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가을로 들어선 경국 경도의 북방 평원.
지나가는 구름 때문에 평원 위를 비추는 햇살이 비추다 말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하늘이 구름과 태양을 가지고 멋들어지게 빛과 그림자 놀이를 하고 있는데도 평원에서 일하는 백성들은 고개를 들어 그것을 보지도 않았다. 아니,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비구름이 몰려오기 전에 황금빛으로 물든 작물을 거둬들여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올해는 비교적 비가 많이 그리고 자주 내리는 편이었다. 그리고 듣자 하니 남쪽에서는 강물도 심하게 범람했을 정도라고 하던데.
하지만 강 제방이 튼튼하든, 물이 넘든 북쪽 변방 부근에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걱정거리는 오로지 갑자기 퍼붓는 빌어먹을 비 때문에 1년 수확을 망치지 않는 것뿐이었다.
가끔씩 통통하게 살이 오른 커다란 들쥐들이 겁도 없이 농민들 발 사이를 뛰어다니며 나락을 훔쳐 가기도 했다. 그런데 농민들의 손에 들린 낫은 그런 쥐들을 쫓거나 잡기는커녕 작물 수확에만 여념이 없었다.
길 양쪽으로 드넓게 펼쳐진 논에서 쓱싹쓱싹 벼가 베어져 나갔다. 벼 베는 소리는 한곳을 향해 가고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무언가 만족감을 불러일으키는 일사불란한 하나의 소리가 되어 갔다.
농민들은 웃통을 벗고 누런 땅만 바라본 채 앙상한 등을 하늘로 향하게 하고 있었다. 벼를 벨 때마다 갈라지며 솟아 나오기를 반복하는 등 근육을 무심한 하늘에게 내보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인지 논 가운데로 난 도로로 끝도 보이지 않는 마차 대열이 서서히 들어오고 있는데도 농민들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봄에 북제로 갔던 경국 사절단이 드디어 돌아온 것이었다. 가을에 돌아오겠다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9월 중에 서둘러 돌아온 것이었다.
사절단에게 생긴 변화라면 떠날 때보다 규모가 훨씬 커졌다는 점이다. 북제에서 성의 표시로 선물을 보낸 게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혼례를 올리기 위해 온 북제 공주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와 함께 온 관원과 의장대가 적지 않았으니까. 이 점만 봐도 북제 조정이 공주의 혼사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어찌 되었든 양국의 첫 번째 혼인 아니던가. 한데 이처럼 여인을 이용한 외교가 20년간 평화를 유지했던 이 대륙에 어떤 전환기를 가져올지는 아직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북제 공주의 화려한 마차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이 기다란 마차 대열 속에서 눈길을 끄는 마차가 하나 더 있었다. 혼례 준비를 위해 오고 있는 화려한 마차와도, 경국 사절단의 검은색 일색인 마차와도 대비되는 매우 초라한 행색의 마차였다. 준마가 끌고 있기는 했지만 말이 머리를 흔들며 끌고 있어 무기력함마저 더해져 있었다.
사절단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마차 자체가 너무 무거워서였다. 마차 안에는 북제의 대가 장묵한이 임종 전 범한에게 증여한 서적들이 있었다. 별 볼 일 없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것들은 북제 공주가 들고 온 패물보다도 훨씬 귀중한 것들이었다.
사절단의 여러 관원은 이 마차를 볼 때마다 자신들도 모르게 무언가 존경심 같은 게 일었다. 일단 마차가 범한 대인의 체면을 세워 주었고 아울러 절로 감탄이 나오는 범한 대인의 학문 하는 자세를 직접 볼 수 있도록 해주어서였다.
모두 알고 있었다. 마차가 북쪽 몇 개 소국을 지나 창주 외곽을 통해 경국 국경으로 들어오는 동안 범한이 줄곧 이 마차 안에서 지냈다는 것을. 그가 이 안에서 밤이고 낮이고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않고 책을 읽었다는 것을.
“이제 더 이상은 이렇게 못 지내겠어.”
범한이 한숨을 내쉬고는 들고 있던 이전 시대 시집을 뒤쪽에 있는 상자에 도로 넣었다. 바람이 차창 가림막을 닫아 버린 탓에 마차 안은 어두컴컴했다. 하여 범한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그의 음성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우리의 범 대인은 들어앉아 열심히 공부하는 당대 문학 대가인 척하고 있는 것이고, 이는 절대 진심에서 우러나서 한 행동이 아님을 말이다.
