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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224화 (224/1,108)

224화

마차 대열 앞쪽에 위치한 화려한 마차에서 북제 공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창가에 앉아 있는, 어릴 때부터 알아 온 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중이었다.

북제 상경성에서 운 좋게 도망 나온 심중 대인의 딸. 그녀는 지금 창틀에 머리를 기댄 채 언빙운이 보는 것과 같은 풍경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도련님의 매정함을 생각하는 중인지, 집안을 망하게 한 참극을 생각하는 중인지 아니면 고향을 떠나 타국으로 오게 되어 슬퍼하고 있는 중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사절단 내 지체 높은 분들이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마차는 어느새 경도 외곽에 위치한 마지막 역참에 도착해 있었다. 범한이 죽 늘어선 의장대와 대열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심 낭자 문제를 경도로 돌아간 후 처리하게 되어서였다.

범한은 그녀를 계속 데리고 다닐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심 낭자와 큰 공주가 교분이 있다는 점, 또한 언빙운 공자가 그녀에게 은근히 유감스러운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신경 쓰여 자기 생각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예부와 홍려사, 태상사의 관원들은 마차가 도착하기도 전에 역참으로 마중 나와 있었다. 그리고 사절단 마차가 천천히 들어오자 관원들은 의관을 정제하고 예를 갖추어 북제 공주를 맞이했다.

그사이 범한은 눈을 굴려 눈짓으로 고달을 불렀다. 그러고는 두 명의 호위(虎衛)를 시켜 북제 공주의 마차를 확실히 지키도록 했다. 공주의 마차에 있는 다른 여자가 경국 관원들에게 발각되면 안 되어서였다. 그런데 범한의 현재 권력과 위치를 생각해 봤을 때, 굳이 이렇게까지 조심할 필요는 없었다.

“범한 대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범한 대인, 이번 북제행에서 나라의 위엄을 크게 떨치셨더군요. 이 점, 폐하께서 매우 기뻐하고 계십니다. 이번에 경도로 돌아가시자마자 곧장 다른 일에 중용되시는 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범한 대인께서는 지금······.”

여기저기에서 아첨하는 말들이 들려왔다. 범한은 아부를 떠는 관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역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하필 그때 북제 공주는 이미 내실로 들어가 쉬고 있는 터였다. 그러니 누가 봐도 정사가 더 성대하고 융숭한 대접을 받는 것처럼 보였다. 만약 범한의 신분을 모르는 이가 이 상황을 보았다면 고작 젊은 중간 관리일 뿐인데 경국의 대신들이 왜 저렇게나 존경심을 표하는 걸까, 하며 분명 의아하게 여겼을 것이다.

범한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주변 관원들을 향해 두 손을 모아 잡고 감사 인사를 했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이 지겹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살짝 조급증이 나 주변을 쓱 둘러보기는 했다. 대부분 자신이 아는 이들이 와 있었다. 주로 태상사에 있을 때의 동료들, 홍려사와 북제 협상장에 갔을 때 부하로 부렸던 이들이었다. 이 밖에 일부 예부에서 온 관원들은 행동은 공손했지만 은근히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범한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곽유지를 거꾸러뜨린 게 어찌 보면 범한이었기 때문이다.

범한이 궁둥이를 의자에 붙이고 차부터 한 모금 마시고는 물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합니까? 황궁에서는 다른 명을 내리셨나요? 사절단은 언제 경도로 들어갈 수 있답니까?”

그런데 범한은 대답은 들을 생각도 않고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본관은 정사입니다. 그런데도 향후 일정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군요.”

예부 관원들에게는 어렵사리 마련된 범한과 가까워질 기회였다. 그러니 이 소중한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터. 한 관원이 서둘러 대답했다.

“대인, 염려 놓으십시오. 관련 의전은 예부에서 모두 짜놓았습니다. 앞서 황궁에서 모든 걸 계획해 놓으셨으니 일찌감치 준비가 끝났을 것입니다.”

홍려사에 있을 때 부하로 있던 이가 말을 이어 갔다.

“사절단 관원들이 집 떠난 지 오래되어 가족들을 그리워한다는 걸 황제 폐하께서도 잘 알고 계십니다. 특별히 교지를 내리진 않으셨으나 구두로는 사절단에게 경도로 들어오라 하셨습니다. 대인께서는 경도로 들어가는 즉시 황궁으로 가셔야······.”

