 자기 장래 아내의 체면을 이렇게나 세워 주지 않을 줄이야. 범한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제 보니 사촌 누이 남편의 체면은 더더욱 생각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범한을 향해 다가가는 준마의 눈에는 점점 흥분이 차오르고 있었다. 이 모든 걸 똑똑히 본 범한은 전쟁에 투입되는 말들이니 통제하기 쉽지 않고 피를 갈구하는 성미일 것이라 생각했다. 이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잠시 뒤로 물러설 준비를 했다.

어찌 되었든 1 황자에게 밉보이려는 목적은 이미 달성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제는 상대방과 진짜로 척을 지는 상황까지 치달아서는 안 되는 거였다. 현재 범한의 가장 큰 약점은 군 측과 전혀 관계를 맺어 놓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혹시라도 추밀원의 늙은 장군들이 자신이 일부러 서로군의 체면을 떨어뜨리기 위해 이런 짓을 했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훗날 조정 내에서 범한에게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한데 이건 범한만의 생각이었고 그의 부하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범한은 깜빡하고 있었다. 제사 대인이 위험에 처하자 사절단에 숨어 있던 감찰원 하급 관원이자 칼잡이인 검사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 연기가 스르륵 지나가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마차 위, 길옆 등 공격하기 유리한 위치에 서서 속속 쇠뇌를 꺼내 들고는 범한에게 바짝 다가간 말들을 향해 화살을 겨누었다.

“멈추시오!”

예부 상서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경도 외곽에서 무력을 동원하다니 이 소식이 천하로 펴져 나간다면 조정의 체면은 말도 못 하게 떨어질 게 뻔하다. 그러면 예부 상서직을 유지 못 하는 것뿐만 아니라 1 황자에게도 좋지 않은 결과가 있을 터. 감찰원이 범한의 뒷배라고 해서 황제 폐하까지 볼기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으시리라.

마중 나와 있던 신하들은 찬바람이 쌩쌩 이는 감찰원 관원들을 그냥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 예부 상서가 소리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범한의 두려운 신분을 떠올리고 너도나도 다급히 소리치기 시작했다.

“모두 멈추시오! 그게 무슨 짓이오!”

1 황자는 싸늘한 눈빛으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한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범한이라는 감찰원 개를 볼 때는 눈매가 갈수록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감히 자신과 맞짱을 뜨려 하는 걸 보니 꽤 괜찮은 놈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한편 범한은 속으로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북제에서 돌아오는 내내 감찰원 부하들을 잘 교육해 놓았다고 생각했다. 한데 제사의 안위가 위협당하자 저들은 조정의 체면은 생각도 않고 감히 화살을 서로군에게 겨누었다. 나라를 위해 변방에서 오랫동안 싸워 온 군인들을 이런 식으로 홀대했다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늙은 절름발이가 꽤나 난처할 텐데 말이다.

한데 1 황자는 어느새 웃고 있었다. 마치 범한의 걱정을 알아채기라도 했다는 듯 그가 이번 일을 어찌 처리할지 두고 보려는 것 같았다.

1 황자의 근위병들은 자신들을 위협하는 이들이 나타나자 그동안 쌓아 왔던 살기를 단번에 폭발시켰다. 함성이 쩌렁쩌렁하게 하늘에 울려 퍼지더니 그들은 이내 창과 활로 무장하고는 앞쪽에 있는 사절단을 에워쌌다. 그리고 동시에······ 말들도 범한을 꽁꽁 에워쌌다.

그러자 범한이 주먹을 들어 중지와 약지를 세웠다. 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와중인데도 명확하게 수신호를 보냈다.

범한의 수신호를 본 감찰원 검수들은 화살을 거둬들이고 말에서 내려 원 대열로 돌아갔다. 그것도 전혀 주저하지 않고 군더더기 없이 매우 일사불란하게 말이다.

* * *

1 황자는 여전히 말 위에 있었다. 투구에 반쯤 가려져 있는 얼굴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속으로는 매우 놀란 상태였다. 나약해 보이는 문관이 이리도 엄격하고 냉철하게 통제를 할 줄 알다니. 더군다나 이러한 상황에서 손동작 하나로 모든 사람의 행동을 중지시키다니. 이 정도의 기강은 자신이 맡고 있는 서로군 내에서도 볼 수 없는 일이었다.