남쪽으로 내려오는 길은 매우 순탄했다. 북제 공주도 장묵한의 서거로 인한 슬픔에서 벗어난 후로는 고귀한 신분에 어울리게 위엄 있고 무게 있게 행동했다. 그러니 그녀도 범한을 귀찮게 한 건 없었다. 역참에 머무는 동안 이 청초하게 아름다운 북제 공주가 가끔씩 범한에게 이야기를 건네기는 했다. 그때마다 두 사람은 비교적 평범한 일들을 주제로 짧게 한담을 나누며 여행으로 인한 적적함을 풀었다. 물론 그때마다 신하 된 처지였던 범한은 감히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여인을 상대하는 것이다 보니 무뚝뚝한 검객 고달이나 얼음 같은 언빙운을 대하는 것보다는 한결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공주와 범한의 대화는 창주를 벗어나자마자 끝나 버렸다. 경국 영토로 들어왔으니 예법상 1 황자의 장래 처가 될 여인과 말을 섞으면 안 되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갑자기 사람 하나가 늘어나서였다. 그것도 매우 특수한 신분과 이상한 내력을 지닌, 그리고 사절단에 있는 모 형씨와 어정쩡한 관계에 있는 사람 때문에 말이다.
그 사람은 내내 북제 큰 공주와 한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그리고 날마다 눈물로 세수를 하는 통에 범한은 그자의 끔찍한 몰골을 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에 마차에 콕 들어박힌 채 이 난제 풀이를 언빙운 공자님에게 맡겨 버렸다.
그사이 범한은 감찰원에서 일부 정보를 받아 보기도 했다. 경국에서 보낸 정보 중에는 별다른 소식은 없었다. 현재 아무런 단서를 찾을 수 없는 이상한 살인 사건을 빼면 말이다. 반면 북제 쪽에서는 정말 놀라운 소식이 들어와 있었다.
심중의 사망 소식이었다. 비 내리는 밤, 서른 명이나 되는 금의위 고수의 호위를 받으며 이동 중이던 심중이 상삼호의 긴 창에 찔려 가마 안에서 죽었다고 한다.
당당한 금의위 진무사 지휘사가, 그것도 소은 이후 북제 밀정의 최고 우두머리가 이리도 무능하게 죽다니! 믿기 힘든 황당한 소식이었다. 하지만 이미 진실로 판명된 정보였다. 범한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다가 잠시 소리를 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왕계년이 적어 보낸 당시 상황이 생각나 순간 가슴이 떨려 왔다.
왕계년의 정보에 따르면, 비 오는 날 밤 상삼호는 온몸에 검은 갑옷을 두르고 긴 창을 쥐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길게 뻗은 길 위에서 갑자기 말을 달리더니 단번에 심중의 머리에 창을 꽂아 버렸다고.
그런 후 상삼호가 다시 한번 창을 휘둘렀을 때는 주위에 있던 호위병의 몸이 산 채로 찢겼다고 했다. 상삼호가 창을 거둬들이고 말을 몰아 집으로 돌아가자, 그제야 멎어 버렸던 비도 감히 다시 내릴 수 있었다고.
대체 그 기세가 얼마나 끔찍했으면 비마저도 멎었던 걸까. 이는 9등급의 절대 강자가 용맹하게 혼자 힘으로 모든 음모와 계략들을 갈가리 찢어 버린 것이었다. 순전히 무력으로 조정의 모든 권력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었다. 그러니 단순히 무모한 짓을 벌인 게 아닌 그의 잔혹함을 드러낸 것이었다.
상삼호가 이렇게나 난폭한 인물이었다니. 그리고 하필이면 상삼호가 전쟁터에서 연마해 온 철혈(鐵血)과도 같은 성품을 그동안 저평가해 왔다니. 범한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관자놀이를 아무리 문질러도 두통은 가실 기미가 없었다.
소은이 감옥에 있을 때 범한 자신이 악역이었다는 건 많은 이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물론 담무가 얼굴을 훼손하며 자살하기 직전 “저를 죽인 자는 범한입니다.”라고 고래고래 소리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소은의 죽음과 구출 작전 때 경국 사람들이 배신한 것, 이 두 개의 빚을 상삼호가 머릿속에 담아 두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범한은 경국과 북제가 대대손손 우호를 이어 나가며 전쟁을 벌이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러니 상삼호와 자신이 전쟁터에서 만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물론 심중의 죽음에는 여전히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어찌 되었든 심중은 금의위의 모든 권력을 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니 상삼호가 아무리 난폭하게 행동해도, 군(軍) 측이 아무리 화가 났어도 그를 거리에서 비명횡사하도록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북제 황궁의 반응은 심중의 죽음을 미심쩍게 보는 시각에 타당성을 더해 주고 있었다. 심중 사망 후, 북제 황궁에서는 밤새 아무런 반응도 내놓지 않았다. 다음 날이 되어서야 상삼호의 가택을 포위해 그를 감금하고 작위를 몰수했을 뿐이다.
