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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222화 (222/1,108)

222화

역참에서는 사신단과 공주 일행이 이곳을 지나칠 걸 알고 있었다. 이에 역참 내부는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각종 도구도 황궁 예법에 따라 준비되어 있었다. 범한은 잠시 점검해 본 후 본실로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뒷문으로 나갔다. 그런 후 역참 뒤쪽에 있는 사람 키보다 높게 자란 수수밭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대부분의 사람들이 역참 안으로 들어왔다. 한데 예부에서 임시로 파견한 관리가 바삐 움직이는 바람에 아무도 범한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역참 밖, 아직까지 두 대의 마차에서 사람이 내리지 않고 있었다. 한 대에는 북제 큰 공주가 타고 있었다. 모두 공주마마가 상심이 큰 상태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아무도 서둘러 내리라고 재촉할 수 없었다. 나머지 한 대에는 준수한 외모를 지녔지만 북제 관리 입장에서 봤을 때 악마 같은 사람이 타고 있어 아무도 그 마차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마차에 관심을 갖고 있는 건 범한이 경계를 서라며 배치시켜 놓은 호위와 감찰원 관원뿐이었다.

뒤쪽에 있는 마차에서 입구를 가리고 있던 장막 모퉁이가 살짝 열렸다. 그러더니 희고 차가워 보이는 손이 불쑥 튀어나와 손짓했다. 마차 옆에 있던 감찰원 관원이 얼른 다가가 장막 귀퉁이에 바짝 붙어 물었다.

“언빙운 대인, 무슨 분부십니까?”

그러자 모퉁이에서 준수하지만 찬바람이 쌩쌩 도는 언빙운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리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대인은 어디 가셨는가?”

그가 사신단 안에서 대인이란 존칭을 붙이는 사람은 범한뿐이었다. 이에 감찰원 관원은 그를 잠시 바라보고는 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저는 모릅니다.”

언빙운이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더 이상은 말할 수 없다는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작게 말했다.

“오는 길에 옅은 청색 옷을 입은 여인이 마차를 따라오지 않았는가? 붉은색의 커다란 말을 타고 왔을 수 있네.”

감찰원 관리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자 언빙운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살짝 열었던 장막을 닫아 버렸다. 심중 대인의 딸이 자신을 보러 오지 않은 걸 확인한 언빙운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하지만 왜 인지는 모르겠으나 후련함 뒤로 살짝 암울한 기분 같은 게 따라왔다.

* * *

수수밭 바깥쪽에 정자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다. 정자 옆에는 사람이 오가지 않는 오래된 길이 나 있었고 길 위에는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그리고 정자에는 낭자 둘이 서 있었다.

바람이 강하게 불며 수수밭이 살짝 어지럽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범한이 걸어 나와 느긋하게 정자로 다가갔다. 범한이 풍만하고 아름다운 낭자를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상경에 도착한 후로는 서로 말도 제대로 못 해보고 헤어졌군요.”

사리리가 범한을 바라보며 살며시 인사하고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인께 인사드립니다.”

범한은 다른 말은 않고 옆에 서 있는 해당타타를 잠시 바라봤다. 해당타타가 잠시 웃더니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갈라진 바닥 위에 발끝을 놓더니 몸을 날려 멀리 사라지고 정자에 이 이상한 남녀 둘만 남겨 두었다.

해당타타가 정자에서 사라지자 범한은 자신이 언제 온화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곧바로 정색하며 사리리를 바라보았다.

“입궁하면 모든 걸 조심해요. 황태후는 쉬운 사람이 아니니 그분을 속이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사리리가 범한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에도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따스함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런 사리리가 따스하게 말했다.

“겨우 조심하란 말뿐인가요? 달리 해주실 말씀은 없으신지요?”

범한은 잠시 웃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품에 안아 주지도 않은 채 말했다.

“북제에 남아 있기로 했잖아요. 그런데 왜 내 마음을 약하게 만들려는 거죠? 설마 사리리도 여자라고 나 같은 속물의 마음을 가지고 놀 생각인가요?”

사리리가 담담하게 웃었다. 그런데 해당타타 앞에서 보여 주었던 연약한 느낌은 아니었다. 사리리가 말했다.

“대인은 원래 그런 분 아니신가요? 소녀, 북제에 남기로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런데도 대인께서 먼저 그런 말을 꺼내시는 걸 보니 제가 경도로 데려가 달라 떼라도 쓸까 걱정되시는 거군요?”

