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225화 (225/1,108)

225화

땀을 닦으며 기다리고 있던 임소안의 눈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역참 밖에서 연신 땀을 닦으며 달려오고 있는 4품 관원이었다. 이 관원의 등줄기는 이미 흥건히 젖어 있었다. 건조하고 무더운 초가을에 양쪽으로 뛰어다니다 보니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관원의 신분은 바로 홍려사 소경 신기물이었다. 신기물이 임소안을 발견하고는 두 손을 모아 인사부터 하고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일찍 오셨구려.”

임소안은 상대방이 황태자의 측근인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둘 사이는 가까워질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재상이 물러난 후 임소안은 조정에서 범한 쪽 사람으로 분류되어 버렸고 또한 딱히 따르고 있는 황자가 없다 보니 최근 들어 신기물과 많이 친해지게 되었다. 이에 임소안이 웃으며 스스럼없이 꾸짖었다.

“범한 대인은 여기에 있습니다. 나야 안 오면 아가씨께 야단맞게 되어 왔다지만 신기물 소경은 범한 대인과 친하면서 왜 이제야 온 것입니까? 잠시 후 한 소리 들을 수도 있으니 조심해요!”

순간 어리둥절해 하던 신기물이 금세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범한 대인은 지금 도착해서는 안 되는 거였습니다.”

오늘 일이 너무나 황당했는지 신소경이 자조적으로 말을 이어 갔다.

“1 황자마마와 사절단이 동시에 도착하지 않았습니까. 예부에서 어느 쪽을 먼저 들여보낼지 결정 못 하고 있는데 내 보기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도대체 어느 쪽부터 맞이해야 하는가를 놓고 3원 6부 4사의 신하들이 몽땅 다 우왕좌왕하고 있어요.”

그런데 신소경이 말을 마치자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꾹 닫아 버렸다. 지금 이 상황이 어딘가 이상해서였다. 한참 후 두 사람 모두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방금 자신들이 대화할 때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아차려서였다. 황자님과 사절단을 똑같이 중요한 위치에 놓고 판단하다니. 설마······ 범한이 감찰원을 장악하고 또 일대 문인으로 등극했다는 이유로 자신들이 알게 모르게 범한을 황자마마와 같은 지위에 놓고 생각했던 거야, 하고 말이다.

신기물이 고개를 내저으며 이 황당한 생각을 머리 뒤편으로 날려 버렸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한 가지만은 확실해졌다. 관리들이 이리도 난처해하는 이유는 모두 무의식적으로 범한을 높은 지위에 놓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그도 그럴 것이 경도에 나타난 지 불과 1년여 만에 범한 대인이란 자가 해놓은 걸 보면 놀라우리만큼 많지 않은가. 그러니 오늘 사절단 쪽으로 온 관리들은 명분상으로는 이국 공주를 맞이하기 위해서였지만 실제 목적은 범씨 가문과 감찰원에 아첨하고 잘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범한 대인이······ 아까 내가 안 보여서 뭐라 하지는 않았겠지요?”

신기물이 소심하게 묻자 임소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살짝 안심한 신기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 정리로 보나 도리로 보나 1 황자마마께서 먼저 도착하셨으니 황태자마마를 대신해 인사를 드리러 가는 게 맞겠지요. 범한 대인도 어차피 일개 신하이니 자기 분수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 * *

“나는 분수 같은 거 모릅니다.”

범한이 걸어오면서 신기물에게 인사했다.

“둘이서 기분 좋게 술도 마시고 호형호제하며 서로 친해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몇 달 출국했다 돌아왔더니 마중도 안 나오시다니요. 화났습니다. 정말 화났다고요. 하하하.”