그런 후 정말 놀라운 내용이 담긴 성지가 발표되었다. 그 안에는 심중이 최근 몇 년 동안 저지른 범죄와 위법 사실이 열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죄목들은 죽은 심중을 다시는 신원이 회복될 수 없게 오물 속으로 처박아 버렸다.
심중의 가택이 몰수되고 금의위도 내부적으로 대대적인 청소에 들어갔으며, 군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한편 아직 어린 황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분명 좋아했을 것이다. 이번 일로 황실을 향했던 상삼호의 분노가 어느 정도 누그러졌을 게 뻔하니 말이다.
하지만 사나운 호랑이 같은 상삼호는 절대 쉬이 부릴 수 있는 자는 아니었다. 그가 계속 상경에 붙잡혀 있는 것만 봐도 북제 황제와 황실이 그의 거취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죽여 버리지. 그래도 안 될 일이었다. 그 누구도 군의 반발을 원치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놓아주면 되지 않을까? 그것도 안 될 일이었다. 사나운 호랑이가 산으로 돌아가면 결국에는 후환이 남기 마련이니 말이다.
범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해당타타에게 심중에 대해 조언해 준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렇게나 빨리, 그것도 그렇게나 인정사정없이 손을 쓰다니.
범한은 비 내리는 밤에 상삼호가 심중을 제거하는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자기 신변의 안전부터 걱정해야 하건만 정작 범한은 저도 모르게 쾌감 섞인 감상에 젖어 들었다.
인정사정없는 복수의 현장. 그리고 말에 타고 있던 상삼호가 서서히 검고 긴 창을 들어 올리며 심중의 생명을 거둬들이려 하는 순간. 상삼호의 눈에는 하늘과 땅에 대한 경외심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길게 늘어선 거리 위로 쏟아지던 비도 그 순간만큼은 감히 요란스레 내리지 못했으리라.
범한이 마차 가림막을 열어젖히더니 마부에게 멈추라는 명령도 없이 곧장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런 후 얼굴로 불어오는 황토 섞인 바람을 손부채질로 막으며 길가에 서서 논에서 일하고 있는 농부들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살짝 떨려 왔다. 북제에서 일어난 일들은 벌써 머리 뒤편으로 날려 보낸 터이니 그 일 때문인 건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그 일은 범한이 개입할 수 없는 것이니 그로서는 그냥 내버려 두는 수밖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어두워졌다 밝아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에 범한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오늘 내로 룡천(龍泉) 역참에 당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살짝 안도감이 들었다. 북제 공주가 먼 곳으로 시집을 온 것이니 범한은 지금보다 훨씬 더 느리게 이동해야 했다. 하지만 남모를 근심이 있었던 범한은 사절단 내에서 누구도 감히 자기 의견에 토를 달 수 없다는 걸 이용해 마차 속도를 높여 예정보다 빨리 경국에 도착했다.
그리고 눈앞에 경도가 보이는 지금, 범한은 그제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멈출 수 있었다. 내일이면 완아를 만날 수 있으니까. 완아는 그동안 몸이 많이 좋아졌을까? 그리고 누이 약약은 괜찮을까? 오죽 아저씨가 경도에 있었다면 그동안 별일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범한이 뒤편에 있는 마차에 올라탔다. 자는 척하는 언빙운을 향해 이맛살을 찌푸리며 꾸짖었다.
“자기가 저지른 일은 직접 해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곧 경도로 들어가는데 저 여인을 계속 공주마마와 함께 있도록 할 건가요? 북제 쪽에서 알게 된다면 우리는 중대 범죄자를 은닉한 게 돼요. 그때 가서 조정에는 어떻게 해명할 생각입니까?”
언빙운이 눈을 떴다. 그리고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는 상사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곧장 창밖 황금빛 벌판으로 눈을 돌렸다. 그의 눈빛에 잠시 발버둥 치는 느낌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담담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심중이 죽었습니다. 북제 황제가 권력을 되찾아 가는 첫 번째 단계를 실행에 옮긴 것뿐이죠. 그러니 저들은 그녀의 생사 따위에는 관심도 없을 것입니다.”
언빙운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범한이 돌연 부드러운 음성으로 답했다.
“저 여인이 살든 죽든 관심이 없다면 내게 처리를 맡겨줘요.”
언빙운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잠시 성난 눈빛을 번뜩였다.
“죽여 버리세요. 우리에게 좋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겁니다.”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이어 갔다.
“지금껏 언 대인이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데 지금 보니 자기 자신도 속이며 살고 있었군요.”
언빙운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돌려 풍성한 수확이 한창인 창밖 농부들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