그러자 범한의 눈동자에 장난기가 반짝였다.

“당신은 훗날 북제 후궁의 주인이 될 사람입니다. 그런데 무엇 하러 나 같은 사람과 어울리려 하는 겁니까.”

사리리도 웃으며 말했다.

“황궁 안에 기거할 곳이 있는 것만으로도 잘된 일인데 뭘 더 바라겠습니까.”

범한이 고개를 내젓다가 뜬금없는 말을 했다.

“리리, 당신은 세상의 다른 여인들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에요.”

사리리가 아, 하고 소리를 내더니 이내 담담하게 답했다.

“제가 어려서부터 세상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으니 어쩌면 종일 집 안에서 수놓고 시 읊는 여인들보다는 제멋대로인 구석이 있을 거예요.”

그러자 범한은 그냥 가만히 듣기만 하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리리의 말이 일리가 있어서였다. 보통의 여인들은 집에서 가만히 지내기 때문에 사리리처럼 경험을 쌓는다든가, 해당타타와 같은 자유분방함이 없으니 말이다. 범한이 고개를 돌려 해당타타가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짐짓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능력을 믿어요. 하지만 그래도 경고는 해야겠군요. 늙고 썩고 어리석은 사람을 절대 얕잡아 보지 말아요.”

정자 안 분위기가 잠시 답답해졌다. 그러길 한참 후, 사리리가 몸을 깊이 숙여 범한에게 인사했다. 이어 고개를 숙인 채 머릿결을 바람에 흩날리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대인께서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대인과 이야기를 나누니 참 좋습니다. 마치 그때의 마차 안으로 되돌아간 것만 같습니다.”

범한은 사리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여인의 말 중에 대체 얼마만큼이 진담이고 얼마만큼이 농담인지 범한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사리리가 살며시 웃었다. 원래 아름다운 외모가 더 아름다워졌다. 그런 그녀가 범한에게 말했다.

“대인, 오는 도중 해독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말은…… 진심입니다.”

“나는 진평평이 아닙니다.”

범한이 말을 이어 갔다.

“아무리 이익을 위해 하는 행동이라도 비교적 부드러운 방식으로도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 믿거든요. 더군다나 북제 황제가 당신 때문에 독에 중독되기를 원치 않고요. 물론 지금 보니 진평평의 계획은 처음부터 성공할 가능성이 없었군요.”

사리리의 두 뺨이 발그레해졌다. 자신과 가장 가까운 남자가 이미 무언가를 알아차린 것 같다고 생각해서였다.

범한이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이어 갔다.

“낭자는 나중에 황궁에서 지낼 테니 지체 높은 분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감찰원의 손발이 아무리 길어도 당신을 통제할 수 없겠지요. 그러니 당신과 나 사이의 협의가 유효한지는 우리 두 사람 마음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자 사리리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대인은 염려 놓으셔요.”

한데 이리도 아름다운 여인을 계속 보고 있다 보니 범한은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에 잠시 정신을 가다듬은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북쪽에서 소식을 기다려요. 안전하게 지내고요. 그리고 조만간 누군가가 당신의 원수를 갚아 줄 것입니다.”

사리리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범한을 바라보았다. 범한은 그녀의 눈에 담긴 기쁨을 모른 척하며 옷소매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건네며 말했다.

“이 사람을 통해 나와 연락하면 돼요. 그리고 읽은 후 꼭 없애 버려야 합니다.”

범한이 돌연 미소 지었다.

“우리 사이의 협의를 깨도 좋아요. 하지만 날 팔아넘기는 건 안 됩니다. 이 사람은 나와 직통으로 연결된 사람이니 북제에게 넘겨도 아무 소용 없을 겁니다. 그러니 모험을 하지 않는 편이 가장 현명한 거겠지요.”

말을 마친 젊은 대인이 괴상하리만큼 달콤하게 웃자 사리리는 살짝 놀랐다. 그리고 두려운 기분이 들어 사리리는 얼른 고개부터 끄덕였다.

“그리고 만약…….”

범한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만약 언제든 북제 황궁을 떠나고 싶으면 내게 알려 줘요. 그 일은 내가 처리해 주리다.”

“고맙습니다, 대인.”

사리리가 나긋나긋한 자태로 고개를 숙이며 범한에게 인사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번만큼은 진심과 미련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얼마 후 자신이 곧 떠날 것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사리리는 살짝 어두운 기색으로 말을 이어 갔다.