범한이 말로만 화났다고 하면서 웃어넘기자 신기물도 어처구니가 없게 웃어 버렸다. 그리고 무언가 할 말이 있었는데 말할 기회를 범한에게 빼앗겨 버렸다. 이에 신기물은 범한의 온화하게 웃는 얼굴을 바라보며 그가 나지막하게 말하는 소리를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정리로 보나 도리로 보나 대인은 홍려사 소경이니 외교적 사무를 우선시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절단이 아니라 1 황자님을 맞으러 그쪽으로 달려가시다니요. 설마 정말로 추밀원에 있는 참찬 자리를 생각하고 계신 것입니까?”

말투는 담담했지만 어딘가 불쾌함이 담겨 있었다.

신기물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범한은 1 황자와 관련해 문제를 제기해서는 안 되는 위치였고, 더욱이 이렇게나 어리석은 방식으로 대놓고 불만을 표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퍼뜩 들어서였다.

조정 내 힘 있는 파벌에 속한 두 청년 관원을 향해 범한이 두 손을 모아 가슴까지 끌어 올린 후 허리를 굽혀 절했다. 그러고는 몸을 곧게 펴더니 입을 뗐다.

“사절단은 오늘 경도로 들어가야겠습니다. 두 분 대신께서 처리해 주시지요. 예부에서는 처리해 줄 사람을 찾을 수 없다 하니 두 분께서 방법을 찾아봐 주세요.”

순간 두 소경의 머릿속에서 소리가 울렸다. 둘 다 머리가 터질 듯한 기분이었다. 범한이 1 황자보다 먼저 경도로 들어가려 고집을 피우는데 대체 뭘 믿고 저리 당당한 건지 원! 이 둘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런데 황궁에서는 이 일을 잊어버렸는지 아무런 지시도 내려보내지 않고 있고. 한데 또 사절단이 먼저 경도로 들어간다 해도 규율상으로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 않던가.

문제는······ 저쪽이 1 황자란 것뿐!

임소안이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범한을 잠시 바라보았다. 범한에게 눈치를 준 것이었다. 신기물이 아무리 태자의 사람이기는 해도 그 앞에서 1 황자마마를 향한 불경한 태도를 드러내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한데 범한은 그의 ‘추파’를 보고서도 미소 지은 얼굴로 계속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절단이 먼저 경도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이는 북제 공주마마의 뜻입니다. 그러니 먼저 들어가도록 손 좀 써주시고, 1 황자마마께는······ 우선 기다려 달라고 전해 드리고요.”

말을 마친 범한은 소맷자락을 펄럭이고는 역참을 나섰다. 그리고 사절단 부하들에게 입성 준비를 하라고 분부했다.

반면 역참 안에 버려진 두 소경 대인은 입을 떡 벌린 채 ‘범한은 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지?’라며 어처구니없어했다. 감히 1 황자마마보다 먼저 경도로 들어가겠다니! 생각과 기분에 따라 계속 표정이 바뀌던 신기물이 어느 순간 이를 악물고 입을 뗐다.

“황궁에서는 아직 아무런 답도 없으니 나는 이 일에 참견하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임소안이 매우 이상하다는 듯 받아쳤다.

“참견하지 않겠다면 어느 쪽으로 갈 생각입니까? 홍려사 소경이 사절단의 경도 입성 의식을 책임지지 않겠다니 그러다가는 누군가에게 탄핵당할 것입니다.”

신기물이 잠시 웃다가 답했다.

“1 황자마마 쪽은 내 알 바 아니란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이게 내 일이니까요. 그러니 1 황자마마께서 기분 나빠하셔도 내게는 할 말이 있습니다. 나는 사절단과 함께 갈 것이고 임소안 소경은, 그러니까 태상사는 황실 종친을 관리하고 있지 않습니까. 한쪽은 황제 폐하의 아드님이신 1 황자마마이시고 다른 한쪽은 황제 폐하의 장래 며느님이신데, 임 소경은 어느 쪽으로 갈 생각입니까?”

