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맑은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범한의 마음도 덩달아 가뿐해졌다. 범한은 단단히 여며 두었던 옷깃의 단추를 풀었다. 그리고 속으로 ‘이런 폭염에 단비 같은 바람이 분다고?’라고 생각했다. 이에 고개를 돌려 보니 아니나 다를까, 왕계년이 범한에게 잘 보이려고 옆에서 부채질을 해주고 있었다. 그것도 아쉬움과 슬픔이 잔뜩 어린 얼굴을 하고서 말이다.
범한은 자기도 모르게 푸흡, 하고 웃으며 왕계년을 질책했다.
“겨우 1년인데 왜 그리 울상입니까! 집에 있는 부인과 딸은 자연히 내가 잘 돌볼 것이니 걱정 말아요.”
사신단이 떠나는 것이니 언빙운도 당연히 그들과 함께 귀국해야만 했다. 이는 곧 북제에 심어 둔 첩보망에 우두머리 자리가 공백 상태가 된다는 걸 의미했다. 이에 감찰원에서 왕계년에게 ‘경국 홍려사 상주 북제 거중랑’이라는 신분을 내려 주고 상경에 머물며 임시로 북쪽 사무를 관할하도록 했다. 그리고 반년 후 감찰원에서 비밀리에 관원을 파견하면 그에게 업무를 넘겨 주도록 했다.
더군다나 범한은 감찰원에서도 특수 신분인 제사라는 직위에 있었으므로 왕계년이 북제에 남아 있는 일은 경도 관아의 수속을 거칠 필요도 없이 간단히 처리되었다. 다만 문제는 왕계년이 이번에 사신단과 함께 귀국할 수 없음을 알고 조금 실망해 불안감을 떨쳐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왕계년은 이번 일이 나중에 더 높은 관직으로 올라가게 만들어 줄 절호의 기회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어느 정도는 달갑지 않은 구석이 있었다.
“대인, 하루라도 대인께서 하시는 말씀을 안 들으면 온몸이 쑤실 것입니다.”
왕계년이 미련을 잔뜩 담은 눈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범한이 잠시 웃고는 말했다.
“북제와 충돌하지 말고 명철보신해요. 그러면 1년 후 내가 경도에서 환영회를 열어 줄게요.”
사실 범한은 옆에서 자신을 즐겁게 만들어 주는 측근의 존재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도 왕계년을 남겨 두기로 결정한 건 그가 감찰원 안에서 자신의 유일한 심복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쉽기는 해도 장 공주의 자금 통로를 막기 위해 그를 북제에 남겨 둘 수밖에 없었다.
* * *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성문 쪽에서 느닷없이 준마 한 필이 달려 나왔다. 한데 말에 타고 있는 사람은 관리가 아닌 어느 집 하인처럼 보였다. 이에 관리들은 자연스레 말의 움직임에 주목하며 상경성에 있는 관청에서 어찌 백성 하나만 딸랑 이곳에 보냈을까, 하고 생각했다.
눈이 예리했던 범한은 배웅 대열 맨 앞쪽에 위치한 태부의 얼굴이 어두워지고 눈이 슬퍼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말은 곧장 북제 관리들이 있는 곳 맨 앞까지 달려왔다. 이어 하인이 서둘러 말에서 내리더니 울먹이며 태부의 귀에 무어라 속삭였다. 그런 후 하인은 태부에게 천에 둘둘 말린 것을 건네고는 성문이 있는 뒤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태부의 몸이 휘청거렸다. 어떤 자극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성문에서 마차 한 대가 천천히 달려오는 걸 바라보며 슬퍼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범한을 잠시 바라보았는데 그는 살짝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태부가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범한에게 다가왔다. 영문을 모르는 범한은 불안한 마음에 얼른 마차에서 내려 태부 대인이 건네주는 것부터 받아 들었다. 긴장하며 천을 풀어 보니 시집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책장에는 살짝 구불구불한, 노쇠한 필체로 써진 글자 몇 개가 적혀 있었다.
-《반한재 시집: 노인 장묵한 주(注)》
태부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잠시 아무 말 없이 범한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선생께서 대인에게 남긴 것이오.”
말을 마친 태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깊고 무거운 슬픔을 싣고 말았다.
“장묵한 선생께서…… 돌아가셨다오.”
범한은 순간 할 말을 잃은 채 시집만 꽉 움켜쥐고 있었다. 지난밤 장묵한과의 만남이 마지막일 줄이야. 그날 밤 장묵한은 정신력이 작년만 못하게 많이 노쇠해졌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그때는 문단을 이끌어 온 큰 인물이 이렇게 갑자기 세상을 떠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장묵한의 유언은 그의 마지막 작업이자 성과인 이 책을 범한에게 건네주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의 유언에는 복잡다단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즈음 되자 상경성에서 사신단을 배웅하러 나온 관원들도 이 놀라운 소식을 하나둘 알게 되었고, 관원들 사이에 슬픔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금 전보다도 많은 북제 관원들이 범한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눈빛에는 범한을 향한 경계심, 분노, 의심이 담겨 있었다.