그런데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4품 관원의 관복을 입은 누군가가 순간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러자 안쪽에 모여 있던 관원들이 서둘러 그를 맞아 주었다. 범한도 그를 주시하고 있다가 껄껄 웃으며 맞아 주었다. 그러고는 바로 4품 관원의 어깨를 한 대 툭 쳤다.

“임 대인, 어찌 여기에 오신 것입니까?”

관원의 정체는 태상사 소경 임소안이었다. 범한 장인의 문하에 있는 이였다. 범한의 무사한 모습에 마음이 놓였는지 임소안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북제 공주께서 혼례를 올리러 오셨으니 큰일 아닙니까. 나 같은 태상사 막노동꾼이 여기에 안 오면 도찰원에서 탄핵하는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사직은 해야 하기에 왔습니다.”

범한이 잠시 웃음으로 답했다. 하지만 ‘오늘 사절단이 올 걸 뻔히 알고서도 임소안 소경 대인이 왜 이렇게 늦게 왔을까?’ 하는 궁금증은 여전히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이에 범한이 안에 있던 관원들에게 가볍게 감사 인사를 하고는 임소안을 이끌고 문밖으로 나와 물었다.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임소안은 이 형씨가 나이가 어리기는 해도 외유내강의 성미를 지녔음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경도에 온 지 고작 1년 만에 많은 일을 벌였고, 또 많은 관원을 갈아치우게 만든 인물인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로서는 대답을 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던 중 재상 임약보는 낙향한 지 오래고, 경도에서 임씨 가문과 연관된 사람이라고는 범한밖에 없으니 임소안은 이 두 가지 상황을 가지고 잠시 이리저리재보았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저 머뭇거리고 말았다.

“범한 대인, 무엇이 말이오?”

범한이 그의 눈을 주시하며 다시 물었다.

“저는 바보가 아닙니다. 사절단이 경도로 돌아왔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요. 우리가 상경을 떠나올 때 북제 조정에서 정한 규칙들을 당연히 경국 조정에서도 알고 있을 것 아닙니까. 북제 공주마마께서 사절단과 함께 계신데 어찌하여 낮은 직급의 관리들만 마중을 나왔느냔 말입니다! 신기물 대인은 대체 어디로 가신 겁니까? 그리고 예부의 시랑들은 또 왜 안 온 거죠? 북제 공주께서 혼례를 위해 예까지 오셨는데, 어찌 황궁에서는 경험 많은 궁녀를 안 보냈느냔 말입니다! 그리고 임소안 대인은 태상사 소속이잖아요. 이러한 황실 관련 일들을 처리하는! 그러니 제가 대인께 묻는 건 너무나 당연한 거 아닙니까!”

임소안이 소리 내어 잠시 쓴웃음을 짓고는 대답했다.

“오늘은······ 참으로 공교롭게 됐군. 신기물은 그쪽으로 갔네. 예부에 있는 그 어르신들도 그쪽으로 가셨고. 범한, 이 형을 탓하지 말아 주시게. 내 서둘러 여기에 온 것만으로도 그쪽에는 죄를 지은 거니 말일세.”

“그쪽이라 함은 어딜 말하는 겁니까?”

범한이 살짝 놀라워하며 물었다.

* * *

임소안이 계속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1 황자께서도 오늘 경도로 돌아오셨다네. 지금 자네와 3리도 안 떨어진 곳에 주둔하고 계시지. 참으로 공교로운 일 아닌가! 예부, 추밀원, 병부 사람들 모두 그곳에서 시중을 들고 있다네. 그러니 사절단 쪽은 자연히 한산해질 수밖에.”

임소안은 이내 다시 말을 이어 갔다.

“범한, 자네와 교분이 있어 그러니 내 좀 거리낌 없이 물어봄세. 자네처럼 총명한 사람이 겨우 겉으로 보이는 의전 따위에 신경 쓸 리는 없을 텐데?”

전후 사정을 알게 되자 범한이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그냥 서둘러 경도로 돌아가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공주님은 또 공주님다운 대우를 받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조정에서 한 치의 소홀함이라도 내보인다면 천하 사람들의 비난을 사게 될 텐데 그러면 누가 봐도 흉한 일이지요.”