신기물이 말하는 내내 임소안은 속으로 욕을 퍼붓고 있었다. 하지만 범한과 친분이 두터움에도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서둘러 1 황자에게 향했다. 예부에게는 입성 준비를 시켜 놓고 동시에 1 황자의 마음을 돌려 봐야겠다고 마음먹어서였다. 잠시 후 성문 밖으로 난 유일한 길 위에서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 * *

범한이 마차에 올라타 언빙운을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잠시 후 외부에 얼굴을 노출해서는 안 됩니다. 일단 경도로 들어가면 아버님이신 언 대인께서 사람을 보내실 겁니다. 그리고 업무 보고 전까지는 절대 그 누구도 대인의 소식을 알게 해서는 안 되니 이 점 명심해 주기 바라고요.”

그러자 언빙운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연 질문을 쏟아 냈다.

“그런데 대체 왜 싸우신다는 거죠? 어찌 되었든 그분은 1 황자이십니다. 황제 폐하의 아드님이시라고요. 그런데도 대인이 그분과 싸울 자격이 있다고 보십니까? 아둔한 사람도 아닌 분이 왜 그리 바보 같은 행동을 하려 하십니까?”

“황자님이요?”

범한이 언빙운 옆에 앉았다. 그리고 마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다가 웃으며 답했다.

“이런 장난이 흔히 있는 줄 압니까? 그러니까 내가 그분과 싸우려는 게 아니에요. 어느 귀인께서 그분과 싸우려 하시는 거라고요.”

언빙운이 어리둥절해 하자 범한이 소리 내어 웃었다.

“아직 만난 적도 없는 두 분이 일찌감치 발언권 쟁탈전에 나선 거랍니다. 공주마마는 유순하고 담담한 성격을 가진 분 같았습니다. 한데 1 황자께서 먼저 경도로 들어가시려 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 예쁜 눈썹을 바로 치켜세우시더군요. 하동(河東: 원래 하동사[河東狮]를 줄여서 말한 것으로 보이고, 사나운 아내란 뜻을 가지고 있음) 편에 서서 말을 하다니······ 이런 부류의 여인은요, 보이는 게 다가 아니거든요.”

“하동이요? 대체 왜 갑자기 강 타령이십니까?”

언빙운이 범한을 호되게 질책했다.

“대인께서 중간에 이간질한 게 아니어도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경도로 돌아가시기도 전에 대체 왜 1 황자마마와 사이가 틀어질 수도 있는 행동을 하시는 거랍니까? 대체 어떤 생각이신 거냐고요!”

“아주 좋아요. 이제야 이 상사를 위해 언빙운 대인이 전반적인 문제 분석이란 걸 시작해 준 거 같아서.”

범한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나는 공주님을 도발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이에요. 저 조용조용한 공주마마께서 동풍(東風: 진보와 혁명의 힘)을 신봉하셔서 서풍(西風: 부패와 몰락을 의미하기도 함)을 압도해 버리려는 생각을 지니고 계실 줄 내 어찌 알았겠습니까?”

방금 한 말은 《석두기》 82회에 나오는 구절이다. 물론 아직 쓰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한데 이 말을 인용해 미리 이렇게 써본 것만으로도 범한은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왜냐하면 그냥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몸이 닳아 있어서였다.

“내가 왜 1 황자님께 불경한 짓을 하느냐고요? 이유는 매우 단순합니다. 오늘 같은 기회가 다시 오지 않기 때문이죠. 바로 1 황자마마가 너무너무 싫다는 걸 드러낼 기회 말이죠.”

“왜 굳이 이러시는 것입니까?”

“언 대인이 북쪽에 오래 있기는 했어도 그동안 사절단에서 함께 생활했으니 이제는 나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범한이 언빙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언빙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태자마마와의 관계가 어떤 것 같습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 다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태자마마께서는 대인을 중요하게 여기고 계신 것 같습니다. 춘시 사건 때에도 대인을 돌봐 주셨고 사절단과 관련해서도 대인을 많이 보살펴 주셨지요. 그러니 대인을 매우 좋게 생각하고 계시다고 봐야겠죠.”