북제 사람들의 생각을 범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장묵한의 일생에서 유일한 오점이 바로 자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막상 장묵한이 세상을 떠나자 암담한 기분이 든 범한은 자신에게 쏟아지고 있는 저 복잡한 감정을 담은 눈빛들을 무의식적으로 몽땅 차단해 버렸다.
모두 장묵한을 기리고 있을 때였다. 성문에서부터 버겁게 달려오던 마차가 관원들이 주목하는 가운데 드디어 사신단 대열 맨 뒤쪽에 도착했다. 마차는 상자 칸을 이루는 나무 부분이 살짝 변형되어 있었다. 그리고 덜컥거리며 거슬리는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마차 칸 안에 중요한 물건이 있는 게 분명했다. 앞서 장묵한 대가의 유품을 들고 왔던 하인이 어느새 범한을 이끌고 마차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범한 대인, 어르신의 유언입니다. 부디 이 마차를 남쪽까지 무사히 가지고 가 잘 보관해 주십시오.”
사람들은 장묵한의 임종 소식으로 인한 슬픔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슬픈 감정과는 별개로 장묵한이 죽기 전까지 잊지 않고 있다가 범한에게 전해 주려던 게 대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태양이 따가워지자 범한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마차 칸을 덮고 있던 두꺼운 장막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범한의 눈은 순간 휘둥그레졌다.
책에는 아름다워지는 방법, 돈을 많이 벌게 해주는 방법, 부자 관원이 되도록 해주는 방법이 있다.
그러니 마차에 담긴 게 미인과 보석은 아닐지라도 범한은 놀라고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책은 마차 한가득 있었다. 장묵한이 평생에 걸쳐 모은 것일 테니 그의 지위와 신분을 고려해 굳이 일일이 꺼내 확인해 볼 필요도 없었다. 분명 모두 귀중한 희귀본, 구하기 힘든 원본일 것이 뻔했으니 말이다.
장묵한의 하인이 옆에서 공손히 책 한 권을 건네며 말했다.
“범한 대인, 어르신께서 직접 정리하신 서적 목록입니다. 뒤쪽에는 서적과 관련한 주의 사항이 적혀 있습니다.”
범한이 탄식하며 손에 쥐고 있던 장막을 놓았다. 그리고 하인이 건네주는 책을 들고 진지하게 책장을 넘겨 보았다. 아무리 인쇄술이 장족을 발전을 거두었다고는 해도 아직까지는 책을 인쇄하는 건 대단한 일이다. 그러니 마차에 가득한 책에 대해서는 더 이상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장묵한 어르신이 자신에게 책을 물려주셨다니. 범한은 절로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리고 이 순간 슬픔에 잠긴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르신께서 물려주신 서적들을 부디 잘 보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는 하인의 의견임을 범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범한은 손을 가슴팍까지 올려 예를 갖춰 진지하게 인사하고는 정중하게 말했다.
“걱정 말게나. 이 범한이 죽은 후에도 이 서적들은 대대손손 전해질 것이네.”
북제 관원들은 어느새 범한 주위를 에워싸고 마차에 가득 쌓여 있는 서적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모두 과거를 치르고 관직에 오른 이들이었으니 저 서적들이 진귀한 희귀본이란 걸 모를 리 없었다. 이에 장묵한 자신이 평생 연구한 귀한 서적들을 경국 관리에게 남겼다는 사실이 놀라기도 하고 은근슬쩍 질투심도 일었다.
태부는 자신의 은사이신 아버님의 행동이 지닌 의미를 잘 알고 있던 터라 자기도 모르게 작게 소리를 내며 탄식했다.
책을 물려준 것은 본보기를 보인 것이었다. 더욱이 장묵한 자신의 태도를 보여 준 것이므로 책을 물려줬다는 것은 단순한 ‘기증’이 아닌 상징적인 의미의 ‘전승’이었다. 그러니 북제 문신들이 제아무리 잘났어도 이제는 범한의 존재를 얕봐서는 안 된다는 걸 알려 준 것이었다. 다시 말해 천하 문인들에게 범한이 차지하는 지위를 책을 물려주는 의식을 통해 인정받도록 한 것이었다.