“이번에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나게 될까요?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리리는 간장이 끊어질 것 같습니다.”

범한은 ‘간장이 끊어질 것 같다’는 말 속에 숨은 의미를 찾느라 한껏 인상을 썼다. 하지만 사리리는 이 말을 끝으로 한창 생각 중인 범한을 뒤로한 채 곧장 정자를 떠났다.

* * *

범한은 버려진 길을 따라 사라져 가는 마차를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한숨을 내쉬었고 그런 후에는 퍽, 하고 소리가 나도록 정자 기둥을 주먹으로 한 대 쳤다. 정자는 오랫동안 수리가 안 됐던 터라 범한과 사리리가 이별하고 있는 순간에도 무너질 듯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데 범한이 주먹으로 한 대 치자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웅웅 울어 댔다.

사람 하나가 정자 위에서 내려왔다. 당연히 해당타타였다. 그녀는 범한 옆에 사뿐히 착지하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타타는 아무것도 훔쳐 듣지 않았어요.”

“낭자가 훔쳐 듣고 있었다면…….”

범한이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어 갔다.

“내 곧장 입을 다물었겠죠.”

해당타타가 미소 지었다.

“범한 대인이 제국을 떠나고 나면 언제 다시 만나게 될까요?”

그러자 범한은 경도에 있는 누이동생이 생각나 자기도 모르게 탄식하며 말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런데 낭자의 그 유명하신 스승님께서는 어디 가셨나요?”

범한이 느닷없이 화제를 돌렸다.

“북제에 와놓고 대종사님께 인사 한 번 못 드렸군요. 그 점은 참으로 유감이네요.”

해당타타가 잠시 생각을 해보더니 솔직히 말해 주겠다 결심하고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경국 사신단이 상경으로 들어오기 사흘 전 스승님께서 나무 조각 하나를 받으셨어요. 그길로 곧장 상경성을 떠나셨는데 어디로 가셨는지는 몰라요. 황태후마마와 내게도 비밀로 하셨거든요.”

“상경에 있는 동안 내가 남들의 이목을 속이는 데 낭자가 많이 도와줬군요.”

범한의 눈이 오래된 길 끝, 황무지에 홀로 서 있는 나무를 바라보았다.

“그 점은 정말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북쪽으로 보내는 화물 문제는 지금 내가 장영후, 심중과 논의 중이기는 해요. 그런데 만약 북제 폐하께서 내게 은전을 빌리셔야 한다면 심중 문제부터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그자는 평범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독한 인물이었어요.”

해당타타는 곧장 반응하지 않고 잠시 후 입을 뗐다.

“이건 나와 대인 두 사람만의 비밀이군요.”

범한이 그녀의 맑게 빛나는 눈을 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똑똑히 말했다.

“세상에서 내 손위 처남 말고는 바보처럼 순수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 우리 둘 사이의 비밀이라고는 하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을 속일 수 있을까요? 타타, 이번 북제행에서 당신은 알게 모르게 나를 많이 도와줬어요. 그러니 당신의 사형들이 알아채지 못했을 거란 생각은 접어요.”

그러자 해당타타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범한이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낭자와 황제 폐하께서 황태후마마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는 계획이 단순히 황궁 내 투쟁으로만 그치지는 않을 거예요. 그건 외부 사람에게서 조달한 자금으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요. 북제는 지금 대국입니다. 그러니 국정 대권을 전반적으로 장악하려면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거고요.”

해당타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범한 대인이 무언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군요.”

“그래요?”

범한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러면 괜한 걱정을 한 건가요?”

해당타타가 엉뚱한 대답을 하듯 말했다.

“나는 스승님을 존경하고 도리를 지키는 착한 제자랍니다.”

이에 범한이 불쑥 이상한 말을 꺼냈다.

“장묵한 대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장묵한은 천하 각지에서 문하생을 배출한, 세인의 지극한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작년에 발생한 사건을 빼고는 그에게는 도덕적으로도, 문장으로도 그 어떤 오점도 없었다. 해당타타도 그 노인을 매우 존경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하필 오늘 상경 외곽에서 사신단을 기다리느라 장묵한의 임종 소식을 듣지 못한 상태였다. 이에 그녀는 순간 놀라움과 슬픔에 빠진 얼굴로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정자에는 일순간 슬픔이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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