“그렇습니다. 그래서 태자마마께 보답해야 할 게 많이 있어요.”

이는 춘시 부정 사건과 관련한 마음을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자신이 한 말에 대한 상세 설명은 생략한 채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나는 정왕 세자님과도 친하게 지내고 있지요. 한데 정왕 세자님은 2 황자마마 편에 계시고······ 그래서 나와 2 황자님과의 관계도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죠.”

언빙운은 그제야 범한이 왜 1 황자에게 이런 불경한 짓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었다.

“나는 태자마마, 2 황자마마 두 분과 모두 관계가 좋답니다. 이런 상황에서 훗날 1 황자마마와의 관계마저 좋아져 버리면······.”

범한의 얼굴에 살짝 자조 섞인 미소가 드리워졌다.

“감찰원과 황실 금고를 모두 거머쥔 젊은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가 세 명의 황자님들과 모두 관계가 좋지요. 그렇다면 이런 젊은이는 대체 무엇을 하고 싶어 할까요? 그리고 황궁에 계신 마마님들께서 그런 나를 고까운 눈으로 보실까요?”

* * *

오늘 경도성 밖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그런데도 이 난리 통의 유일한 해결자인 황궁에 계신 분께서는 이상하게도 아무런 의견도 보내지 않고 계셨다. 그 때문에 성문 앞에 서 있는 관리들은 잔뜩 움츠러든 채 등줄기에 식은땀만 흘려야 했다. 그리고 길 저 멀리에서부터 두 개의 행렬이 다가오는 걸 바라보며 속으로 황궁 쪽과 범한을 향해 계속해서 욕을 퍼부어 댔다.

1 황자의 근위병은 모두 서쪽 사막에서 있다 온 용맹한 병사들이었다. 이에 감히 황자보다 길을 먼저 쓰려는 사절단 놈들에게 일찌감치 잔뜩 화가 나 있었다. 하지만 1 황자가 군 기율을 엄격히 시행하고 있기에 이들은 사절단 마차가 자신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걸 꾹 참고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다. 그러다 기마병 소속의 어느 지위 낮은 장수가 참지 못하고 호통을 쳤다.

“대체 어찌 돼먹은 신하기에 이리도 규율을 모르는 것이냐! 죽고 싶은가!”

그러자 양쪽 행렬이 동시에 이동을 멈추고 순간 숨 막힐 듯한 긴장감이 흘렀다.

범한이 마차에서 내려와 가식적인 모습으로 의관을 정제하고는 저 멀리 어슴푸레 보이는 1 황자의 마차를 향해 예를 갖춰 절하며 말했다.

“소신 범한, 1 황자마마께 인사 올리옵니다.”

* * *

“범한이라고? 자네가 범한인가?”

범한이 인사한 곳에서 웅장하고 힘찬 소리가 전해져 왔다. 그러고는 이내 살짝 멸시가 담긴 목소리가 이어졌다.

“신아가 배필로 맞이한 자였다니. 그런 자네가 감히 황자인 나와 길을 두고 다투는 것인가? 그 담력은 봐줄 만하다만 그래도 어리석군.”

범한이 미소 지으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소신, 어찌 감히 황자마마와 길을 두고 다투겠습니까. 다만······.”

범한이 말을 마치지도 않았는데 뒤쪽에 있는 화려한 마차 안에서 북제 공주의 담담하고 자신감 넘치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본궁은 연약한 여인입니다. 이런 몸으로 줄곧 남쪽까지 왔는데도 황자마마께서는 저를 성 밖에 며칠 더 두실 요량입니까?”

1 황자의 근위병들이 순간 얼어붙어 버렸다. 마치 사절단 안에 귀한 분이 한 분 계셨다는 걸 그리고 그분이 며칠 후면 1 황자비이자 자신들의 주인마님이 되리란 걸 이제야 알아차린 것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