* * *
범한이 고개를 돌려 태부를 잠시 바라보고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감정적으로나 도의적으로나 상경성으로 돌아가 제를 올려야 안심하고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태부의 눈동자는 더 이상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얼른 성안으로 돌아가 하늘나라로 간 넋에게 절을 올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범한이 제를 올리겠다고 하자 그는 범한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그리하라 했다. 한데 홍려사 소경 위화가 어느새 두 사람 곁에서 인사를 하더니 낮고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셨으니 온 세상이 슬퍼할 것입니다. 하오나 태부 대인, 범한 대인, 사신단의 귀국은 정해진 일입니다. 사신단이 깃발까지 높이 든 이상 이제는 상경성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범한은 눈을 들어 상경성의 청회색 성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마치 장묵한이 있는 하늘이 보이기라도 하는 듯 아른거리는 연자색의 빛을 바라보았다. 범한은 옷을 단정히 고쳐 입었다. 그런 후 성문 안쪽을 향해 최대한으로 깊숙이 허리를 굽혀 외문(外門) 제자의 예를 올렸다.
태부는 범한의 행동이 살짝 의외였다. 하지만 그가 제자의 예를 올린 덕분에 지난해 봄 파문에도 불구하고 장묵한에게 존중과 숭배의 의미를 담아 비를 세울 수 있게 되었으니 내심 안심이 되었다. 이에 태부는 옆에 있는 범한에게 답례의 인사를 했다.
* * *
예포가 울렸다. 그것이 사신단을 배웅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돌아가신 넋을 불러오려는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종잇조각이 하늘 가득 날리고 살짝 코를 찔렀던 연기가 순식간에 사라지자 인간사의 무상함을 절로 느끼게 해주었다.
사신단 마차가 서서히 움직이며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북제의 관리들은 행렬 뒤에서 경국의 마차가 떠나는 걸 바라보았다. 그러다 책이 가득 담긴 무거운 마차가 그 뒤를 따르기 시작하자 일제히 탄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얼마 후 그들은 이내 의관을 바로 하고 슬픈 얼굴로 집으로 돌아가 상복으로 갈아입고는 장묵한 대가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황태후와 폐하께서 이미 상갓집에 도착해 있을 거란 생각에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서둘렀다. 하지만 태부 대인과 장묵한의 제자인 몇몇 대학사들은 슬픔이 너무나 커 울다 지쳐 거의 쓰러질 지경이 되어 있었다.
* * *
마차 행렬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상경성의 웅장한 성벽이 점점 푸르고 빽빽한 산에 가려져 사라질 즈음, 이들은 상경성 밖에 위치한 첫 번째 역참에 도착했다. 규율에 따라 귀국하는 사신단과 혼인을 위해 길을 나선 큰 공주의 마차 행렬은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길을 떠나야 했다. 범한이 느릿느릿 마차에서 내려와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다 서책이 실린 마차에 다다르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참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렇지만 범한은 금칠 위에 붉은색을 덧발라 화려하게 장식된 마차까지 걸어가 허리를 굽히고 예절 바르게 인사했다. 그리고 공손하게 말했다.
“역참에 도착했습니다. 공주마마께서는 쉬시옵소서.”
얼마 후 마차 안에서 여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인 편한 대로 하시오. 본궁은 잠시 혼자 있고 싶소.”
범한 입장에서는 처음으로 북제 큰 공주의 목소리를 들은 것이었다. 그런데 살짝 갈라지는 소리가 나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찰나, 마차 장막이 열리며 눈이 시뻘게진 궁녀 하나가 내리더니 범한 곁으로 다가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공주마마께서 조금 불편하신 상태이십니다. 그러니 범한 대인, 조금 기다리시지요.”
그러자 범한이 신경 써주는 말을 했다.
“공주마마께서는 천금의 귀한 몸이시니 이런 긴 여정은 힘드실 거네. 그러니 어서 쉬셔야 하네.”
궁녀는 범한의 수려한 용모를 보니 절로 신뢰감이 생겨 작은 소리로 말했다.
“공주마마께서는 장묵한 대가의 제자이십니다. 그래서 지금 그분의 임종 소식 때문에 슬퍼하고 계십니다.”
그제야 이유를 안 범한은 동정하는 눈빛으로 마차를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공주가 울음을 그치지 않았던 게 사람됨이 오만해서가 아니라 은사를 기리는 마음 때문이었다니. 장묵한은 상경성 안에서 임종했고 공주는 성 밖으로 나와 있으니 오늘만큼은 황실 사람인 게 슬펐을 것이리라.
범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데 자신의 처지가 생각나 그랬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범한은 궁녀에게 몇 마디 당부의 말을 하고는 호위와 사신단의 주요 인물들을 불러 그들에게 할 일을 배정해 주고 홀로 역참 안으로 들어갔다.