사절단을 마중 나온 인원이 이리도 적었던 이유를 범한으로서는 이제야 알게 된 것이었다. 저쪽은 병권을 쥐고 있는 1 황자. 그러니 조정 대신들은 자연스레 저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아부를 떨려면 이왕이면 더 높은 쪽에게 하는 게 좋으니까 말이다. 범한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해명하려는 임소안의 행동을 저지했다. 그러고는 이상하다는 듯 다시 질문을 던졌다.

“연초에 내려진 성지에는 가을이 깊어질 무렵 1 황자마마께서 군을 끌고 경도로 돌아오시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한데 지금은 겨우 초가을 아닙니까. 왜 벌써 돌아오신 겁니까?”

“황태후마마께서 큰손자가 보고 싶다 하셨다네.”

임소안이 잠시 소리를 내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앞당겨 경도로 오신 거라네. 지금 서로(西路)군은 정주 쪽에 주둔해 있지. 그리고 이번에 돌아오실 때 2백에 이르는 근위병들을 데리고 돌아오셨다네.”

그러자 범한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질책했다.

“예부에 있는 관원들은 곽가에게 멍청한 짓만 배웠답니까? 사절단도 경도로 들어가야 하고 황자께서도 회궁하시는 마당인데, 그 많은 예부 사람이 어찌 안배해야 하는지도 몰랐다는 게 말이 됩니까? 도중에 서한이라도 보냈다면 어느 쪽이든 하루 이틀은 지연했을 것을. 그것도 안 해 경도성 밖에서 옴짝달싹못하게 만들어 놓다니 참으로 잘했네요. 이제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예부와 홍려사 모두 자네에게 서한을 보냈네. 사절단에게 조금 더 천천히 오라고 말일세. 한데 사절단이 조금 지체하기는커녕 오히려 길을 서두르는 바람에 경도 앞에서 모두 멈춰 서버리게 된 거 아닌가.”

범한은 웃으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사절단이 서둘러 천 리를 달려오게 된 건 모두 자신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용서해 주겠네. 그러니 일단 순서가 정해지면 사절단은 그때 경도로 들어가는 걸로 함세. 어떤가?”

임소안이 범한을 슬쩍 바라보았다. 이자가 감찰원에서 얼마나 있었는지 그리고 아무에게나 버럭 화내는 오만한 진평평의 성미를 이어받았는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그가 다시 조심스레 말을 이어 갔다.

“신임 예부 상서가 사절단 쪽으로는 오기가 뭐했나 보네. 하여 내게 이 말을 전해달라 한 걸세.”

“제기랄, 이 몸은 집에 있는 마누라 생각이 간절하단 말입니다!”

임소안과는 서로 잘 아는 사이다 보니 범한은 격 없이 상스러운 말을 입에 담았다. 더군다나 웃으며 임소안을 꾸짖기까지 했다.

“이틀은 더 기다려야 하다니. 임소안 대인, 나중에 우리 집에 왔을 때 걱정 좀 해야 할 겁니다. 그 사람이 벌을 내릴 테니까요.”

임소안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범한이 말한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병들어 골골하는 몸이기는 해도 간과할 수 없는 엄청난 배경을 지닌 사람이니 말이다.

범한은 일면식도 없는 1 황자와 먼저 입성하는 문제를 두고 다투고 싶지 않았다. 물론 범한에게는 다툴 자격조차 없었다. 이에 웃으며 임소안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염려 말아요. 난처하게 만들지 않겠습니다.”

말을 마친 범한이 잠시 심사숙고하다 이내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공주마마께 먼저 알려야겠습니다. 두 분께서 만나게 해서는 안 되잖아요. 일이 살짝 틀어졌으니 신하 된 도리로 해명을 해드려야겠지요.”

말을 마친 범한이 공주가 쉬고 있는 방으로 걸어갔다. 임소안은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저 눈만 멀뚱멀뚱 뜬 채 범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언가 생각만 할 뿐이었다.

‘대체 무슨 장난을 치려는 거지?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야. 한 이틀 늦추는 게 뭐 그리 문제라라고! 북제 공주가 양보하지 않으면 자네의 해명은 오히려 싸움을 거는 것밖에 되지 않는단 말일세!’

그런데 임소안도 모르는 게 있었다. 범한은 원래 심보가 고약한 놈이고 지금은 오로지 서둘러 집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란 점이었다. 그러니 1 황자와 북제 공주가 서로 싸우든 말든 범한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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