1 황자는 지금 경도 외곽에 있으니 진짜로 어떻게 해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성문에서 태자와 둘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이에 그는 가볍게 말고삐를 쥐고 손을 내저어 병사들에게 물러나도록 명령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근위병들이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창이며 활을 거둬들이고는 말 머리를 돌렸다. 그런데 그 모습이 조금 전 명령을 따랐던 감찰원 관원들과 많은 차이를 보이자 1 황자도 결국에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이때 범한을 에워싸고 있던 말들도 서로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한데 말들끼리 너무 가까이 붙어 있던 데다 길 위에 깔아 둔 누런 흙이 많이 말라 있던 탓에 흙먼지가 풀썩이며 말의 콧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말 한 마리가 발을 구르고 긴 목을 이리저리 비틀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여러 말들이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 순간 말 두 마리가 동시에 범한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순전히 우발적인 사고였다. 열 장 정도 떨어진 곳에서 보고 있던 1 황자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부황의 눈에 든 자가 말에 부딪혀 죽기라도 한다면 자신이 서쪽 변방에서 세운 공은 모두 헛수고가 되고 말 터. 그런데 순간 범한의 능력에 대해 전해 들은 게 퍼뜩 떠올라 1 황자는 저도 모르게 한 가닥 희망을 품었다. 감찰원 제사씩이나 되는데 겨우 말 몇 마리에게 받혀 죽지는 않겠지, 하고 말이다.

이히힝! 말은 곧장 앞으로 내달리고 범한은 순간 흙먼지 안에 갇혀 버렸다. 그리고 그때, 고수만 보고 들을 수 있는 두 개의 빛 줄기와 소리가 먼지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 * *

무언가가 땅에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두 번 나고 흙먼지가 점점 잦아들었다. 범한은 여전히 그 밉살스러운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약간 어정쩡한 자세로 먼지가 일던 곳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놀라 범한에게 달려들었던 말 두 마리가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가더니 땅바닥에 픽 고꾸라졌다. 위에 타고 있던 병사는 이미 혼절한 것 같았다. 그런데 말들은 기수들처럼 운이 좋지는 않았다. 말 머리는 이미 선혈을 흩뿌리며 하늘 저 멀리 날아가는 중이었고 말들의 사체는 쓰러지면서 길 위의 황토에 잘게 균열을 만들었다.

범한의 뒤쪽으로 갈색 옷을 입은 검객 둘이 양손에 사람 키만큼 긴 장도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냉담한 표정과 차가운 눈빛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1 황자의 근위병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들이 두 개의 칼을 아래로 내리쳐 말 두 마리의 머리를 산 채로 잘라 버린 것이었다. 참으로 빠른 칼이었다. 그리고 대단히 빠른 대처였다.

1 황자의 동공이 수축된 채 범한 뒤에 있는 검객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에게는 저 둘의 손놀림이 어쩐지 익숙했다. 1 황자가 자신의 대퇴부 쪽 갑옷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치기 시작했다. 탕탕, 하며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가 범한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하기 시작했다.

“범 대인은 과연 대단하군. 본 왕은 수년간 출정해 있다가 경도로 돌아온 것인데, 오자마자 그대에게 말 두 마리가 참수되어 버리다니! 조정에서는 이런 식으로 병사들에게 환영식을 해주는 건가 보군.”

범한이 한숨을 쉬며 손을 뻗어 코부터 막았다. 말이 뿜어 내는 피 냄새가 너무 자극적이라 싫은 사람처럼 행동하며 1 황자의 말에 해명하기 시작했다.

“1 황자마마, 소신에게 간덩이를 천 개 주신다 한들 소신은 감히 마마의 말은 베지 못하옵니다.”

범한은 이 1 황자가 성격은 거칠고 호방할지라도 우둔한 사람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자신을 옭아매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 황자가 자신을 본 왕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는 과거 성지의 내용이 떠올랐다. 1 황자가 서쪽에서 돌아올 때 폐하께서 이미 그를 왕으로 봉했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므로 그는 황자들 중 처음으로 왕에 봉해진 이였다.

오늘 상대방에게 너무 많은 죄를 짓고 말았다는 생각에 범한은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1 황자의 낯빛이 점점 싸늘해져 갈 때쯤 황자의 곁에 있던 근위병이 걸어 나와 그에게 몇 마디 건넸다. 그러자 1 황자의 눈빛이 순간 범한 뒤에 있는 검객에게 꽂히더니 그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제 보니 호위(虎衛)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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